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마법사 대대가 준비되었습니다. 출정 일은 언제로 잡으려고 하십니까.”
“일주일 후가 좋겠군.”
“일주일 후요?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해상제국에서 저렇게 시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국민들이 불안해하지 않겠나. 어서 해결해 줘야지.”
“폐하. 독대를 청하옵나이다.”
옆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베루스 공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짓으로 주위를 물린 그녀가 베루스 공작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폐하. 꼭 가셔야 합니까.”
“가지 않으면?”
“해상제국의 일은 그들이 해결하도록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폐하는 라르헨의 귀한 분이십니다.”
이실리스가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것을 본 베루스 공작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선황께서도 그곳에 다녀오시면 늘 아프셨나이다.”
“늘 아팠다?”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하신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폐하, 저는 라르헨의 황제께서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싫습니다.”
“…….”
오랜 약속으로 유지된 사이였다. 라르헨과 해상제국은. 그들이 바다를 점령하여 바다 건너 존재하고 있는 대륙에서 사람들이 넘어오는 것을 막는 대신 라르헨은 그들을 돕는다. 그것이 약속이었다.
바다 너머의 세계는 미지의 세계였다.
라르헨의 사람들은 바다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이실리스도 마찬가지. 가끔 궁금하였으나 어차피 접점이 없는 곳이기에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그녀의 아버지인 타르토스가 그곳에서 몸을 숨겼다는 소식을 알게 된 순간, 이실리스는 그곳이 궁금해졌다.
‘이런 사실까지 베루스에게 알릴 필요는 없겠지.’
그랬다. 나라의 기밀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도 대대로 황제에게만 전해오는 사실을 신하인 그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베르타스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말할 리가.
“폐하.”
“내 알아서 하겠네.”
“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알아서 하겠다고 하였네.”
확고한 의지를 담은 그녀의 말에 베루스 공작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이실리스였다.
“공작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해상제국은 라르헨의 중요한 우방이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하네.”
“그러나 폐하…….”
“나중에 다녀와서 정확한 이야기를 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이번 일을 마치고 해상제국과 라르헨과의 사이를 확실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까지 해상제국에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받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한숨을 내쉰 이실리스가 에리카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그녀의 앞에 에리카의 유모인 메릴이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청이 있나이다. 폐하.”
“청?”
“이번 출정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네가?”
“그렇습니다.”
메릴의 말에 이실리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함부로 나서는 법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랬는데 그녀에게 이렇게 개인적으로 와서 말할 정도라면 메릴에게 중요한 일인 듯했다.
“연유가 무엇인가.”
“제 조카와 관련된 일입니다.”
“조카?”
“그렇습니다.”
메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사실은 이실리스를 기함하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너는 에리카의 유모이니.”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전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걸?”
“네.”
메릴이 내민 것은 반지였다. 인장과 비슷하게 생긴 그것에 이실리스가 물었다.
“이것을 누구에게 전해달라는 것인가.”
“해상제국에 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폐하.”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아, 그렇군.”
천천히 반지를 살피던 그녀는 미미한 마력의 흐름을 눈치챘다. 이게 누구의 것이든 이것과 비슷한 것을 가진 자가 있을 것이었다.
“한 나라의 황제를 이렇게 부려먹다니.”
“폐하,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이의 정체는 아는 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
“감읍, 또 감읍하나이다. 폐하.”
복도에 엎드려서 감사를 표하는 메릴에게 가볍게 손을 휘저은 이실리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의 의무는 단 하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에리카를 지키는 것이다.”
“저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겠나이다.”
“그렇다면 좋다. 내가 너의 청을 들어주겠다.”
“폐하.”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는 메릴을 지나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실리스는 걸었다. 그녀가 알게 된 진실이 다시금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가 이내 가벼워졌다. 이것이 라르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 *
베르타스는 출정하는 날짜가 가까워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 자신의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이라도 할 텐데 저의 문제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생긴 감정의 동요에 마음이 심란했다.
“하아.”
