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161)

87화.

“결혼 축하해.”

“선물도 보내지 않은 네가?”

“그야 네가 연락도 없었으니 그런 거 아닌가.”

가볍게 말하던 파브리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고 손을 올린 이실리스가 가볍게 배 위에 내려앉았다.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역정에 화를 내면서 무작정 바다로 나온 그가 만났던 아름다운 바다 요정. 아니, 바다의 요정이라고 하기엔 강인한 그녀에게 바다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파브리스였다. 어릴 적 만났던 인연은 커서도 계속되어 통신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이번 사건이 일어나고 그 통신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이실리스를 불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접 바다에 나왔다.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내리는 파브리스를 바라본 이실리스가 입술을 열어 나지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큰일이야 이실리스.”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해상 동력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뭐?”

바다 위의 제국인 해상제국 이파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그 거대한 배가 떠다니게 해 줄 동력이었다. 그 동력은 라르헨에서 제공하는 마력석으로 충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마력석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 중, 이실리스가 보내는 그녀의 마력이 가득 담긴 마력석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마력석이 힘을 잃었으니 주변부터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것, 이미 배의 1/3가량이 가라앉았다. 그의 설명을 들은 이실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본디 배라는 것은 바다 위에 저절로 떠 있는 것이지만 그 배 위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집과 건물들. 육지로 나가지 않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이파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라르헨의 마력석. 그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마력석은 라르헨의 황제만이 다룰 수 있는 것이었다. 라르헨의 핏줄이 아닌 자는 건드릴 수 없는 것. 그것이 이파프 제국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자, 이파프 제국이 아무리 대단해도 라르헨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게 대체…….”

“그래서 네가 직접 오기를 바랐다. 네 마력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너만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통신석도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인가?”

“네가 준 것만.”

이상했다. 그녀의 마력은 라르헨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그 마력을 사용한 마력석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장담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이었다.

“정말 가서 봐야겠군.”

이실리스의 말에 파브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시위하듯 포를 들이민 것은 안 돼. 다음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보내 요청하도록.”

“나도 알고 있어. 워낙 긴급 사안이고 기밀이다 보니, 사람을 보낼 수 없었지. 너도 알지 않나. 이 일이 누설된다면 이파프 제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통신석도 작동하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 네가 알아듣고 바로 올 거라 생각했지. 그래도 틀린 방법이긴 했으니 미안하군.”

“말로만?”

장난기 어린 이실리스의 말에 파브리스가 눈을 움찔하면서 물었다.

“뭘 원하나.”

“저 너머의 세계.”

“이실리스. 알지 않는 것이 좋아.”

그녀를 만류하는 파브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왜지?”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네가 모든 것을 다 보듬고 감쌀 수는 없지 않나.”

“…….”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라르헨이면 족하다고 신하들이 늘 말하지 않았었나. 신경 쓰고자 하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그가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그녀가 신경 쓸 무언가가 저 바다 너머에 존재한다는 이야기겠지.

“그럼 이틀 후? 내일은 안 되는 건가?”

“그래, 안 돼. 이틀 후에. 보도록 하지.”

파브리스의 말에 답한 이실리스가 그대로 몸을 띄웠다. 처음 왔을 때와 같이 바다를 건너 돌아가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파브리스가 속삭였다.

“여전하군.”

여전히 아름답고 탐나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라르헨의 황제만 아니었다면 날개를 꺾어 옆에 두었을 것을. 해상제국의 제독인 그로서는 라르헨과 척을 지면 안 될 일이었다. 이실리스의 마력과 라르헨 제국의 황제라는 그녀의 직위는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마력석만 아니었어도.”

그런 반쪽짜리 황족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판단은 찰나였지만 후회는 길었다.

* * *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부재를 눈치챈 알뤼르가 그녀를 찾아다녔다. 배 위를 돌아다녀 봤지만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알뤼르는 비행 마법을 사용해 배의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의 황제는 저 멀리 항구에서 물을 휘감고 있었다. 모처럼의 외출은 그녀를 즐겁게 하는 것 같았다. 알뤼르가 그대로 날아가서 이실리스의 앞에 부복했다. 항구에 발을 올리기가 어려웠던 그가 바다 위에 떠서 부복하는 모습은 마치 경애하는 여신에게 읍소하는 신도의 모습이기에 지켜보던 제국민들 모두 숨을 죽였다.

“폐하.”

“아, 왔는가.”

손으로 드래곤을 만들었던 이실리스가 마력을 흩어내자 그대로 물방울로 사라졌다.

“위험하십니다.”

“이 라르헨 안에서 나를 위협할 것은 없네.”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

주변을 둘러보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의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제국민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든 그녀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다에서 일어나니 한결 몸이 편안했다. 항구에 걸터앉아 마력이 짓눌리던 것과는 다르게. 

그녀가 항구 방향으로 물보라를 일으키자 무지개가 만들어졌다. 그 무지개를 보면서 환호성을 외치는 제국민들을 향해 웃은 이실리스가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서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뒤를 알뤼르가 따르고 있었다.

“혼자 다니지 마십시오. 폐하.”

“아,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말일세.”

“요 근래 잘 주무시지 못한다는 소리를 국부께 들었습니다.”

