89화.
아일라의 말에 타르토스가 뭐라 입을 열려다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아일라!”
선황의 이름을 부르는 타르토스는 다급해 보였다. 어느새 아이를 메릴에게 넘긴 그녀가 마력을 일으켜 결계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천천히 쌓아 올려지는 마력 결계는 이실리스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녀가 일으킨 결계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르토스가 이를 갈고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일라의 부족한 마력을 채우기 위해 마력을 넘기는 그의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베르타스는 그 순간 저 타르토스라는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와 같았다. 라르헨을 위해 희생하는 이실리스와 선황은 똑같은 사람이었다. 라르헨이 그들을 위해 해 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라르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타르토스와 베르타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마력을 바라보면서 베르타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저게 문제였다. 저것 때문에 늘 책임감에 짓눌려 사는 이실리스. 할 수만 있다면 저 결계를 깨부수고 싶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베르타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저 결계를 부수겠다.’
이실리스도 결계를 세우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마력이 약한 선황이니 더 걸릴 거라고 생각한 베르타스가 베루스 공작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자네가 저분들을 부른 건가?”
“그렇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군.”
“국부.”
허리를 숙이는 베루스 공작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진 베르타스가 메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리카를 안고 그에게 다가선 메릴이 에리카를 넘겼다.
“시녀장.”
“예.”
“네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면 나는 너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실리스의 호의에 기대어 지금까지 연명했다면 해야 할 일을 똑바로 해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차가운 베르타스의 분노를 느낀 것일까. 에리카가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아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에리카.”
그의 딸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인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의 마력을 라르헨을 위해 희생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니라고 했는데요?”
아직은 짧은 혀로 말하는 에리카에게 베르타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의 마력은 너의 것이란다.”
“내꺼?”
“그래. 너의 것.”
베르타스의 말에 에리카는 갸우뚱 고개를 움직였고 메릴은 고개를 숙였다. 베르타스의 눈빛이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에리카에게 라르헨의 황족들이 받는 교육을 받게 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이실리스처럼 자라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선 베르타스가 앞에 서 있던 다한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다한 경. 앞으로 에리카의 교육을 그대에게 맡기겠네.”
“네…… 네?”
마법사들을 두고 그에게 교육을 맡긴다는 소리에 다한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 중 실력 있는 자들은 내가 데려갈 테니 너는 이곳에서 에리카를 지켜라. 아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자들의 접근을 막아.”
“쓸데없는 소리…… 말입니까?”
“그래. 쓸데없는 소리.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사용해야 한다느니 하는.”
“아, 알겠습니다.”
베르타스가 의미하는 것을 알아챈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실 저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기사인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사람에게 기대서 성장하는 나라라니. 헛소리였다. 마력 결계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라르헨을 통해서 알기는 했지만, 노력이 아닌 타고난 재능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은 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타스가 마음먹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라르헨도 무언가 변하겠군.’
다한이 생각했다. 그들의 수장인 베르타스가 결심한 이상 라르헨은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그의 저력이었으니까.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메릴의 모습에 다한이 표정을 굳혔다. 에리카를 다한에게 넘긴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실리스를 찾으러 가겠다.”
“네?”
“이실리스가 실종되었으니 찾으러 간다고.”
“각하, 라르헨은 어쩌고…….”
“나에겐 이 나라보다 내 딸이 더 소중했는데 내 아이를 지켜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녀를 찾으러 간다.”
“정말 폐하께서 실종된 것이 맞습니까?”
“가서 알아봐야지.”
계속해서 웅웅대는 통신석을 느낀 그가 서둘러서 자리를 옮겼다. 아무도 없는 황궁의 빈방에서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받나!
“페일러스. 이실리스가 사라진 게 사실인가?”
-사실이니 내가 연락을 했지! 라르헨의 결계가 사라진 거 보면 몰라?
어떻게 눈을 두고 그걸 모를 수 있냐는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실리스가 위험에 처했다면 그녀를 제 곁으로 보내줘야 했다. 그게 이 목걸이가 가진 힘이었다.
‘그랬는데 반응이 없다라…….’
왜일까. 목걸이의 마력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대신관이 말했던 것처럼 이 목걸이는 라르헨의 초대 황제가 만든 것. 초대 황제의 마력 범위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목걸이가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이실리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베르타스는 그것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말해봐 페일러스. 상황이 어떻게 된 거지?”
-뭘 물어. 알뤼르한테 다 들었을 거 아니야.
“그게 정말 사실이라는 건가? 이실리스가 바다에 빠져서 사라졌다고?”
