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161)

86화.

이실리스가 마법진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그녀의 가까이에 다가갔다. 마력이 발동하는 것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번쩍하는 마력의 흐름과 함께 이실리스와 마법사들이 사라졌다. 그를 향해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이실리스.”

그녀의 이름이 아스라이 바람에 흩어졌다.

* * *

이토르트 항구. 그녀가 사랑하는 라르헨의 항구도시. 베르타스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한 장소였다. 그랬기에 더욱 애틋했다. 아름다운 항구도시에 감도는 전운에 이실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상황은 어떠한가.”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브디에 백작이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포문만 열었을 뿐,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포문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대포만 겨누고 있을 뿐 다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같은 소리라니.”

“폐하를 뵙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수도에 전령이 전해온 말과 똑같았다. 이실리스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

[아이야……]

[아이야. 도와다오.]

그런데, 그때 이실리스에게 또 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니, 이 소리가 어찌 여기서……’

꿈속에서만 들리던 그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그녀가 머리를 짚으며 휘청하자 알뤼르가 서둘러서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이토르트 항구에 있는 건국 황제의 결계가 그녀에게 주는 영향은 미비했다. 오히려 알뤼르의 안색이 좋지 않아 그를 걱정해야 할 때였다.

“자네는 괜찮은가?”

“전 괜찮습니다. 폐하.”

이를 악물고 말하는 알뤼르의 표정이 좋지 않아 서둘러 바다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법사들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서 움직이는 것이 장관이었다. 까만 로브를 두른 무리가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쪽입니다.”

브디에 백작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자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었다. 간단한 마법으로 그 배 위에 착지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들 감탄했다. 마법사들이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토르트 항구에서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황제라니. 배에서 준비하고 있던 제국민들이 그녀를 보더니 배 위에 납작 엎드렸다.

“일어나서 하던 일을 마저 하게.”

로브를 벗으면서 얼굴을 드러낸 이실리스가 그들을 향해 말하자 주춤하던 그들이 이내 몸을 돌려 움직였다. 배에서 다리가 내려지고 마법사들도 하나둘씩 배 위로 올라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한숨을 내쉬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토르트 항구가 운신하기 힘든 지역이긴 하지.”

“폐하께서 대단하신 겁니다.”

건국황제의 마력과 충돌하지 않고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몇이나 될까. 이렇게 축축 늘어지는 몸이 배에 오르자마자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알뤼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출항하시겠습니까?”

“일단 준비를 해야 할 터이니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지.”

“배…… 위에서요?”

“당연한 것 아닌가. 웬만한 것은 다 마법으로 해결하라고 하고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한다.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편한 곳을 왜 벗어나냐고 말하는 알뤼르의 말에 웃었다. 바다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웠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 위에 굴러가는 금빛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부유 마법을 시전했다.

바다 위에 가볍게 내려앉은 그녀가 발로 물을 ‘톡’ 건드렸다. 그녀가 내려앉은 곳에 동그랗게 이는 파문에 아름다운 금빛이 동그랗게 퍼져나갔다. 흐뭇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참 아름다웠다.

‘다음에 에리카와 함께 와야겠군.’

몇 번 ‘톡톡’ 움직이던 그녀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얼굴을 들었다. 마법사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그녀를 향해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해상제국의 배였다.

“흠. 몸이 달았군.”

해상제국에 일이 생겨도 큰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이실리스가 가만히 그곳에 서 있자 알뤼르도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폐하.”

“괜찮으니 가만히.”

가까이 다가온 배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라르헨의 황제십니까?”

“이 라르헨을 다스리는 자가 내가 맞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지.”

“해상제국의 제독인 파브리스 이파프입니다. 라르헨의 황제를 뵙게 돼서 영광이로군요.”

뱃머리에 서서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사내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어서 나타나라고 시위하던 자들 치곤 예의 바르군.”

“이쪽의 사정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굉장히 급해 보이기는 했다. 이실리스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참지 못하고 배를 이끌고 나타난 그들. 그것도 해상제국의 제독이 직접 나타난 것을 보니 해상제국에 생긴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삼일 후에 다시 오면 되겠군.”

“네?”

“우리는 아직 출정식을 하지 않았으니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고개를 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엔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안 됩니다. 이쪽이…….”

