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161)

83화.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던 베르타스가 고개를 돌렸다. 심기가 상한듯한 그 얼굴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불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부르나.”

“금방 돌아올 거야.”

“네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봐라. 에리카. 거짓은 약속하는 것이 아니란다.”

“아니래도.”

딸아이에게 속삭이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다급하게 반박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마주한 이실리스가 당황했다.

“어디 가?”

“다녀올 곳이 있단다.”

에리카를 안은 이실리스가 다정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에리카도 웃었다.

“금방 와야 해!”

“그럼, 황제가 자리를 비워서야 쓰겠느냐.”

환히 웃는 아이의 뺨에 얼굴을 비비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와 에리카를 보면서 베르타스도 이내 가까이 다가와 그들을 끌어안았다. 아이와 이실리스를 한꺼번에 끌어안은 그가 이실리스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내렸다.

“불안해.”

“뭐가 말인가.”

“너무 불안하다고 이실리스.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의 말에 그녀가 베르타스의 손을 잡았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듯 꽉 붙잡은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를 느끼면서 베르타스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왜 이다지도 불안한 것인가.’

최근에 잠을 잘 못 자기는 했지만 이실리스를 어찌할 사람이 없다는 것 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철혈의 여제, 대단한 마력을 지닌 제국의 패자. 해상제국에서 라르헨을 도발한 이유도 그들의 말을 들어달라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라르헨을 어찌해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해상제국의 사람들은 라르헨의 제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항구에 와서 시위하듯 포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그것마저 불쾌하다고 느낀 이토르트 항구의 관리자가 황성에 전령을 보낸 것일 뿐,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실리스도, 베르타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리 불안할까. 계속해서 드는 불안을 떨쳐내고자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언제 출발할 거지?”

“마법사들이 준비되면 바로.”

“금방 돌아올 건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요동치는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면서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웃었다. 그 미소에 얼핏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실리스는 재잘거리는 에리카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참 동안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통신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복도로 나간 그가 마법 통신구를 켜자 페일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실리스가 여기 온다며?

그랬다. 이토르트 항구는 페일러스가 있는 곳이었다. 기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베르타스는 심술이 돋았다.

“말을 바로 하게. 그녀는 이 나라의 황제일세.”

-너도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서 뭐. 무슨 일로 나의 친우께서 심기가 상하셨을까? 이실리스가 참전하는 일 때문에 그러나?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마법사들의 연락망이 어느 정도인지 자네는 모르는 것 같군.

아무리 그래도 방금 결정 난 사항이었다. 그랬는데 어느새 페일러스에게까지 소식이 닿다니.

-오랜만의 친정이 아닌가. 그러니 다들 흥분한 거지.

“전쟁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야.”

-알고 있네만 이실리스는 다르지 않나.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입을 다물었다. 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그녀가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에. 라르헨은 이상한 국가였다. 이실리스의 마력에 기대어 사는 이상한 국가. 이 라르헨에 이실리스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든 생각에 베르타스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다.

‘이실리스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도 늘 조심해야 하지.”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이실리스가 오면 오랜만에 얼굴을 보겠군.

“잘 부탁해.”

-자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하지. 내 사촌이 아닌가.

페일러스가 뭐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베르타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실리스의 기척이 뒤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둘러서 통신석을 정리한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페일러스?”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그도 있지 않나.”

베르타스는 제 앞에서 웃는 이실리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다들 보지 않나.”

“언제는 황제는 무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귀족들이 지나다니는 황궁 복도였기에 이실리스에게 말을 높였다. 그의 기색을 눈치챈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마주친 베르타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이실리스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인 베르타스의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황제인 것은 아무렇지 않아, 이실리스. 너는 내게 여자니까.”

“베르타스.”

“그러니 오늘 밤도 나를 찾아올 텐가?”

“한 침실을 쓰면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미소지었다. 이렇게 주변의 눈을 피해 속삭이는 밀어도 제게만 보여주는 그녀의 약한 모습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이런 사람을, 이렇게 가녀린 사람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한다니. 

여전히 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에리카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그가 빌려왔다. 내어주지 않으려는 딸에게 몰래 사탕을 주겠다 약속하면서 빌려온 것이었다.

