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표정이 좋지 않은 알뤼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실리스는 모르는 척 손짓했다. 제 손짓에 물러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다들 말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해상제국에서 이실리스를 찾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라에 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 위에 떠 있다는 해상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라르헨에서 제공한 마도구. 그 마도구에 문제가 생겼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저렇게 나오는 것이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그녀의 군신들은 해상제국의 사람들이 괘씸하다 어쩐다 말하고 있지만 이실리스는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라르헨의 마력과 마도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들의 사람들이 저렇게 이토르트 항구에 와서 시위하듯 대포를 들이민 것은 확실했다.
“무슨 일이 생겼군.”
해상 제국을 유지하는 중요한 동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를 찾는다…… 라.”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제국의 기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딸이 이 자리를 이어받게 되면 이실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해상제국으로 가게 될 예정이었다. 어릴 적 보았던 그것에 마력을 주입해 주기 위해서.
“헌데 이상하군. 몇백 년 동안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묘한 느낌이 이실리스를 사로잡았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해상제국으로 꼭 가야 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 때문에 그녀가 움직이겠다 고집부린 것이었다. 가서 해상제국의 제독을 만나보면 분명 무슨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깊이 고민하던 그녀가 생각에서 벗어났을 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석양이 드리우고 있었다. 알현장 한켠에 드리워진 붉은 빛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본 시종장이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국부께서 알현장 밖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 말에 찡그려지는 인상을 숨길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눈치챈 시종장이 바로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아까부터 고하겠다 여쭈었으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알았네.”
알현장 밖으로 나가니 생각에 잠긴 베르타스를 볼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베르타스의 옆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뭐라 말을 하려는 시종장에게 손짓하고 그에게 다가섰다.
“이실리스.”
사람들을 물린 것을 눈치챈 그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불렀다. 고집스럽게 제 얼굴을 보지 않는 베르타스에게 그녀가 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나도 함께 가겠다.”
“그대마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우리 딸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뱃멀미에 고생할 것도 뻔하고…….”
타이르듯 나오는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미간을 구겼다.
“뱃멀미라니.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대. 그런 것은 오라를 두르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너도 알잖나.”
“그렇게 하면 그대가 너무 힘들어져.”
“그것을 감수하더라도 너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을 왜 모르지?”
“베르타스.”
이실리스가 주먹을 꽉 쥔 그의 손을 잡았다. 분노를 참는 듯 힘이 들어간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와닿아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실리스.”
저를 부르는 베르타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입술을 꾹 다문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뭐가 그리 우습지?”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그대가 나를 생각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실리스.”
한숨을 내쉰 베르타스가 뭐라 말하려는 것이 보였으나 그녀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대가 걱정하는 것을 왜 모르겠나. 그러나 이번엔 내가 가봐야 하네.”
“대체 왜.”
“해상제국은 라르헨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곳, 그곳에서 저리 시위하듯 군대를 내세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일 걸세.”
“그렇다면 더더욱 저리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저들이 저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그것은 나를 부르기 위함이지 라르헨과 문제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야. 해상제국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고 그것은 내가 가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걸세. 이 제국에서 마력이 가장 강한 자는 나이니까.”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이실리스의 마력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싫었다. 모두가 그녀의 마력에 기대는 이런 상황이. 라르헨만 신경 쓰면 될 것을 왜 이웃의 제국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인가. 그녀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많았다.
“조금의 마력으로 도움을 주고 라르헨이 얻는 것이 많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언제까지 네가 희생을 해야 하지? 나는…….”
“라르헨의 황족으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 그대도 황족으로 태어났으니 그 의무를 알지 않나.”
아니, 모른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여태까지 그가 본 황족 중에서 이실리스만큼 ‘황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개인의 모든 것을 미뤄두고 라르헨을 위해 희생하는 황족. 그 누가 알까. 이 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고된 길을 걷는다는 것을. 베르타스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옆에 서고 나서야 알게 된 이 모든 것을 아직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실리스, 나는……, 나는…….”
“말하지 말게.”
베르타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부르자 이실리스가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가렸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입술에 닿자 베르타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깊게 입술을 내렸다.
“사랑하고 있어.”
“나도 그러한데 그대도 그런가 보군.”
“그러니 아무 일 없이 돌아와야 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이실리스의 말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베르타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순순히 끌려오는 그녀의 움직임에 정원으로 나간 둘이었다. 정원에는 어둠이 내려있었고,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이곳을 기억하십니까, 폐하.”
“기억하지. 그대가 나에게 소리 지른 곳이 아닌가.”
예전 신년제의 일을 끄집어내는 베르타스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가 그에게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이실리스의 앞에 무릎 꿇었다.
“또 왜.”
웃으면서 내려다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베르타스의 몸에서 넘실대는 오라가 이실리스를 감싸자 그녀가 놀라 입술을 열려 하던 그때였다.
“너를 위한 검이 되겠다. 이실리스.”
“베르타스 이것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를 보내지 않겠어.”
입매를 굳힌 그의 얼굴에서는 그녀가 이길 수 없는 의지가 보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는 남자의 굳은 의지. 베르타스의 결연함을 엿본 이실리스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를 하려고 하는 순간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으나, 그의 손에 붙들려 빼내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순순히 그에게 손을 내맡긴 이실리스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본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 베르타스 라르헨은 이실리스 라르헨에게 존재 맹세를 하려고 하오. 받아들여 주겠나?”
“…… 그리하겠네.”
“이 맹세로 엮이게 되면 나는 그대와 삶과 죽음을 함께하게 된다. 그래도 괜찮은가?”
“삶과 죽음은……. 베르타스, 그것은 신만이 정하는…….”
“대답.”
답을 강요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타스가 오라를 발동하는 그 순간부터 라르헨의 마력 결계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시간이 더이상 지체되면 위험했다.
“그대, 어서…….”
“대답.”
“그리할 테니 어서!”
짓눌리는 마력이 아프지도 않은지 이실리스를 향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바라보면서 말하는 그였다. 베르타스를 보면서 오히려 마음이 초조해진 이실리스가 서둘러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의 오라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 몽환적인 푸른빛에서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물었다.
“이제 끝난 것인가?”
“하나가 남았지.”
“하나?”
벌떡 일어나서 이실리스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이실리스가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입안으로 뜨거운 것이 넘어왔다. 무언가 따뜻하면서도 묘하게 그녀의 몸 안을 훑고 지나가는 것에 이실리스가 숨을 헐떡이자 베르타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원래…… 이리하는 것인가?”
“주종관계에 이렇게 할 리가. 단지 손에서 손으로 전하는 것인데 난 이게 마음에 들더군.”
그들의 입맞춤에 시종과 시녀들이 뒤돌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원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는 시종들에게도 그리고 시녀들에게도 아주 귀한 광경이었다.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목격한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행여 이곳에서 말이 새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베르타스가 황궁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정보를 틀어쥐는 것이었다. 이실리스의 묵인하에 그는 황궁의 눈과 귀가 되는 시종과 시녀들을 장악했다.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들은 황성 밖으로 출궁 되거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이실리스의 정보를 다른 귀족들에게 전하는 자들은 그의 손에 스러졌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은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허리를 안으면서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오늘 어디로 가서 주무십니까?”
“그 소리 좀 그만하래도.”
“싫습니다만.”
장난기 어린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마주한 그가 이실리스의 입가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그러니 오늘은 제게 오시겠습니까, 폐하?”
다른 선택지는 주지 않으면서 묻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였다.
“그렇게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