“부탁할 것이 있다면 시위하듯 군대를 끌고 올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사람을 보내 요청하는 것이 맞다. 그랬는데 감히 라르헨의 국경에 와서 분위기를 조성하다니. 이래도 내가 그대들에게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가?”

그녀의 단호한 말에 해상제국의 사람들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불만을 표하듯 수군거리는 그들을 말린 것은 파브리스였다. 그의 가벼운 손동작에 배 위에 있는 이파프 제국민들이 입을 다무는 것을 본 이실리스가 내심 감탄했다.

‘저 정도 통솔력을 가진 자라니.’

하긴, 바다 위를 누비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내리누르면서 파브리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손에 휘감기는 바닷바람이 기분 좋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항구도시인 이토르트다웠다.

“삼일 후라고 했습니까?”

“삼일 후.”

“삼일은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이틀 뒤는 어떻습니까.”

“흠…….”

고민하는 듯 생각에 잠기긴 했지만 이실리스는 이미 그들의 말을 들어줄 요량으로 이곳에 왔다. 서로 얼굴을 붉히고 만나기보다 아무 잡음 없이 만나는 것이 나을 듯하여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황제의 관용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시 허리를 숙이는 파브리스에게 이실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저렇게 저 자세로 나오니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배를 들이밀어 시위를 했을 뿐, 공격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괜히 무례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실리스도, 파브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틀 후.”

“이틀 후에 보지.”

그대로 배를 몰고 사라지는 파브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직감했다. 저 남자는 오늘 밤에 다시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의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잠이 오지 않은 늦은 밤이었다. 매일 베르타스의 온기를 느끼며 잠들었는데 아무도 없는 혼자의 밤은 꽤 오랜만이었다. 잠이 쉬이 오지 않아 그녀는 선실을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보초를 서던 알뤼르가 그녀의 기척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곤해 보이는 그 모습에 이실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 경계는 내가 설 테니, 들어가서 쉬게.”

“폐하.”

“아까 항구도시에서의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것을 아네.”

“그것은 폐하도…….”

“나를 자네와 같은 마법사로 평가하다니. 그것참 자존심 상하는 일이로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여는 이실리스의 말에 알뤼르가 허리를 숙였다. 마법진을 따라 항구도시에 왔고, 항구도시에서 마력의 짓눌림을 받은 다른 마법사들은 벌써부터 지쳐 나가떨어졌다. 대체로 체력이 좋지 않은 그들이기에 다들 잠이 들었는데 알뤼르만이 그녀의 숙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충성심을 치하한 이실리스가 다시 명령했다.

“들어가서 쉬게. 알뤼르. 이것은 나의 명이니.”

“…… 알겠습니다.”

알뤼르가 제 숙소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이실리스가 갑판으로 나섰다. 환하게 빛나는 달빛에 반사된 수면이 아름다웠다. 낮에 한번 보았던 바다였지만 낮의 바다와 밤의 바다는 다른 느낌이었다.

[도와다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찾는 어떤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다시 먼 바다를 내다 보았다. 반짝이는 검은 바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바다의 위로 몸을 내렸다. 갑판에서 보초를 서던 경비병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까만 바다 위를 걸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있기에 해상제국에서 나를 찾는 것이며, 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이는 누구일까. 누구기에 나를 아이라고 부르는가. 도대체 도움을 요청하는 이는 누구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라르헨의 황제께선 경각심이 없으시군.”

“바다 위라고 하나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것은 해상제국의 제독이어도 마찬가지. 이곳에서 나와 싸우려는 건가?”

그녀의 경고 어린 말에 입을 다무는 파브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여긴 웬일인가. 아직 약속한 이틀이 되지 않았는데?”

“급한 일입니다. 정말.”

인상을 찌푸리는 파브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헛웃음을 쳤다.

“급한 일인 것을 나도 알기에 여기 왔지. 그랬는데 부탁하는 입장에서 너무 강압적인 것이 아닌가?”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빌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빌어서라도 나라의 안녕을 요한다면 그리 해야지.”

이실리스의 말에 파브리스가 눈을 찌푸렸다. 저를 탐색하듯 주시하는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면서 이실리스가 요요히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바라본 파브리스가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 배를 타고 나온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파브리스의 의도에 따라 이 바다에 나온 것이었다.

“어릴 적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무슨 헛소리인가. 자네도 마찬가지면서.”

다시 만난 오랜 친우를 향해 이실리스가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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