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바닷속으로 끌어 당겨진 이실리스는 급하게 마력을 발동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력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고 이실리스도 함께 흘러갔다.
* *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알뤼르의 연락을 받은 베르타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신석에서 외치고 있는 알뤼르의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이실리스가 바다에 빠져서 사라졌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마력을 다루는 그녀가 바다에 빠지다니. 어이없는 소리에 그가 장난치지 말라고 말했으나 알뤼르의 심각한 목소리에 삐딱하게 움직였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 즉시 베루스 공작을 찾았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국부. 폐하께서 사라지셨다니요!”
“나도 지금 들어서 정신이 없으니 소리 지르지 말게.”
이를 악물고 말하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베루스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통신석이 환하게 빛나면서 알뤼르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게. 알뤼르. 이실리스가 왜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해상제국의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 파도가 높아졌고 폐하께서 바다에 빠지셨습니다.”
“마법을 사용했다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이상합니다. 국부. 마력도 일으키지 못하시고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빨려들어 갔다고?”
“말 그대롭니다.”
알뤼르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베르타스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면서 물었다.
“해상제국에서 무슨 일을 벌인 것은 아닌가?”
“그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진심으로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누가.”
“해상제국의 제독이 직접 나왔습니다.”
“직접?”
“그러합니다.”
“일단 기다리게.”
형형한 눈빛을 빛내는 베르타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베루스 공작이 그 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 생각하지 공작?”
“해상제국의 짓은 아닐 겁니다.”
“아니라고?”
“그들이 필요한 것은 폐하의 마력. 그러니 폐하께 위해를 끼칠 일이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라르헨과 주변국의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 베루스 공작이 그렇게 말하니 베르타스도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어가 잘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의 오라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자 베루스 공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국부! 라르헨의 결계가! 결계가!”
“결계가 어찌 되었다는 건가.”
“사라졌습니다!”
알현장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전령이 들어와 알렸다. 마법사들이 들이닥쳤고 그 뒤엔 귀족들이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소란을 모두 목격한 베루스 공작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으나 베르타스는 그를 잡지 않았다. 이실리스가 사라졌으니 어디론가 연락하러 갔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난입한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정신없이 그를 향해 아우성을 치자 그가 오라를 일으켰다. 라르헨에서 단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그의 한계까지 오라를 일으키는 것은. 폭사되는 기운을 목격한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 말해보게. 뭐라고?”
“라르헨의 결계가 사라졌습니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라르헨의 결계는 이실리스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것. 그 결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이실리스의 신변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것과 같았다.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알뤼르의 말을 정녕 믿어야 하는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라르헨 황궁의 알현장 한가운데에 환한 빛이 일었고, 선황과 그녀의 부군인 타르토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선대의 귀환이었다.
“선황폐하!”
그녀의 모습을 목격한 귀족들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르헨의 결계가 없어졌다. 그러니 복구해달라. 악다구니를 쓰는 귀족들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인상을 구겼다.
‘보아라. 이실리스. 저게 너를 따른다는 귀족들의 실체다. 네가 마력이 없으면 너를 버릴 이들이었어.’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실리스가 지금 자리에 없어 이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사라졌던 베루스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연락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베르타스가 그의 품에 숨겨진 통신석에 손을 대었다. 아까부터 울리고 있는 페일러스의 통신석이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었다. 선황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베르타스 라르헨.”
“부르셨습니까. 선황폐하.”
“이실리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지금 파악하고 있습니다. 주위를 물려야겠습니다.”
못마땅한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는 타르토스에게 똑같은 눈빛을 돌려준 베르타스가 선황을 향해 입을 열자 그녀가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물러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할 땐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던 이들이 선황의 말에 움직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무슨 일이지?”
“해상제국이 이토르트 항구에 배를 끌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실리스가 직접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해상제국으로 향하던 중, 그녀가 바다에 빠졌고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말하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이실리스가 사라졌다니. 생사를 알 수 없다니. 제가 말하지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계속해서 몰아닥치는 일로 인해 베르타스는 충격을 수습할 틈도 없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실리스가 직접 간 이유는 무엇이지?”
“해상제국에서 그녀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거로군.”
타르토스가 끼어들었다.
“해상제국의 중추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해.”
“타르토스.”
