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녀의 말에 힐렌튼의 제국민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실리스는 가차 없었다.
“이곳을 위해 헌신하던 자는 이제 없다. 나를 위해 헌신하는 자만 있을 뿐. 사람 하나 잃는 것이 그대들에게 아무런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그 사람이 소드마스터라면 다르지.”
베르타스의 가치를 알게 된 힐렌튼의 제국민이 웅성였다. 가소로웠다. 저런 자들을 제국민이라고 보호했다니. 변절자?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자들이 외치는 소리치고는 너무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상처였다. 그들의 외침에 움찔하고 변하는 표정이 보였기에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게.”
“나는…….”
그녀의 말에 울컥한 듯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표정을 굳힌 그가 힐렌튼의 제국민에게 말했다.
“나를 변절자라고 부르기 전에 그대들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라. 힐렌튼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내가 황성에서 쫓겨났을 때 누구도 나에게 온정을 베풀어준 이가 없었다. 전 황제가 내린 명이 아무리 무서웠어도 누군가는, 나를 보호해야 했음이 맞다. 나는 그때 겨우 열 살이었고 전쟁터로 내몰리기엔 어린 나이였다.”
그의 말에 다들 숨을 죽였다. 이제야 내보이는 베르타스의 속내에 이실리스가 미소지었다.
“전쟁터에서도 나를 도와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였지. 그대들 중 누구도 나의 아버지셨던 분의 치세에서 도움을 받지 않은 자는 없었을 텐데. 왜 아무도 나를 돕지 않았나?”
그의 물음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왜 아무도 나를 보호하겠다 나서지 않았지?”
그의 외침은 허공을 공허하게 울렸다. 그의 시선을 피하는 힐렌튼의 제국민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곳마다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희게 웃었다.
“그랬던 너희들이 나에게 감히 변절자라고 외치는가?”
그의 분노가 허공을 갈랐다.
“나는 그 이후로도 너희들의 국경을 지켰다. 그러나 나의 측근들 이외에 누구도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수도에 들어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너희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외로움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울렸다.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의 진정한 속마음은 저런 것이었다.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가 없는 그의 조국. 자그마한 기대를 걸어 다시 돌아왔으나 그에게 손 내미는 이는 없는 곳. 황족으로서 의무를 다하면 뭐 하나. 알아주는 자가 없는데.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마지막 말이 힐렌튼의 제국민에게 선을 그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를 향해 돌아서는 그의 얼굴을 향해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었다.
* * *
힐렌튼의 상황은 단박에 정리되었다. 어쩔 것인가. 마지막 남은 황족이 그들을 구제하고 싶지 않다 하는데.
이실리스와 함께 등장한 마법사들이 힐렌튼의 곳곳으로 파견되어 빈민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교육했다. 그녀의 명에 따라 마법사들은 철저하게 움직였다. 힐렌튼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반항하면 지체 없이 그 지역을 떠났다. 살기 어려워진 그들이 서로를 죽이든 약탈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도자가 없는 나라란 본디 그런 법이니까.
소문은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힐렌튼의 제국민은 포기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을 구심점으로 모이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이실리스와 베르타스가 다 죽여없앴기 때문이었다. 남은 귀족들은 모두 베르타스의 수하들. 그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베르타스와 함께 라르헨으로 망명했다. 헥터의 배신이 그들에겐 도화선이 되었다.
평민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획책하기에도 녹록지 않았다. 이실리스의 마법사들은 평민들이 모이는 모임마다 찾아가 그들을 훼방 놓았다. 모든 이들을 감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변절자들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어느 나라든 나라의 상황이 변하면 변절자가 생기는 법.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에 따라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마법사들은 상과 벌이 확실한 자들이었기에 반항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따르는 제국민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호의를 보이는 이들에겐 호의로 갚아주었다. 그 호의는 때로는 돈이었고, 때로는 마도구였으며, 때로는 다른 무뢰배들로부터의 보호였다. 점점 힐렌튼의 사람들은 라르헨의 지배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그들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베르타스와 이실리스의 국혼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 * *
“폐하! 이것을 더 보셔야 합니다.”
