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니?”
놀라운 목소리로 외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알뤼르였다. 이실리스의 뒤에서 얼굴을 내민 베르타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건가!”
마력을 운용하는 아이를 안아 들다니. 상식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는 아이를 안아 올렸고 아이는 ‘꺄르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했다. 마력을 잡아챈 것은 그대로였다. 아니, 심지어 아이는 본인의 마력과 이실리스의 마력을 섞어서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도 이랬지.”
“오기 전에도?”
“우리 딸은 정말 특별한 모양이야. 얼마 전엔 내 오라를 잡아채서 놀더군.”
웃으면서 아이를 끌어안자 아이도 환하게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안나, 안나!”
안아 달라는 아이의 말에 베르타스가 아이를 높이 던졌다가 받았다. 계속해서 ‘꺄르륵’ 거리는 아이를 보면서 이실리스도 염려의 눈초리를 지웠다. 조금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저리 좋아하니 된 것이겠지.
“아빠, 아빠!”
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베르타스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그대로 아이의 보드라운 뺨에 키스를 남겼다. 옆에서 바라보던 이실리스도 아이의 옆으로 홀린 듯이 다가갔다.
“안아 보겠나?”
“그래도 되는가.”
“너와 나의 딸인데 안 될 것은 없지.”
베르타스의 품 안에 안겨있던 아이를 안아 들었다. 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마?”
그 한마디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애써 떨어지려는 물방울을 참으면서 그녀가 아이에게 속삭였다.
“그래. 내가 너의 어머니이자, 이 제국의 황제다.”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꺄르륵’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아이에게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그마한 아이는 너무나도 소중하여 그녀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아이를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줘야 하지 않나?”
“그렇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지을 수 없었다. 처음엔 굉장히 흔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고, 그다음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시기를 놓쳤다.
“생각해 놓은 이름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듯 말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생각해 놓은 것은 많았다. 다만 하나를 고르지 못했을 뿐. 베르타스의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을 뱉었다.
“에리카.”
“너무 거창한 이름이군.”
“존경받는 왕이라는 의미 정도는 되어야 황제의 이름이 될 수 있지 않나.”
“하긴…….”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저를 불러대는 아이를 보면서 웃었다. 보드라운 아이의 뺨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댄 이실리스가 속삭였다.
“에리카 라르헨. 그것이 너의 이름이다.”
* * *
베르타스는 기다렸던 헥터의 마지막 서신을 받았다. 서신을 들고 온 다한이 그에게 말했다.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그래?”
천천히 헥터의 서신을 읽어내린 그가 다한에게 물었다.
“황태자의 숨겨진 자식을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헥터 경께서 처분을 물었습니다.”
“물을 것이 뭔가. 그냥 즉결처형하면 될 것을.”
차가운 그의 말에 다한의 몸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으나 베르타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싹을 남겨둘 수 없었다. 그것이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그의 앞길, 아니 딸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죽여 없앨 생각이었다. 그의 손에 피를 묻히고 혈로를 걷는 한이 있어도 그의 아이에겐 창창한 앞날만을 남겨주고 싶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저의 아버지도 그랬을까. 이실리스도 지금 그러할까. 베르타스는 힐렌튼의 황위에 오른 딸의 문제를 이실리스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말로만 힐렌튼을 넘기겠다 했지만, 그에겐 계획이 서 있었다. 전 황제의 폭정으로 지쳐있는 힐렌튼의 제국민이었다. 베르타스가 섭정공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제국민에게 황제가 바뀌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라르헨과 흡수 통일을 한 이후에 그것이 필요했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그의 적들을 모조리 쳐냈지만, 그는 기다렸다. 헥터가 움직이기를.
헥터는 그저 그런 부관이 아니었다. 힐렌튼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의 차남. 그 집안의 한마디로 힐렌튼이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명문가였다. 그러나 베르타스의 숙부가 황제의 위에 오르고 헥터의 집안에서 헥터를 제외한 사람들은 집안의 문을 걸어 닫았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황위를 계승한 이를 황제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베르타스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멀리서 방관했을 뿐. 전 황제도 그들의 그런 모습을 못마땅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과 적이 되기엔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모른 척 방관하던 날들이 지나고 베르타스는 그들에게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적이 되든지 내 뜻을 따르든지, 그대들이 보이지 않았던 신의에 대한 답을 이제는 보여주길 바란다.]
그의 아버지가 그들의 죄를 눈감아주었고, 그는 그들이 그를 방치하는 것을 눈감았다. 그러니 이젠 그들에게 이 정도 요구를 하여도 정당하다 생각했다.