-그래.
“정말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야. 나도 지금 황당하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엔 후회의 기색이 가득했다.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으면 출정식에 나도 나가보는 건데.
“사라진 거지, 죽은 게 아니다.”
-그걸 어떻게…… 그렇군.
베르타스의 목걸이를 기억해 낸 페일러스가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올 건가?
“당연한 소릴.”
-황태녀는 어쩌고?
“믿을 만한 사람이 맡아주기로 했네.”
-선황이 오셨나 보군.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놀랐다.
“황궁에 사람이라도 심어둔 것처럼 말하는군.”
-아니니까 내 뒷조사를 할 생각은 하지도 마. 네놈이 나서면 하나에서 열까지 털릴 걸 아니까. 그렇게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경고하듯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미간을 구겼다. 이실리스의 신하인 자가 황궁에 눈을 심다니.
-무슨 생각하는지 알 거 같은데 그거 아니니까 생각하지 말라고!
“이토르트 항구에서 보지.”
항의하듯 외치는 페일러스에게 베르타스가 마지막 말을 끝으로 통신석의 연결을 끊었다. 그냥 끊었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정보를 있는 대로 끌어모을 페일러스를 알았다. 이실리스의 실종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였으니까. 그래도 이실리스의 곁에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에 베르타스는 만족했다.
“이실리스.”
살아 있으니 되었다. 어디 있든 반드시 찾고 말겠다. 주먹을 불끈 쥔 베르타스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할 만큼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드디어 완벽하게 라르헨의 결계가 세워졌다. 결계가 세워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귀족들과 라르헨의 제국민들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얼굴을 굳혔다. 이실리스에게 매달리던 사람들이 새로이 결계가 세워지자 선황이라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을 보니 있던 정도 떨어졌다.
‘저런 이들을 위해서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었나, 이실리스?’
지금은 곁에 없는 그녀에게 베르타스가 물었다. 들어주는 이 없는 공허한 물음이 그의 마음속을 울렸다. 그 질문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소리 없는 울림을 내었다. 라르헨의 사람들에게 베르타스가 선을 그은 순간이었다.
“베르타스 라르헨.”
선황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리 오게.”
손짓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싶지 않았지만 움직였다. 그를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있었기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에게 명을 내리겠다.”
황제인 이실리스가 없자 그녀의 대행 자리에 앉은 선황이 파리한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엔 또 다른 국부인 타르토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에게 마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이실리스를 찾아오너라.”
“선황 폐하! 황제께서 살아계신단 말입니까?”
한목소리로 묻는 귀족들의 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누구 하나 이실리스의 행방을 묻는 이는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결계 타령만 하던 자들이 이제 와 이실리스에 관해 묻다니. 구겨질 뻔한 표정 위에 무표정을 간신히 덧씌운 그가 선황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독대를 청합니다.”
궁금해하는 귀족들의 얼굴을 보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었다. 베르타스의 말에 선황이 가볍게 손짓하자 웅성거리면서도 자리에서 물러나는 귀족들을 보면서 분노를 삼켰다. 지켜줄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시류에 따라 편승하는 자들. 저들은 이실리스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터였다. 누군가 결계를 보강해줄 사람만 있다면.
‘거머리 같은 것들.’
베르타스의 표정 변화를 모두 본 그녀가 그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그런 자들이니 신경 쓰지 말게.”
“선황께서는 그게 됩니까?”
날 선 그의 말에 타르토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러나 아일라의 제지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타르토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표정을 바로 했다.
“내가 부탁하겠다. 이실리스를 찾아다오.”
“당연합니다.”
그가 이실리스를 찾으러 떠나는 것은 당연했다. 제 여자를 제가 찾지 않으면 누가 찾는단 말인가. 그만큼 이실리스가 절실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을 가져가거라.”
베르타스에게 자그마한 단검을 내미는 선황을 보면서 의문 어린 표정을 짓자 그녀가 설명했다.
“이 단검이 이실리스의 위치를 알려줄 것이다.”
“제게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터. 가져가거라.”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베르타스는 거절할 수 없었다. 어딘지 절실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베르타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내 딸을 찾아다오.”
무너질 것 같은 선황의 표정을 정면으로 보게 된 베르타스가 말을 잃었다. 입을 다문 채 답하지 않는 그를 향해서 아일라가 다시 속삭였다.
“내 아이를 찾아다오. 베르타스.”
그녀의 마지막 말에도 한동안 말이 없던 베르타스가 간신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