“이건 에리카의 것이 아닌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걸고 있기를 바랍니다. 폐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거절하지 못하고 목걸이를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면서 그가 환하게 웃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걸고 있으면…….’

뒷말을 속으로 삼킨 베르타스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 아름다웠다.

‘입술을 삼키고 싶은데 안 되겠지.’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황제가 직접 전쟁터에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너도나도 황궁으로 찾아들어 복도엔 귀족들로 북적였다. 지금도 보라. 베르타스와 함께 있는 이실리스에게 말이라도 한마디 붙여보려고 멀리서 기회를 보고 있는 귀족들이 넘쳐났다. 허나, 이실리스의 눈동자는 베르타스를 향해 있었다. 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폐하?”

“물론.”

그의 손 위에 가볍게 올라온 그녀의 가는 손가락을 꽉 쥔 그가 그녀와 함께 걸었다. 그들의 가는 걸음걸음마다 귀족들이 허리를 숙였다. 

* * *

“해상제국에서 왜 이쪽으로 왔지?”

이실리스는 알현실에서 다 묻지 못한 말을 알뤼르에게 물었다.

“이토르트 항구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그렇습니다. 폐하. 라르헨으로부터 수입한 마도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표하며 시위 중이라고 합니다.”

“시위?”

“그렇습니다.”

라르헨에서 수출한 마도구는 정상적인 마도구였다. 수출하는 그 자리에서 일일이 작동하는 것을 모두 보고 가져갔는데 이제 와서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군대를 끌고 왔다니.

“그치들이 제정신이 아니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르헨과 적대해 봤자 좋을 것이 없을 텐데?”

“완전히 돌아서고자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를?”

“그렇습니다.”

페일러스가 전해온 정보도 같았다. 이실리스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페일러스의 말대로 그녀가 직접 오기를 바란다는 해상제국의 제독의 말대로 움직이기가 요원하여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랬더니 바로 군대를 움직이는 자들이라니. 그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릴 적 보았던 해상 제독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해상제국. 이파프. 항구도시인 이토르트에 가게 되면 늘 생각나는 그곳. 그녀의 아버지가 몸을 숨기기 위해 넘어간 곳. 궁금하긴 했다. 과연 그곳은 여전할까. 어릴 적 보았던 그대로일까. 그게 아니라면 조금 변하였나. 그것이 궁금했다. 라르헨도 이리 변했는데 그곳도 변하였겠지.

“흠…….”

고심하는 그녀에게 알뤼르가 입을 열었다.

“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지?”

“무슨 일이 있다면 해상제국에서 와도 될 것인데 폐하를 바다로 끌어내려는 것이 수상합니다.”

“…….”

알뤼르의 말에 가볍게 생각했던 전쟁이 그 무게를 달리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낸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친정을 나가셨다…….”

차마 그 뒷말을 이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줄이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베르타스도 그리 말하더니 너도 그렇군.”

“신은 언제나 폐하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전시에는. 폐하, 라르헨은 폐하가 계시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렇기에 역대 황제 폐하들은 전쟁에 자주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지금 몇 번째입니까. 이번에 나가시면 벌써 열 번이 다 되어 갑니다. 이번엔 그냥 황성에 계시는 게 낫겠습니다.”

알뤼르의 말에 생각에 잠기는 이실리스였다. 어찌해야 하나. 친정을 나가고 싶은 황제가 어디 있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두고, 저를 저렇게 걱정하는 베르타스를 두고 전쟁터로 가야 하는 것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장소가 이토르트 항구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곳은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곳. 그곳에서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는 이실리스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에 해상제국에서도 그곳을 노린 것이었다.

‘가봐야겠어.’

제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무슨 일인지. 계산을 마친 이실리스가 알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뤼르.”

저를 부르는 이실리스를 향해 알뤼르가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이번 전쟁에 나도 나가야겠다.”

“폐하 그것은……!”

“장소가 이토르트 항구가 아니라면 내가 나갈 필요가 없지. 그러나 그곳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 그러니 가서 확인해야겠네.”

“뜻대로…… 하소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