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나를 구해다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절하고도 애달픈 그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며칠째 그녀의 귓전을 울리는 목소리에 이렇게 깊은 밤, 깨는 일이 잦았다. 아직 어둠이 다 지나가지 않은 밤이었다.
깊고도 깊은 그 밤에 그녀의 곁에는 베르타스가 함께하고 있었다.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본 이실리스가 꿈결의 목소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잠든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성대한 국혼을 올린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화려한 순간이었다.
라르헨의 전역엔 형형색색의 꽃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색깔의 불꽃들이 하늘 위로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사들이 이날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그녀의 마법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귀족들과 라르헨의 제국민들. 그뿐이랴, 힐렌튼의 병사들과 제국민들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장 완벽했던 것은 이제 그녀의 옆자리에 우뚝 설 권리를 얻게 된 베르타스 라르헨이었다.
‘이렇게 바라만 봐도 뒤숭숭한 꿈자리가 나아지는 것을…….’
자신의 옆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베르타스를 느끼며 이실리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에 눈을 뜬 베르타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또 일어났지?”
“……그 목소리가 또 들렸어. 베르타스.”
“이상하군.”
이실리스의 몸을 끌어안으면서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대체 누가 자꾸 내 여인을 부르는지 모르겠군.”
“장난은 하지 말고.”
“장난이 아니야. 설마 금지된 주술을 써서 누군가 널 찾는 것은 아니겠지?”
베르타스의 짐작에 이실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금지된 주술이라니. 마법을 제외한 주술서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터였다. 특히 마법사의 제국인 라르헨에서 마법 이외의 주술을 사용한 것이 발각될 경우 즉시 척살, 혹은 참수형이었다.
“라르헨에서 말인가?”
“물론 아니겠지만.”
그녀의 손을 든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손등에 입술을 내려 짙은 입맞춤을 했다.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엔 정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이실리스가 몸을 흠칫했다. 그녀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베르타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폐하?”
“무엇을 하려고…… 흣!”
그녀의 몸을 다정하게 움켜쥐는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 * *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국혼을 치른 지도 일 년이 지났다. 그의 딸은 이제 제법 마력을 가지고 놀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도 걱정을 덜었다. 혹시 아이의 마력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늘 노심초사했었다.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실리스의 불면증이 문제였다. 자꾸 누군가 저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는 그녀의 말에 알뤼르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황궁의도 마찬가지였다.
불면증으로 인해 밤에 자꾸 깨니 이실리스가 낮에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피곤한 몸으로 정사를 돌보다가 잠들기가 일쑤였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실리스의 귀에만 들린다는 그 소리를 들을 길이 없으니 베르타스로서도 막막하기만 했다. 원인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치료라도 했을 텐데 그게 아니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보라. 집무실의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라르헨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족은 항상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마력이 빠져나가는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니 그 피로감은 오죽할까.
“앞으로 내 딸이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거로군.”
아이에게 닥칠 부담감이 걱정되었으나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당장 눈앞의 이실리스가 걱정이었다. 잠든 그녀를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했다. 감각이 열려 있는 그녀였기에 잘못 건드리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눈을 뜨기 때문이었다. 그냥 저렇게 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불편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지.’
자세를 바꿔 주려고 했다가 계속해서 깨는 이실리스를 몇 번이나 경험한 베르타스는 포기했다. 사락사락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걱정스러운 그의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여러 번, 가늘게 떨리는 이실리스의 눈꺼풀이 그대로 열리면서 군청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내가…… 잤나?”
“잘 자더군.”
“아…….”
피곤한 듯 미간을 찡그리는 이실리스에게 그가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와 그만이 존재하는 집무실은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괜찮나?”
걱정하면서 묻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안 괜찮을 것은…….”
“난 늘 그대가 걱정이야. 이렇게 잠을 못 이루면…….”
“황제는 걱정의 대상이 아니야.”
“네가 황제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 이실리스. 나는 내 여자인 네가 걱정되는 거다.”
“베르타스.”
앉은 자리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이실리스의 눈가에 입술을 내린 그가 속삭였다.
“무슨 일일까. 흑마법도 아니라고 하던데.”
“흑마법이었으면 내가 가장 먼저 눈치챘겠지.”
“그랬겠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였다. 밖에서 다급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국경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 * *
시종장과 함께 온 전령 때문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해상제국이자 바다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해적들의 나라, 이파프 제국에서 항구도시인 이토르트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자들이 이제 미친 것 아닌가!”
“라르헨이 힐렌튼과 합병하여 크기가 커지니 어떻게든 비벼보려는 수작인 것을!”