“어쩌려고. 나는 네가 더는 라르헨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
냉정한 그의 말에 베르타스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선황은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녀가 라르헨의 결계를 유지할 의무는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길 일이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선황이었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 그 순간 알현장 안으로 누군가 뛰어들었다.
“아빠!”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딸인 에리카였다. 그녀를 미처 잡지 못한 메릴이 에리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에리카의 마력이 우선이었다. 마력을 써서 날아오른 에리카가 그의 품 안에 안착했다. 그의 품에 안긴 에리카가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엄마 어디 갔어?”
“곧 돌아온다고 하였다.”
“아니야. 엄마가 사라졌대. 그래서 지금 라르헨의 결계가 사라진 거래. 나보고 그 결계를 세워달라고 했어.”
“누가 감히 너에게 그런 헛소리를 하였느냐.”
에리카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메릴에게 닿았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다.
“죄송합니다. 황태녀께서 방 밖으로 나가셨는데 결계가 사라졌고 당황한 시종과 시녀들이 황태녀님께 읍소하는 바람에…….”
“내가 이런 꼴을 보자고 너를 에리카의 옆에 둔 줄 아나?”
“죄송합니다. 국부. 뭐라 할 말이…….”
그의 손에서 오라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황, 아일라가 에리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
“누구?”
제게 묻는 아이를 향해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란다. 인사해야지.”
“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움직이는 그녀를 향해 아일라가 다시 손을 뻗었다. 마력이 움직이면서 에리카를 들어 올렸고 그녀를 받아 안은 선황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실리스와 닮진 않았구나. 얼굴은.”
“저 녀석을 닮았군.”
타르토스도 거들었다. 한참 동안 에리카의 얼굴을 바라보는 둘에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상, 타르토스와 아일라가 에리카의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전에 아일라가 방문했을 당시, 이실리스는 아일라가 에리카에게 접근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타르토스는 나타나자마자 아일라를 데리고 사라졌으니 에리카를 볼 기회도 없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에리카를 바라보는 둘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얼굴을 구겼다.
‘이실리스에게도 저리 다정하게 대할 것이지.’
아일라가 그녀를 대하는 것을 보았던 베르타스가 속으로 욕했다. 아이를 처음 보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그들을 보면서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들의 아이인 이실리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에리카에게만 신경 쓰다니. 베르타스의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런 사람들 밑에서 이실리스가 자랐다니. 그의 분노가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그 순간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주마.”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말입니까.”
불퉁하게 말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아이에게까지 결계를 유지하라고 나서는 자들이니 더한 짓을 할 수도 있지. 그러니 이실리스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이 아이를 지켜주마.”
“돌아올 때까지?”
“네가 찾아올 것이 아니냐.”
아무렇지 않게 이실리스가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하는 선황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저 말을 듣고 싶었다. 이실리스가 어딘가에 살아 있으니 찾아오라는 저 말을. 누구도 그에게 말하지 않는 저 말을 듣고 싶었다. 그녀의 신하들도 그녀가 아끼는 이들도 누구 하나 그녀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사라졌고 마력 결계가 없어졌으니 어찌해야 하나 어서 해결책을 내어놓으라고 닦달하는 이들만 존재했다. 라르헨에 정이 떨어지려는 찰나 나서준 선황이 고맙고도 또 감사했다. 그가 라르헨을 싫어하지 않게 해 주어서. 그의 딸에게 마력을 쏟아부으라고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적절하게 나서준 선황이 아니었다면 앞뒤 분간 못 하고 오라를 쏘아 보낼 뻔했다.
“나더러 여기서 지내라는 건가?”
타르토스가 말하자 선황이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의 손녀야. 타르토스. 이 아이를 지켜줘야지.”
“나는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무릇 황족이라면…….”
“그 아픔을 내 손녀에게까지 주고 싶지 않아. 이실리스를 시험한 것으로 되었지 않나.”
“아일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타르토스를 향해 아일라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너무 어려. 이실리스도 이 나이엔 보호를 받았어.”
“나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았다니까!”
분노에 차서 외치는 타르토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움직였다. 그들의 품에서 아이를 찾아오려고 접근하는 순간 타르토스의 마력에 의해 저 멀리 밀려났다. 오라를 일으켜 마력을 밀어냈지만 쉽지 않았다.
“타르토스. 난 결정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