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7/161)

76화.

길을 찾던 그녀의 마지막엔 베르타스가 있었다. 언제든 그녀를 기다려주는 그가 있었다. 무엇을 하든 그녀를 감싸주는 그가 있었다. 옆자리만 내어달라는 그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찾아 나섰다. 그와 페일러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말을 가로챘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은 페일러스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라르헨의 황실 사람일세. 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축하하네, 베르타스!”

환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축하의 말을 던지는 페일러스의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자네…… 일부러…….”

한쪽 눈을 찡긋하며 제 말을 막는 그의 얼굴에 베르타스는 졌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녀가 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리스. 넌 너무 솔직하지 못해.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지지부진하고 있었을걸?”

“아니.”

“뭐?”

“아니라고. 그녀는 내게 마음을 열어줬어.”

그녀를 향한 말에 베르타스가 답했다. 눈을 크게 뜨는 페일러스의 얼굴에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난 그녀에게서 사랑한다는 소리도 들었네.”

황제는 부끄러움이 없다. 이실리스는 속으로 그것을 되뇌면서 아무렇지 않으려 애썼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페일러스가 말했다.

“사랑한다고 했다고, 네가?”

귀 끝이 빨갛게 변하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달아오르는 그 느낌에 이실리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기색에 페일러스가 장난스레 입을 열려 하자 베르타스가 막았다.

“그러니 그만하게. 자네.”

“왜 재밌는데!”

“선을 넘지 않았으면 하네. 이건 우리 둘의 일이야.”

“우리?”

“그래, 우리.”

황당한 표정으로 베르타스와 이실리스를 번갈아 보던 페일러스는 들고 있던 문서를 내동댕이치면서 외쳤다.

“안 해! 나 안 해!”

“뭐 하는 겐가?”

“나에겐 죽어라고 일을 시키고는 둘은 연애 중이었다고?”

“자네가 밀어준 거 아닌가!”

“아니야!”

“아니기는.”

부정하는 페일러스에게 베르타스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자네가 아니었어도 우리 둘은 운명이라 어떻게든 만났겠지만 그래도 자네 덕에 수월했네.”

“고마운 것을 알긴 아나?”

“왜 모르겠나.”

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멀리서 듣고 있던 시녀들과 시종들도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숙이는 것이 보였다. 뭔가 굉장히 겸연쩍어진 그녀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였다. 베르타스에게 별안간 손이 잡혀버렸다.

“고마우니 잘 살겠네.”

“무슨 헛소리를……. 라르헨의 황족이 잘사는 것은 당연한 거야!”

“그녀의 사촌이니 너에게 허락을 구하는 거지. 사촌을 내게 주게.”

“주긴 뭘 줘! 이실리스가 알아서 할 문제지!”

그랬다. 주긴 뭘 준단 말인가. 황제인 그녀를 달라니. 헛소리였다. 아직도 힐렌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베르타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픔에 몸을 움찔했지만, 그녀의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그를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너를 내게 다오. 베르타스. 내가 아껴주마.”

“뭐?”

“라르헨의 황제인 내가 그대에게 청혼하는 것일세. 그대를 나에게 줘.”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그와 그녀를 따뜻한 바람이 감쌌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나와……, 아니, 나에게 청혼하는 거라고?”

“그렇다네.”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감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기다렸다. 그가 그녀를 기다린 시간은 이보다 더 오래되었으니.

“나에게?”

“그래. 그대에게.”

“라르헨의 황제가?”

“그렇지.”

“이실리스 라르헨이?”

“그렇군.”

한 번 더 물으면 정신을 차리게끔 전격 마법을 쏠 생각이었던 그녀를 잡아챈 베르타스가 성급하게 입술을 대었다. 성급하게 시작된 입맞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술을 뗀 둘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페일러스도 웃었다.

기뻐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보니 이실리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제가 그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고.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녀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 말을 우연히 듣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 *

“소국의 섭정공 주제에 우리 폐하가 가당키나 해?”

“그렇지.”

“황태녀께서 마력을 발현한 것은 너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섭정공까지 부군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잖아.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도 우리 폐하가 좋다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좀 위험한 소리…….”

“왜, 내 말이 틀려?”

“아니, 그렇다기보단. 음……. 두 분 사이의 일이니 우리가 말할 것은 아니지. 윗분들에 대해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정원의 한쪽에서 쉬고 있던 이실리스의 귀에 들려온 소리였다.