“폐하!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맞습니다.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떠들어대는 대신들의 말에 이실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짓에 사위가 조용해지자 웅웅 대던 머릿속이 조금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다 했는가?”
“…….”
싸늘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표정에 대신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 소란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참을 수 없었다. 베르타스도 대신들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빛냈다.
“신, 베루스 공작이 아룁니다.”
“말하게.”
“해상제국에서 공격한 이토르트 항구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곳을 지켜야 합니다.”
“나도 그것은 알고 있네. 그러나 그곳은 건국 황제의 결계가 펼쳐진 곳이라 마법사들이 활동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지 않나.”
“그 사실을 안 해상제국에서 일부러 그곳을 공격한 듯합니다. 다행히 결계로 인해 아직 커다란 피해는 없지만, 바다로 나갈 수 없으니 뱃길이 막혀 무역에 차질이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가는 무역은 하지 않는 라르헨이었지만 뱃길은 아주 중요했다. 사막제국인 칼리파제국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서부를 통해 사막을 통과해야 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옥좌를 ‘톡톡’ 두들기던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친정을 가겠네.”
“폐하! 안 됩니다.”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차라리 제가 가는 게 낫겠습니다.”
“육지전에 능한 소드마스터보다 해전에는 마법사가 나은 법. 결계로 인해 다른 마법사들이 마력을 운신하기 어려우니 내가 가겠다.”
“안 됩니다!”
베르타스의 강경한 반대에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의견 충돌이 거의 생기지 않는 둘이었지만 한번 충돌이 생기면 몇 날 며칠을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을 봐야 했다. 괜히 저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 모든 것을 받아내고 싶지 않은 그들이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제가 가겠습니다.”
“배는 탈 줄 아는가?”
“타 본 적은 없지만 타겠습니다.”
“뱃멀미는 안 할 자신이 있나?”
“예?”
“뱃멀미 말일세.”
웃으면서 말하는 이실리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베르타스가 배를 타면 멀미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소드마스터인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전쟁터에서 사령관이 멀미로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지 못하면 볼만하겠군.”
“폐하!”
얼굴이 붉어지면서 외치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게. 바다로 나가면 항구의 결계도 없어지는 것이니 마법사 대대와 함께 가겠네.”
“안 됩니다! 그것은…….”
“알뤼르를 부르고 다들 가보게.”
베르타스의 말을 자르면서 이실리스가 물러나라 명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신하들은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서 물러났고 베르타스만이 알현실에 남았다. 둘만 남게 되자 베르타스의 안색이 변했다.
“이실리스.”
흡사 그르렁거리는 그 목소리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만하게. 황제라면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도 있지 않나.”
“내가 가겠다.”
“배만 타면 헛구역질을 하면서 무슨.”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서류로 눈을 돌렸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행동에 베르타스가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치면서 일어났다. 소드마스터의 오라가 담긴 손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의자가 맥없이 부서져 버렸다. 그대로 알현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중얼거렸다.
“성질은.”
베르타스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곁에 없었을 때 느꼈던 상실감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인 그보다 그녀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훨씬 편한 일이었다. 가볍게 날아갔다가 마법을 사용하고 가볍게 돌아오면 되는 것인데 뭘 저렇게 걱정하는지. 베르타스의 걱정이 그녀의 마음을 간질였다. 대단한 마력을 지닌 그녀였지만 그에겐 늘 걱정의 대상이라는 것이 좋았다.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거군.’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빙글거리면서 웃던 이실리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타스를 찾으러 가야 했다. 알현실을 나서는 그녀의 눈앞에 알뤼르가 나타났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아, 소식은 들었나?”
“그렇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마법사 대대를 이끌고 간다. 항구만 벗어나서 배를 타면 건국 황제의 결계는 마법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바로 가서 해결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그녀의 명령에 바로 고개를 숙이는 알뤼르에게 가볍게 손짓한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에리카의 방에 가야 했다. 화가 난 베르타스는 분명 그곳에 있을 테니. 그녀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베르타스는 아이의 곁에서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리카 너는 절대 황제는 되지 말아라.”
“왜요?”
“그 자리는 힘든 자리란다.”
“음…… 근데 어머니는 하라고 했눈데?”
에리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에리카가 냉큼 달려와 그녀에게 안겼다. 베르타스가 한 말을 이르는 아이의 행동에 이실리스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들어왔음에도 얼굴을 보지 않는 베르타스의 옆모습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베르타스.”
“…….”
“베르타스 라르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