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9/161)

78화.

열어준 문으로 들어서니 황좌에 앉은 이실리스와 옆으로 늘어선 신하들이 보였다. 이전에도 보았던 모습이지만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성장을 한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기품이, 그리고 위엄이 넘쳐 흐르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을 마음에 품었고, 함께 하자고 하였다. 그때의 그 생각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었나. 아마 이실리스는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베르타스 힐렌튼.”

“부르셨습니까.”

앞에서 무릎을 꿇자 그녀가 손짓으로 만류했다.

“일어나게. 이젠 나의 부군이 될 사람이니.”

“…….”

신하 중 일부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들의 말을 단 한마디로 이실리스가 눌렀다.

“그렇다면 누구든 힐렌튼과 비슷한 크기의 영토를 가져오게. 내 부군의 자리를 내어줄 터이니.”

“라르헨과 힐렌튼은 문화가 너무 다릅니다. 폐하.”

앞으로 나서며 말하는 시실리아 백작의 말에 이실리스의 고개가 돌려졌다.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인가.”

“저들은 사람의 성별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을 나누어 놓습니다.”

그랬다. 힐렌튼과 라르헨은 문화가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비단 힐렌튼만이 아니었다. 사막제국인 칼리파 제국도 그리고 멀리 있는 해적 왕국의 문화도 라르헨과 달랐다. 

여성이 황좌에 오를 수 있고 여성 귀족들도 관료에 많이 진출해 있는 라르헨과는 달리, 다른 제국들은 그렇지 않았다. 계승권도 남자만이 가지고 있었으며 재산을 물려주는 것도 그러했다. 강대국인 라르헨이기에 맞춰주는 척하지만, 뒤에서 라르헨의 황제를 여제라고 깎아내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하루아침에 바뀔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백작의 우려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국가를 굳이 통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오히려 우리 제국민에게 불순한 사상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황족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라르헨과는 달리 중구난방인 힐렌튼의 문화를 걱정하는 백작이었다. 백작을 바라본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 정도 일도 치르지 않고 힐렌튼을 삼키려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라르헨보다는 작지만 그에 견주는 땅덩이를 흡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응당 거기서 나타나는 반대급부를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것을 다들 알 텐데 저어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문화의 차이로 생기는 문제라면 교육을 하면 되는 것을. 지금 저 말은 자그마한 일이 무서워 큰일을 하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베르타스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분한 듯 얼굴을 붉히는 백작의 모습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남겼다. 그의 앞길을 방해하려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실리스의 옆자리에 서려는 것을 방해한다면 조용히 사라지게 해 줄 용의도 있었다. 

“관습의 차이는 나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지. 백작. 잘 말해주었네.”

이실리스가 중재하고 나섰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한가? 힐렌튼의 국명을 라르헨으로 바꾸고 국경을 열기 전에 먼저 마법사들을 파견하여 교육을 하도록 하지.”

“마법사들을요?”

“라르헨의 마법사 중, 열의를 가진 이들이 많으니 힐렌튼으로 파견하여 힐렌튼의 기조를 바꾼다. 알뤼르!”

“예, 폐하.”

옆에서 알뤼르가 튀어나와 이실리스의 앞에 무릎 꿇었다.

“마법사 3개 대대를 파견하겠네. 아직 신입인 마법사들을 제외하고 전부 데려가게.”

“그렇다면 라르헨엔 2개 대대만이 남습니다.”

“어차피 그들이 하는 일은 마법 무구를 개발하는 것이잖나. 마법 무구의 수량을 이참에 줄이는 것도 좋겠군.”

라르헨의 수출 품목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마법 무구의 수량을 줄인다는 소리는 다른 제국들의 견제가 들어온다면 마법 무구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단박에 그 소리를 이해한 귀족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혜안을 가지셨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되었네. 수량의 조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요청하는 곳이 많아 핑계를 대기가 어려웠을 뿐이니까.”

“그럼 언제까지…….”

“나도 그건 알 수 없지. 힐렌튼이 라르헨의 문화를 언제 받아들일지 모르니.”

