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녀의 말에 놀란 베루스 공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놀란 얼굴을 본 그녀가 인자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뭐 그리 놀라고 그러나.”
“제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안될 것은 무에 있나. 자네는 내 충신이 아닌가.”
“폐하!”
이실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머리를 찧는 공작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그녀의 가벼운 마법에 몸이 들어 올려진 베루스 공작은 계속해서 허리를 숙였다.
“소신에게 너무 막중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제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것을. 그대를 믿기에 황태녀를 맡기는 것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주게.”
“신, 폐하의 명에 따라 나라의 후계가 되실 분을 보호하겠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다행이로군.”
흐뭇하게 웃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베루스 공작이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저…… 그렇다면 폐하. 대체 언제…….”
“내일 당장.”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말을 왜 이제야 해서 저를 힘들게 하냐느니, 준비할 시간이 없다느니 하는 베루스 공작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가 손짓했다. 밖으로 달려나가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불러모으는 베루스 공작의 기척을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다시 마법사 제1대대의 대장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제1대대 말고 지금 전투에 나갈 수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 되나?”
“누구든 폐하의 명만 있으면 전투에 나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1대대부터 3대대까지 나와 함께 간다.”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힐렌튼.”
언제냐고 묻지도 않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대장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 나의 충신이라고 할 수 있지.’
마법사들의 충성심을 한 몸에 받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기다려졌다.
베르타스가 힐렌튼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법진에 서자 이실리스는 미리 준비했던 방어 마법이 걸린 브로치를 그의 옷깃에 달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에게 바로 마력이 감지되게 설정되어있는 마도구였다. 괜한 노파심에 잠 못 이룬 어젯밤,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것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사라지는 베르타스의 일행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마법사들을 불러모았다. 그 포탈을 사용하여 그대로 힐렌튼으로 갈 생각이었다.
“헉!”
“폐하 괜찮으십니까?”
마력이 쥐여짜이는 느낌에 이실리스가 몸을 휘청였다. 베르타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마법진은 다 되었는가?”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됩니다!”
“서두르게!”
지체할 수 없었다. 베르타스가 잘못될 수도 있었으니. 이실리스는 마법진이 완성되자마자 마력을 운용하여 술식을 펼쳤다.
* * *
환한 빛이 일었다. 대단위 이동마법을 통해 이실리스와 마법사들이 도착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그녀의 예상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아 헛웃음이 났다. 그가 그동안 힐렌튼을 떠나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황제의 아버지이자 섭정공, 소드마스터인 사람의 뒤통수를 치다니.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그녀가 마력을 폭사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와 마법사들의 등장에 베르타스에게 달려들던 무리가 멈칫했고 그 찰나의 순간 그들은 모두 그녀의 마법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화염 마법이 그들을 휘감았고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이실리스는 제일 선두에 선 귀족을 알아보았다.
‘아마 저자가 주동자겠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 귀족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번 일의 주동자겠군.”
“라르헨은 이번 일에서 빠지시오!”
“내가 왜? 이제 이 나라는 내 제국인데.”
손에서 마력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불에 타는 듯했다. 붉은 마력이 그녀의 몸을 휘감으면서 대단위 마법을 준비했다. 이실리스를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베르타스 일행에게 보호마법을 씌웠다.
“베르타스, 보호할 자가 있나?”
본디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그에게 묻지도 않고 마법을 난사해야 했으나 그의 나라이기에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없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마력을 쏟아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붉은 기운들을 보면서 마법사들은 넋을 잃었다.
“메테오…….”
지상 최고의 마법이자 드래곤의 일부라고 불리는 마법이 그녀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붉은 화염이 힐렌튼의 황궁을 뒤덮었다. 길다면 긴 역사를 지닌 그곳이 단 한순간에 초토화되었다.
그 상황을 직접 목도한 힐렌튼의 제국민이 다들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수도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던 황궁이 무너지고 그 무너진 잔해들 사이에서 이실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여신의 등장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이실리스를 쳐다보던 힐렌튼의 제국민이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그녀가 확성 마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라. 나는 라르헨의 황제이자 이제 힐렌튼의 황제가 될 이실리스 라르헨이다. 오늘부로 힐렌튼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겠다. 이 나라는 라르헨으로 편입될 것이며, 그대들은 라르헨의 제국민이 되는 것이다. 반항은 용서하지 않겠다. 모두 꿇어라.”