“그야 그렇지만, 아쉬워서 그러지. 힐렌튼의 섭정공보다 칼리파 제국의 우스만 황태자님이 낫잖아.”

“확실히 그분이 많은 것을 하셨지만 폐하는 모르시잖아.”

“그렇지…….”

‘내가 몰라?’

한참 속삭이던 시녀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오수를 즐기던 그녀의 휴식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많은 것을 했으나 내가 모른다…….”

묘하게 우스만 칼리파에게 호의적인 황궁 사람들을 느끼고 있었다. 시종과 시녀들이 그런 것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저런 생각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다면 베르타스가 황궁에서 자리 잡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내부의 적이 가장 힘든 법이니까. 그래서였다. 국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국혼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베르타스를 마음에 두었다는 것은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국혼을 올리지 않으면 어떠한가. 이미 그녀가 베르타스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였군.”

시녀들의 그러한 태도는 그녀가 국혼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하는 국혼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한 국혼. 

생각하면 그랬다. 베르타스는 그녀의 곁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그 위치를 얻어냈다. 그런 그에겐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젠 그녀가 변했다. 베르타스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아이가 커가는 것을 보고 싶었고, 미래에 아이가 성장하여 황위를 물려받으면 그 모습을 그와 함께 지켜보고 싶었다. 국혼이, 이제는 더 이상 굴레가 아니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겠지.”

알고도 눈 감았을 것이다. 베르타스는.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힘든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그런 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 그런 사람. 그녀가 아는 베르타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냥 평범한 그런 사람.

‘그런 평범한 이에게 빠진 것이 독인가, 아님 득인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겠지.

* * *

그녀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아무리 물어도 입을 다무는 시종들과 시녀들이었다. 우스만 칼리파가 그녀를 위해 수고한 것이 있다면 합당하게 대우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한사코 만류하는 그네들로 인해 이실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엇을 숨기는 것인가. 

“아, 페일.”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실리스가 그를 불렀다.

“뭐야. 갑자기.”

“대체 우스만 칼리파가 뭘 했기에 황궁에서 그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가?”

그녀의 말에 페일러스가 숨을 들이켰다. 일부러 물은 것이지만 저리 정색을 하는 것을 보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다시 물으려는 찰나였다.

“칭찬?”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눈썹을 움찔하며 질문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베르타스가 있는 곳에서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우스만 칼리파가 그렇게 칭찬을 많이 들었나? 난 처음 듣는 이야긴데?”

어디 말해보라는 듯 페일러스를 향해 턱을 들어 올리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페일러스가 움찔했다. 그의 표정을 본 이실리스도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적막이 흐르자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해 보라니까?”

“나도 모르는데? 이리스. 넌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아…….”

저에게 돌아온 화살에 이실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덤터기를 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아무리 황제인 저여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직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게 말일세. 내가 잘못들은 모양이군.”

“잘못 들어?”

“그래.”

그럼 된 거 아니냐는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황제인 그녀가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으니 베르타스도 아무런 말을 하진 않겠지.

“나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거 같군.”

“뭐?”

“나도 어디선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고 하였네. 우스만 칼리파를 칭찬하는 그 말 말일세.”

예상이 빗나갔다. 다시 우스만 칼리파를 언급하면서 눈동자를 부릅뜨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 같았다. 단지 궁금하였을 뿐인데 질투심으로 눈을 빛내는 베르타스를 보니 마음이 울렁였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이 기분을 어찌해야 할까. 베르타스가 질투해 주는 것은 좋았으나 괜히, 잘못했다가 그녀가 그에게 져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래서 부군을 들일 때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것인가.’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 되새기면서 그녀가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자네는 어디서 들었는가?”

“그게…….”

“폐하. 황태녀께서……!”

베르타스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알뤼르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이실리스가 반갑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마력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무슨 헛소리인가. 이제 겨우 두 살도 안 된 아이가 무슨…….”

“얼른 와 보십시오!”

“알겠네. 내 지금 가지.”

베르타스의 질투를 피해서 그녀가 달려간 곳은 아이의 방이었다. 그곳에서 이실리스는 놀라운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아이가 마력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저도 방금 전에 보았습니다.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환희에 차서 말하는 알뤼르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아이를 향해 마력을 흘려보냈다. 천천히 흘려보낸 그녀의 마력을 아이가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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