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그녀의 물음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말이 없는 시간이 계속되고 침묵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괜한 것을…….”
“맞아.”
여태까지 대답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인정하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로서는 라르헨을 없앤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그가 입은 상처가 어느 정도였기에 이런 계획을 세웠단 말인가.
“이루니 어떠한가.”
“시원섭섭하군.”
“시원섭섭?”
“목적을 이루었으니 시원하지만 섭섭하기는 하군. 나의 반평생을 목표로 했던 것이 사라졌으니.”
어딘지 아련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이실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새로운 목표를 주겠네.”
“새로운 목표?”
“그대가 목표를 잃어 방황한다면 새로운 목표를 주면 되는 것 아닌가.”
늘 자신만만한 베르타스의 모습을 보다 저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새롭기도 했지만 두려웠다. 그가 길을 잃고 방황할까 봐.
“내 곁에 있어.”
“뭐?”
“내 곁에서 나를 보필하면 되겠군.”
“부군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도 그렇지만 그대에게는 한 가지 일을 더 부여하겠네.”
“뭐를…….”
“나라의 기사단장이 되어서 제국을 지켜주게.”
“내가?”
“베르타스 힐렌튼. 자네가.”
다른 제국민인 그를 기사단장의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이실리스는 결정을 내렸다. 사이르카 후작이 기사단장이자 그녀의 보좌였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 죄로 처형당했으니 그 자리는 공석이었다. 내부에서 적을 키울 수 없다는 이유로 베르타스에게 기사단장의 자리를 줄 생각이었다.
‘같이 전쟁터에 나가고 싶다는 욕심도 있지만.’
그녀가 가끔 출전할 때 혼자 남겨지는 베르타스가 걱정되었다. 황궁에서 시종이나 시녀들이 부리는 텃세에 상처받는 것이 싫었다. 그러면 옆에 끼고 있는 것이 제일 좋았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잘되었군.”
그가 허락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베르타스의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그는 그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그를 보면서 속삭였다.
“내 옆에 있어.”
“당연한 소릴 하는군. 나라도 망해서 이제 갈 곳도 없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소리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곳이 그대의 옆이라는 것도?”
“당연히.”
이마를 마주 대고 웃는 둘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는 황궁 사람들이 있었다.
* * *
베르타스는 서둘러서 힐렌튼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다한을 보내 옥새만 가져올 생각이었으나 이실리스가 힐렌튼으로 걸음 하겠다 하였으니 당연히 먼저 가서 정리를 해야 했다. 그의 곁엔 다한과 알뤼르가 붙었다.
“또 저입니까?”
“그대가 가장 힐렌튼의 좌표를 잘 아니.”
“너무 부려먹는 것 아닙니까?”
“하긴, 황태녀의 스승에게 내 너무 하였군. 그렇다면 다른 마법사를…….”
“됐습니다!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불퉁하게 답하는 알뤼르를 보면서 빙긋 웃는 베르타스였다.
“잠시 기다리게.”
이동 포탈의 위에 서서 준비하는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실리스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베르타스를 바라보던 그녀가 그의 옷깃에 브로치를 걸었다.
“혹여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이 될걸세.”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변에서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서 있던 사람들의 눈이 그녀와 그에게 쏠렸다.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실리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베르타스는 하얀빛에 감싸였다.
눈앞에 보이는 헥터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움직였다.
“자네가 마중을 나오다니 별일이로군. 황성엔 일이 없나?”
“일이 있다면 여기 없었겠죠. 각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헥터의 모습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베르타스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죽어라!”
몸을 숨기고 있던 암살자가 나타나 그를 베었다. 헥터의 이상 행동에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옆구리를 내어줬다. 그 순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암살자의 검이 허공으로 튀었다. 이실리스가 걸어준 브로치가 빛을 발했다.
베르타스의 모습을 보고 놀란 알뤼르가 암살자에게 마법을 시전했고, 화염 마법에 의해 암살자는 불타올랐다. 재빠르게 칼을 꺼낸 헥터를 본 베르타스가 목걸이에 오라를 불어 넣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 맞는 검으로 변한 그것을 들고 헥터를 향해 휘둘렀다. 마지막 순간, 검에서 힘을 뺀 헥터의 행동에 베르타스가 속도를 늦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경!”
심장 근처를 찔린 헥터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를 돌아볼 새도 없이 주변에서 그를 포위하는 병사들이 느껴졌다. 그들을 이끄는 선두엔 헥터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찬탈자 베르타스 힐렌튼!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그의 모습을 본 베르타스가 비소를 머금었다.