“베르타스가 별소리를 다했군.”

싫지 않은 내색의 이실리스를 보면서 알뤼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황제는 너무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경각심이 없었다. 물론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알뤼르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불러올 돌이킬 수 없는 결과.

“폐하. 제발…….”

“알겠네.”

그의 걱정을 가볍게 넘기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알뤼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베르타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베르타스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는 국부였으니 더 절절하게 느꼈겠지. 그제야 그의 걱정이 와닿았다. 그의 황제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늘도 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여유로운 날이었다. 그녀의 마법사들도 그녀만큼이나 쉴 수 없었다. 라르헨은 기사들보다 마법사들이 하는 일이 굉장히 많은 제국이었다. 그들에게 휴식을 주려고 일부러 이곳까지 끌고 온 것도 있었다. 출정을 하였지만, 그들이 직접 전쟁터에 나설 일이 없을 테니. 

하루가 지나가고 또 이틀이 지나갔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해상제국에서 찾아왔다.

제독이 직접 배를 끌고 나온 해상제국은 포를 들이밀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정중한 모습으로 라르헨의 마법사들을 맞이했다. 선두에 서 있던 파브리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라르헨 제국의 황제. 이실리스 라르헨. 나는 해상제국의 파브리스 이파프라고 합니다.”

“라르헨의 황제 이실리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군요.”

“나도 그렇습니다.”

그녀가 파브리스의 손 위에 손을 올리고 그의 배로 건너가자 그녀의 마법사들도 바다 위를 날아 해상제국의 배에 올랐다.

“자 그럼 협상테이블에 앉아볼까요?”

파브리스의 말에 이실리스도 자리에 앉았다. 이실리스가 손짓하자 알뤼르가 서류를 들고 나왔다.

“이게 뭡니까?”

“그대들이 우리 쪽 바다를 장악하여 라르헨에서 입은 피해액.”

“뭐?”

“그 피해액을 내놓을 때까지 우리는 움직이지 않을 걸세.”

빙긋 웃는 이실리스의 모습에 파브리스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냐는 그의 표정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렇다면 라르헨에서는 우리에게 지급한 잘못된 마력석을 고쳐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피해를 준 것이니 해결해 주겠네.”

“좋습니다.”

얼굴을 굳힌 채 표정을 풀지 않는 파브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만족할만한 성과에 알뤼르도 웃었다. 전쟁 없이 모든 것을 거머쥐는 이실리스였다. 

이미 파브리스와 이야기가 끝난 것이었지만 거친 해상제국민인 만큼, 저들이 다르게 나올 수도 있었기에 이실리스도 긴장하고 있던 상태였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협상에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어쩌겠나. 처음부터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이파프제국에서 원하는 것은 이실리스가 그들의 마력 장치를 봐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고 있는 중추 동력장치. 해상제국의 배는 그대로 이파프 제국으로 향해 나아갔다. 항해는 순조로웠고 날씨도 좋았다. 기분이 좋은 듯 환히 웃는 이실리스의 옆으로 파브리스가 다가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전쟁을 마무리했으니.”

“하긴. 엄청난 액수를 적어서 냈더군.”

“아, 그 정도야 뭐.”

충분한 능력이 되지 않느냐는 그녀의 말에 파브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냥 내야 하는 돈에 속이 쓰리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걸고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기색을 의아하게 여긴 파브리스가 의문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 예전에 라르헨에 온 적이 있나?”

“라르헨?”

“라르헨에.”

“있지.”

“그럼 그때 어느 여인을 품은 적이 있나?”

“그것을 왜 묻지.”

파브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의 얼굴을 본 이실리스는 확신했다. 메릴이 키우고 있는 아이가 그의 아이라는 것을.

“라르헨에 한 번 들려야겠군, 그대.”

“뭐?”

“그대의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있지.”

“뭐라 하였나.”

표정이 굳어진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다음에 오게.”

“이실리스 라르헨.”

입술을 악다물고 말하는 파브리스의 표정에 이실리스가 그를 놀리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다 왔습니다!”

멀리 해상제국인 이파프가 보였다. 말 그대로 바다 위에 떠있는 엄청난 제국에 라르헨의 마법사들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파프 제국에 다녀온 적이 있던 마법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바다가 출렁였다. 선상 위에 서 있던 이실리스가 바다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다로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파브리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멀리서 지켜보던 알뤼르도 곧바로 이실리스에게로 몸을 날렸다.

[도와다오.]

또 그 목소리였다. 

이실리스는 계속해서 커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바다로 빠질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서 마력을 일으켰지만 그게 문제였다. 이실리스의 마력을 감지한 무언가가 그녀를 바닷속으로 끌어당겼다. 

놀란 파브리스가 손에 힘을 쥐고 그녀를 잡았고, 알뤼르도 달려와서 반대쪽을 잡았다. 그러나 이실리스를 끌어당긴 힘이 파브리스와 알뤼르도 함께 바다로 끌어당겼고 결국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물 위로 솟아오른 파브리스와 알뤼르와는 다르게 이실리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폐하!”

“이실리스!”

파브리스와 알뤼르의 외침만이 공허하게 바다 위를 흐를 뿐이었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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