요 며칠 계속 한숨이었다. 어수선한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이실리스가 다독였지만, 그걸로 해결되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녀를 품어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에 베르타스는 기어이 딸에게로 가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에리카.”
잠든 아이는 대답이 없었지만 작은 손을 붙잡으니 불안으로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 어린 딸에게 의지하다니.’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깊게 잠들어있는 아이의 보드라운 뺨에 손을 내리면서 그가 속삭였다.
“어쩌면 좋으냐.”
“어쩌긴.”
이실리스가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들어오는지도 몰랐는데 그의 뒤에 있는 것을 보니 마법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이실리스.”
허리를 끌어안는 이실리스의 팔을 느끼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속삭였다.
“함께 가고 싶어.”
“베르타스.”
“너와 함께 가고 싶다.”
“에리카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 황성도 마찬가지야.”
등 뒤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함께하고 싶었다. 라르헨의 국부이기에 황성을 지켜달라는 말 말고, 다른 말을 듣고 싶었다.
“나는 에리카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네가 더 소중해. 이번에 널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실리스. 그러니…….”
“베르타스 나는 황제야.”
“…….”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말할 수 없었다. 저렇게 말하는 그녀가 싫었지만 저런 말을 할 때면 양보할 수밖에 없는 저는 더 싫었다.
“라르헨을 없앨 것을.”
“베르타스.”
“그랬으면 너는 내 곁에 있어 줬을까?”
등에 얼굴을 기댄 이실리스가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네 곁에 없겠지. 라르헨과 함께 명을 달리했을 테니.”
“이실리스.”
“너무 걱정 말아.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내일이 출정이야.”
“마법진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금방 다녀올 거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긴장으로 인해 차가워진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그녀의 손을 저의 차디찬 손으로 덮는 것은 미안했으나 베르타스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를 한 것도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곁에서.
“국부가 된 자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안 되겠군.”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베르타스.”
“안 돼.”
몸을 돌려 저의 얼굴을 보려는 이실리스가 느껴졌지만 베르타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력감으로 점철된 저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전쟁터에 나간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다시 속으로 삼키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온전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약속하지.”
“돌아오면 두 번 다시 전쟁 따위는 나가지 않겠다고도 약속해.”
“베르타스 그것은…….”
“거짓이라도 좋으니 약속해.”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젓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정말이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약속할게.”
“사랑해.”
“나도 그러해.”
“이실리스.”
“베르타스. 에리카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어.”
“그러라지. 나는 너의 것이니.”
그의 말에 희미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이 등 뒤로 느껴졌다. 저를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면서 베르타스는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 * *
출정 당일. 이실리스와 마법사 대대가 마법진 앞에 섰다. 가벼운 로브만을 걸친 이실리스의 복장에 베르타스가 뭐라 말하려다 알뤼르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저 로브에 걸린 보호 마법만 수십 개입니다. 국부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
“저도 가지 않습니까.”
“…… 이실리스를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알뤼르의 표정에도 베르타스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그의 얼굴에 알뤼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귀족들과 이야기를 마친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걸어왔다.
“표정이 안 좋군.”
“사랑하는 여인이 전쟁터로 나가는데 표정이 좋을 리가.”
“무운을 빌어줘야지.”
“이실리스.”
저의 이름을 부르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지은 그녀가 그의 뺨에 다정하게 손을 내렸다. 그 손에서 넘어오는 온기가 너무나도 안온하여 그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 목걸이도 있고, 이 로브도 있잖나. 거기다 그대의 존재 맹세도 있으니 모든 것이 나를 지켜줄 걸세.”
“돌아오면 아무 데도 못 갑니다. 폐하.”
짓씹듯 나온 베르타스의 말엔 뼈가 있었다. 차마 그 말에 답할 수는 없다는 듯 눈을 피하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제국의 황제이자 제국을 수호하는 자였다. 그런 사람을 제 곁에만 둔다는 저의 욕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겠지.
멀리서 그의 딸이 그녀와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에리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출정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에리카에게 살짝 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그대로 돌아섰다. 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