‘물론 내 말에 따르지 않았을 때는 멸문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었다. 힐렌튼에서 그 정도 지지를 받는 가문이 살아남는다면 라르헨과 흡수 통일을 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그의 딸이 황위에 올랐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싹을 애초부터 잘라내고 싶은 그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서 머리를 숙였고 그 결과가 그의 손에 들린 서신이었다.
“아쉽군.”
“각하. 헥터 경께서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흠…….”
생각에 빠진 베르타스를 다한은 계속해서 기다렸다. 점점 지루해지려던 찰나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다한 경.”
“예. 각하.”
“어찌했으면 좋겠나.”
“뭘 말씀이십니까?”
알 것도 같았지만 모른 척 묻는 다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베르타스가 희게 웃었다.
“힐렌튼 말일세.”
“모든 것은 각하의 뜻대로.”
“제국이 없어져도 상관없나?”
“저야 뭐……. 딱히 힐렌튼에 충성을 다한 것도 아니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말하는 그의 말에 궁금해졌다. 그의 말이 베르타스에게 어떤 의도로 비쳤는지 알긴 알까.
“딱히?”
“힐렌튼에 충성했다기보다는 각하께 한 거죠.”
“왜지?”
“힐렌튼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습니까.”
진중해지는 그의 말에 베르타스는 귀를 기울였다. 약간의 분노가 비치는 얼굴을 하고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각하를 만나기 전, 제가 뭘 했는지 아십니까?”
“알지.”
다한은 베르타스와 만나기 전에 산속을 헤매던 방랑 기사였다. 방랑 기사가 누구나 그렇듯 가문이 없어지고 떠돌게 된 그였다. 그의 가문은 한미한 자작 가문이었고 그의 누이를 탐내던 후작에 의해 가문은 사라졌다. 그의 누이는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으며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검을 들고 후작을 죽이려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베르타스를 만나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으며, 이번 반란으로 인해 후작의 집안이 몰락하자 그 집안의 사람들을 모두 도륙 낸 것도 다한이었다.
“그렇다면 뭘 망설이십니까.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될 것을요.”
등을 떠미는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를 따라 웃으면서 다한도 환하게 웃었다. 힐렌튼의 멸망을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적어도 황가의 몰락을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엄밀히 말하자면 힐렌튼은 멸망한 것이 아니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겠군.”
“당연합니다. 이제 황족이라고 남은 이는 각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지금의 황제가 계시지 않나.”
“아, 잠시 착각했습니다. 그분은 힐렌튼의 황제라는 느낌보다 라르헨의 황제가 될 분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던데?”
아무렇지 않게 딸을 안아 올린 다한에게 앙심을 품은 베르타스였다.
“그야 그때는 그분이 특별하신 분인 걸 몰랐잖습니까.”
“알았다면?”
“…… 그래도 안아드렸을 겁니다. 전 귀여운 사람에 약해서요.”
“아, 그래서 그 여자도?”
“각하!”
메릴에 대해 언급하자 발끈하는 다한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는 그였다. 그의 모습에 우물쭈물하는 다한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여자 때문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하긴, 내가 할 생각은 아니군.’
이실리스에게 꼼짝 못 하는 저 자신을 생각하면서 베르타스가 헛기침을 했다. 그가 할 생각은 절대 아니었다.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한에게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헥터 경에게 전하게. 힐렌튼의 국새를 가져오라고.”
“마음을 정하신 겁니까?”
“그래.”
‘이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정한 것이지만.’
아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한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였으니.
“라르헨의 황제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알려주겠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이실리스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힐렌튼이 그리 작은 국가는 아니었으니 흡수 통일에 절차가 필요할 터였다. 필요하다면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다. 힐렌튼의 제국민에게 보여주기식의 연출이 필요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라르헨이라고. 생각을 마친 베르타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서 쉬게. 내 따로 부를 것이니.”
“알겠습니다.”
다한이 나서는 것을 보면서 베르타스도 움직였다. 지금쯤 이실리스는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을 터였다.
‘알현실에 직접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는 그의 발걸음을 잡아채는 것이 있었다. 이실리스가 보낸 시종장이었다.
“힐렌튼의 섭정공께 인사 올립니다.”
“됐네.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시종장의 모습에 차마 묻지 못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몰려드는 시선이 이상했다. 그가 시선을 받았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정도가 심했다. 알현장의 앞에 서니 시종장이 외쳤다.
“폐하. 베르타스 힐렌튼이옵니다.”
“들라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