“하긴, 내 인생이 그리 쉬울 리 없지.”
검 한 자루로 모든 것을 얻어 온 인생이었다. 헥터가 그를 배신한 것도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야욕에 넘어간 것일 뿐. 아버지를 말릴 수 없으니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검에 뛰어든 것 같았다.
‘아버지를 배신할 순 없으니 그냥 죽겠다는 건가.’
주군인 베르타스를 배신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주군의 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면 그는 성공했다. 옆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가는 헥터의 모습에 잠시 시선을 둔 베르타스였다. 헥터의 아버지는 헥터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부모조차 알아주지 않는 자식의 죽음이라니. 그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머저리 같은 놈.”
그렇게 마음 약하게 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건만. 튀어나오지 못한 말을 애써 삼키며 베르타스가 울분을 삭였다. 같은 것을 느낀 다한도 검을 강하게 쥐었다. 알뤼르도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 * *
베르타스가 떠나기 전날 밤, 이실리스는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아이를 잃어버렸던 것과 같은 불안한 마음이었다. 불안해진 그녀가 통신석을 사용해 페일러스에게 연락했다.
“무슨 일이야?”
“페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에서 불안함을 눈치챈 페일러스가 그녀에게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어렵게 입을 연 그녀가 페일러스에게 말하자 그가 간단하게 답했다.
“뭘 고민하는 거야. 그럼 따라가면 되지.”
“따라간다고?”
“부군 될 자를 지켜주러 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냥 같이 가.”
페일러스의 말에 괜히 쑥스러워지는 이실리스였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지켜본 페일러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거기다 대행하나 세워놓고 가면 되겠네.”
“네가 해 줄 건가?”
다른 누군가보다 네가 믿을만하다는 그녀의 말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난 싫어. 그 자리는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자리잖아.”
“넌 내가 괴물로 보이나?”
“너뿐 아니라 너의 아버지도. 라르헨 황족들은 다 괴물이야.”
조용히 말하는 그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챈 그녀가 그에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베루스 공작에게 잠시 자리를 맡겨야겠군.”
“그를 뭘 믿고?”
“그를 믿는 것이 아니야.”
“그럼?”
“내 손에 인질로 쥔 그의 가족들을 믿는 거지.”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정말 무서운 황제야. 이실리스.”
“칭찬으로 듣지.”
베루스 공작이 그녀의 아버지를 숨기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작의 가족을 손아귀에 쥐는 것이었다. 조금은 가혹하다 싶은 그녀의 처분에도 베루스 공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없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너도 용서할 구실을 찾고 있던 것 아닌가.”
“그렇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그리하면 되겠군.”
“너는 정말 오지 않을 건가?”
“이실리스.”
진지하게 그녀를 부르는 페일러스의 부름에 이실리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통신석 너머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였지만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가능하다면 황궁에서 멀어지고 싶어. 내가 자주 황궁을 들락거리니 어머니께서 다른 마음을 가지실 것 같아서.”
“흠…….”
“그 사실을 알면 너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어머니를 처리하겠지. 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럴 수도.”
즉답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쉰 페일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난 더 이상 황궁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알겠네.”
“가끔 항구로 와서 소식을 전해줘.”
“뭐하러.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다 알 터인데.”
“그래도.”
웃으며 작별을 고하는 페일러스를 보며 그녀도 웃었다. 떠나는 이의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황제의 자리는 늘 외로운 법이었다.
‘그래도 이젠 이 외로운 길을 베르타스와 함께 걷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든 잡념을 떨쳐버리며 이실리스는 베루스 공작을 호출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달려온 듯한 공작의 모습에 그녀가 웃었다. 가택에 구금되다시피 한 그가 그녀의 부름에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인 타르토스의 방만함에 분노한 그녀가 공작의 부탁으로 타르토스에겐 죄를 물지 않았지만 베루스 공작에게 그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녀의 처분에 반항할 법도 한데 아무 반응도 없던 그의 행동에 외려 그녀가 미안해졌다. 황제는 신하에게 미안함이란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언제나 공명정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긴 그녀가 베루스 공작을 부르려 했으나 괜히 씁쓸한 마음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오늘도 페일러스가 그녀의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베루스 공작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늙은 노신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 베루스 공작.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내 공작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네.”
“황제께서 신하에게 부탁이라함은 옳지 않습니다. 명하시면 따르겠습니다.”
“그새 서운하였나?”
“아닙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는 베루스 공작을 향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아이를, 황태녀를 잠시 보호해주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