대놓고 마법 무구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저건.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판단력에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의 정치적 감각은 탁월했다. 저런 자를 황제로 둔 라르헨의 제국민은 얼마나 행복할까. 조금 부러웠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고, 그가 황제가 되었다면 그녀와 같은 치세를 펼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복수심으로 점철된 마음이 아닌 자애롭고 제국민을 생각하는, 아니 언제나 힐렌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갑작스럽게 든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그는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실리스가 보였으나 그는 굳은 표정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베르타스 힐렌튼을 부군으로 맞이하는 것에 다들 찬성하는 것으로 알겠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다들 허리를 숙였다. 그 말에 불끈 쥐어지는 주먹을 숨길 수 없었다. 잠시 베르타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신하들에게 물러가라 명했고 그들이 다들 나가자 그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홀린 듯이 황좌의 바로 앞에 선 베르타스의 턱을 들어 올리는 이실리스였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대.”

“아니 잠시 생각을 하였어.”

“생각? 무슨 생각?”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내가 힐렌튼의 황태자였던 시절의 생각.”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랬다면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걸세.”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랬겠지.”

“후회하는가.”

저의 안색을 살피며 말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뺨을 감싸 쥔 그녀의 손을 그의 손으로 덮었다.

“그럴 리가.”

후회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이실리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없었다. 그녀와의 하룻밤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딸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후회라니. 무서운 말을 하는군. 그대.”

이실리스의 말에 웃으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말했다. 그의 기색에 안도하는 그녀를 보면서 저에게 마음을 준 이실리스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베르타스였다. 

거의 끝나갔다. 힐렌튼의 국새를 넘기고 라르헨에 힐렌튼을 복속시키면 그와 그녀의 아이가 두 나라, 아니 라르헨을 잘 이끌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길고 길었던 복수도 끝나는 것이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린 힐렌튼에 대한 복수. 어릴 적부터 처절했던 그의 투쟁이 이제 끝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만족하는가.”

“당연한 소릴.”

“그대가 가지는 것은 라르헨 황제의 부군이라는 직함뿐인데도?”

“가장 좋은 것을 가지게 되는군.”

그의 말에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사랑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자 뒤에서 헛숨을 들이켜면서 대기하던 시종과 시녀들이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라르헨의 황제에게 입 맞출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하긴. 그대가 유일하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도 웃었다. 그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한, 황제의 침실에 드나드는 유일한 자가 되겠지.”

속삭여진 그 말에 전율이 일었다. 그래. 제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에게 유일한 단 한 사람이었다.

“국혼은 어디에서 올리지?”

치솟아 오르는 음심을 숨기며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욕정 어린 눈을 보고 눈꼬리를 휜 그녀가 답했다.

“대신전.”

* * *

이실리스는 그녀가 선택한 베르타스가 아주 기꺼웠다. 그녀에게 헌신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그냥 몸만 와도 괜찮았는데 힐렌튼을 통째로 가져다 바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그녀가 입술을 대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그녀에게 욕정을 드러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어디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국새는 어찌하면 될까?”

“힐렌튼의 수도에서 받아야겠네.”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즉답했다. 베르타스가 라르헨에 힐렌튼을 흡수 통일시킨다고 말할 때부터 노리고 있었다. 힐렌튼의 제국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라르헨과 힐렌튼의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베르타스 힐렌튼이 그녀에게 힐렌튼 제국을 바쳤지만, 힐렌튼 제국민들은 라르헨이 운이 좋게 그 나라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는 보여줄 생각이었다. 라르헨을 무시하는 주변 국가들과 힐렌튼에. 

그녀의 위력이 전쟁터가 아닌 일반 제국민에게 보인 것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병사들을 제외한 평범한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힐렌튼의 제국민에게 보여줄 계획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를. 이실리스 라르헨. 라르헨 제국의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이다. 보여줘서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복속이 쉬웠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괜찮겠나?”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무대였으나 베르타스에겐 치욕의 무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그의 모습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하다니 다행이군.”

“서약의 샘물도 마신 나인데, 이 정도면 약소하지.”

베르타스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황제는 이미 죽임을 당했고, 황태자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모두 베르타스가 한 일일 터. 그의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살아 도망치게 만들고 뒤에서 죽이다니. 앞으로 황제가 될 그와 그녀의 딸을 위해서 아주 잘된 일이었으나 누군가 알게 되면 손가락질 받을 일이었다.

‘그렇게 놔둘 나도 아니지만.’

베르타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품에서 보호해줄 요량이었다. 그게 그녀에게 헌신하는 부군을 위한 일이었으니. 그러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네 혹시…… 처음부터 힐렌튼을 지도에서 없앨 생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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