확성 되어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위엄이 담겨있었다. 반항하려는 기색을 보이는 자에겐 마력을 날렸다. 그녀가 놓친 사람에겐 그녀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쏘아냈다. 고개 든 자가 보이지 않고 다들 무릎을 꿇자 이실리스가 다시 말했다.
“그동안 그대들이 귀족들의 폭거에 어려웠음을 잘 안다. 기회를 주마.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평민들을 움직이는 데 가장 좋은 것은 이 방법이었다.
“귀족들의 죄를 고하라. 내 앞에서.”
그녀의 말에 우물쭈물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나와 입을 열었다.
* * *
“헥터 경.”
“각…… 각하. 제가 부족해서…… 쿨럭!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경은 최선을 다하였네.”
“각하께서…… 배신을 싫어…… 하는 것을…… 아는데…… 흡.”
“말하지 말게.”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베르타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곁에서 보호마법을 펼친 알뤼르 덕분에 이실리스의 대단위 마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헥터였다. 그 외에 나머지 황궁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안에서 모의했던 귀족들도 전부.
“각하의 병…… 병사들은…… 성문……밖에…….”
“말하지 말라 하였네.”
침잠된 눈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베르타스를 보던 알뤼르가 회복마법을 쓰려고 할 때였다. 그의 손을 헥터가 덥석 잡았다.
“괜…… 괜찮습니다.”
“…….”
“각하와 함께…… 해서,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떨구는 헥터의 눈을 감기면서 베르타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이런 짐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 약한 그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가 했을 마음고생에 대해 생각하면서 베르타스는 눈을 감았다. 죽음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도 마십시오.”
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알뤼르가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도 마시고 폐하께 가세요.”
그의 말에 베르타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분노로 점철된 그의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한 알뤼르가 움찔했으나 그대로 서서 다시 말했다.
“폐하께 가세요. 저분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의 말에 베르타스의 고개가 이실리스를 향해 돌려졌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폐허가 된 주변도 그녀의 빛을 가릴 수는 없었다. 저 이를 황제로 모시게 된 힐렌튼은 앞으로 대단한 발전을 할 것이다. 그런 힐렌튼에 그가 필요할까. 황제의 개라고 조롱받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폐하께 가세요. 폐하께 힘이 되어줄 분은 당신뿐입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알뤼르의 말에 베르타스가 망설였다. 그러던 중, 이실리스의 고개가 돌아가고 베르타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망설이는 그에게 이실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는 그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닿았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채 걸었다. 저를 향해 손을 내밀어준 그녀를 향해.
저를 향해 걸어오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알뤼르의 굳은 표정에 잠시 불안했으나 이내 저의 부름에 제게로 오는 그였다.
그녀의 손을 잡은 베르타스를 옆에 세우면서 그녀가 힐렌튼의 제국민을 향해 말했다.
“힐렌튼의 정당한 계승자인 베르타스 힐렌튼과 함께 이곳을 다스릴 예정이니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타국의 황제를 어떻게 믿냐는 제국민의 말에 이실리스가 한 대답이었다. 베르타스의 모습을 지켜본 힐렌튼 제국민이 변절자라 소리쳤다. 그랬다. 그들에게 그는 변절자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그녀의 앞에서 꺼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닥쳐라.”
유했던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당한 후계자인 그가 황성에서 내쫓기듯 쫓겨났을 때 그대들은 무엇을 하였나? 그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푼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내 알고 있다. 그래놓고 변절자라는 소리를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녀의 말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대들이 여태껏 받았던 고통도 그가 쫓겨났을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정당하게 황위를 이어받았다면 그대들의 상황도 달라졌을 터. 그러나 불의를 눈감았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아닌가.”
차갑게 떨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볼 뿐이었다.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권리만 누리겠다고?’
저들은 다 잃어야 했다. 베르타스 힐렌튼도 아까웠다. 제국의 이름을 유지하게 해 준 그에게 이따위 대접이라니. 진작 라르헨으로 망명했다면 그녀가 아껴서 인재로 썼을 것이다. 그랬는데 감히.
“그대들이 여태껏 누린 평화는 베르타스 힐렌튼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는 내가 데려가겠으니 그대들은 그대들의 길을 걸어라. 그는 나와 길을 걸을 것이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녀를 향해 외치는 힐렌튼의 제국민을 향해 이실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다르다. 그는 이제 나의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자가 될 것이다. 너희들이 아니라.”
그 차이는 크다. 그렇기에 이실리스는 대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그를 잃었고, 나는 그를 얻었다. 그것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