“지겹다.”
계속해서 똑같아 보이는 보석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색만 달리하고 보석인 것은 똑같은데 대체 왜 이것들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셔야지요.”
“황제의 외모는 품평의 대상이 아니다.”
“폐하.”
메릴이 옆에서 하는 잔소리에 이실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베르타스는 무얼 하고 있는가?”
“그분도 폐하와 같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는 소리를 들은 이실리스가 웃었다. 저만 이런 일을 당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싱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시녀들이 눈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얼굴에 보이는 즐거운 기색에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웃어도 좋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리 내어 웃는 시녀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물었다.
“왜 그리 좋아하지?”
“폐하께서 국혼을 하는데 좋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보다 이유가 더 있을 듯한데?”
“폐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국혼도 없이 황태녀님을 출산하셨을 때 저희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십니까?”
“섭섭?”
“아름다우신 폐하를 이렇게 꾸밀 기회도 주지 않으셨잖습니까. 치장 시녀인 저희는 이런 일이 없으면 나설 일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나서게 되었으니 너무 다행이지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녀의 머리카락 곳곳에 보석을 장식하는 시녀들의 얼굴에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도 웃었다. 밖에서 시종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타스 라르헨 드십니다.”
베르타스는 라르헨의 국법에 따라 그녀의 부군이 되기로 정해진 순간 성이 바뀌었다. 본래, 힐렌튼에서 라르헨으로 귀화하였기에 새로운 성을 내리는 것이 맞았으나 그녀의 한마디로 인해 상황이 정리되었다.
“내 부군이 될 자에게 새로운 성을 내릴 필요는 없다. 라르헨으로 충분하다.”
황족의 반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성을 하사하면서 이실리스는 베르타스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누구도 그녀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서둘러서 들어오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베르타스였는데 시녀들의 눈이 있다고 그나마 존대하는 모습이 웃겼다. 뭔가 놓친 것이 있어 보이는 그의 표정에 그녀가 시녀들을 물렸다. 그녀의 손짓에 소리 없이 방 밖으로 나가는 시녀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물었다.
“무엇인가.”
“이실리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을 꿇는 베르타스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 그녀가 담겼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왜 부르는가.”
“나와 결혼해줘.”
“결혼? 이미 국혼을 하지 않나.”
“그것과는 다르지. 나는 너에게 청혼하는 거야.”
“이미 한 것 아닌가?”
“아니야. 이실리스. 난 너라는 여인에게 하는 것이다. 라르헨의 황제가 아니라.”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여인?”
“당연하지. 너는 내가 지켜줘야 할 나의 사람. 내게는 라르헨의 황제가 아닌 여인이다.”
“내가?”
“그럼 여기에 이실리스 라르헨 말고 또 있나?”
그녀를 보면서 장난스럽게 웃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이실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저에게 저렇게 말해준 이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위치를 알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베르타스의 모습이 눈부셨다. 여인이라니. 평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그녀가 밝게 웃었다.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 아름답게 빛나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해.”
그의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곁에 있을게.”
“곁에?”
“너와 우리 딸 곁에. 항상.”
그녀가 황제의 위에 오르기 전. 세상을 알기 전, 그녀가 책으로만 읽었던 아름다운 기사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밤의 장막을 베어낸 듯 아름다운 검은색 머리카락에 열정을 품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이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에 둘린 망토는 창문 너머에서 들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바람은 그녀 또한 훑고 지나갔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진심에 답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사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제야 페일러스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려 하지 마. 이실리스.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인한 남자야.]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남자였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남자. 베르타스 라르헨.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주시하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허락하지.”
따뜻한 봄 햇살을 베어 문 듯 이실리스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그려졌다. 베르타스가 빛나는 미소를 그리며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