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베르타스는 갑자기 느껴지는 마력에 놀랐다. 이실리스가 있는 알현장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그가 달렸다. 이실리스에게 행여 무슨 일이 생겼을까 두려웠다. 라르헨에서 황제가 위험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그녀가 다칠까 봐. 강인한 그녀였기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변수는 늘 존재하는 법이었다.
“…….”
눈앞의 알현장은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그는 빠르게 눈으로 안을 훑으며 이실리스를 찾았다. 다행히 무사히 서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에겐. 다행이었다.
침착하게 안쪽으로 들어서는 그를 이실리스가 불렀다.
“베르타스.”
“이게…… 대체.”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젓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도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지금 이야기할 것은 아니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주변을 정리하는 시종들과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들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자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에스코트하는 그의 손위에 손을 올리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섭정공.”
“네.”
“국혼을 서두르지.”
“……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묻고 싶은 것을 숨긴 채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기에 캐물을 수도 없었다. 페일러스가 알뤼르를 챙기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움직임에 알현장을 빠져나갔다. 알현장에서 멀어지자 쓰러지듯 기대오는 이실리스의 몸을 부여잡고 베르타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대.”
“잠시 이대로 있어 주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대로 있어 달라는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는 기다렸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던 이실리스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에 서린 슬픔에 열리려던 입을 다물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그녀가 그에게 속삭였다.
“베르타스. 그대는 날 떠나지 않을 거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늘 이실리스가 그의 손을 놓을까 전전긍긍하는 그에게 그녀의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떠나긴 누가. 그녀가 그를 떠난다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곁에 붙어있을 생각이었던 그가 그녀의 몸을 힘있게 끌어안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대?”
“조금 이따가…… 하지.”
그들 뒤를 따라오는 베루스 공작의 기척을 느낀 이실리스가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공작.”
“폐하께 드릴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좋네.”
베르타스의 얼굴을 보고 머뭇대는 그의 행동에 그녀가 말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둘을 남겨둔 채로 베르타스는 자리를 피했다. 이실리스가 안전하였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여겨졌지만, 저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게 싫었다. 물론 그녀가 황제이고 국가의 기밀에 대해서 다른 제국의 섭정공에게 알리지 않아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은 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그냥 싫었다.
‘이제 곧 라르헨으로 편입될 영토인데.’
힐렌튼은 베르타스의 국혼과 함께 라르헨과 합쳐질 예정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기도 했고. 곧 그녀의 옆자리에 서게 될 것인데, 그녀가 국혼을 서두르자고 말했는데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 것일까. 베르타스는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춘 자리에서 생각했다.
“이래 봐야 결론이 나는 것은 없지.”
그랬다. 지금의 상황은 그가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이실리스, 그녀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놓여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마음이 불안했던 것이었다.
“결국, 나도 그녀를 믿지 못한 것인가.”
저보다 조건 좋은 남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힐렌튼의 영토를 가지고 그와 그녀의 아이를 황제 위에 앉혀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우스만 칼리파가 자리하고 있었고, 궁의 시녀들은 그를 배척했다. 아득바득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처음에 아이만 필요하고 그는 필요 없었다는 이실리스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아직도 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저와 국혼을 하자 하였고, 아이의 곁에서 아이가 옹알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함께 잠들기도 하지 않았나. 그녀가 바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그가 아이와 함께 있어 주면 되었으니.
베르타스는 시녀들의 시선에도 꿋꿋하게 버텼다. 그가 머무는 처소에서 아이의 방이 가까워 자주 드나들었다. 어떤 때는 서류를 들고 아예 그 방에서 업무를 살필 때도 있었다. 종이에서 먼지가 날린다며 저에게 타박하는 시녀들도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먼지를 조금 날리는 것이 아이를 잃는 것보다 나았다. 곁에 있으면서 커가는 아이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저를 향해 방싯거리는 아이를 보면서 그리고 이제 제법 말하고 걷는 아이를 보면서 이실리스도 이 기쁨을 느꼈으면 했다.
“엄마라는 말보다 아빠라는 말을 먼저 하다니.”
물론 그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듣기엔 그렇게 들렸다. 태어난 지 2년이 되어가는 아이였지만 발음이 제법 또박또박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페일러스였다.
“베르타스.”
지친듯한 표정의 페일러스를 보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알현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알려 하지 말게. 너무나도 피곤하니. 내가 아니라 이리스가 말해 줄 걸세.”
“말해줘?”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페일러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안 할 수도 있겠군.”
“말을 안 한다고?”
“밖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 이야기라. 너는 아직 라르헨의 황실 사람이 아니지 않나.”
“아직?”
“아, 부군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군. 황실의 사람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르지.”
선을 긋는 페일러스의 말에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그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찌르니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화가 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결국,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시렸다.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안도했다.
“황제의 부군이면 황실 사람이 맞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페일.”
이실리스였다.
* * *
“자네는 모두 알고 있었나?”
“그러합니다.”
“그런데 왜 여태껏 입을 다물었지?”
“선황 폐하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작이 수호자가 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아버지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약한 마력을 지닌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환영마법을 사용하여 전쟁터에 나간 적도 많았고, 부족한 어머니의 마력을 대신하여 수도와 제국의 결계에 마력을 보완한 것도 아버지였다고.
“아버진 왜 어머니를 그대로 두신 건가. 황족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텐데.”
“그분의 의도를 판단하긴 어려우나 저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소견으론?”
“선황 폐하를 너무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그게 사랑이라고?”
“그렇습니다.”
“그게 어찌 사랑인가. 그것은 집착이 아닌가!”
그녀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는 법입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놓아줬어야 하는 것이 맞는 걸세!”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늘 불안해 보이는 어머니의 태도. 저를 멀리하면서도 저가 그녀를 싫어할까 두려워하는 태도. 어딘지 미묘하게 달랐던 전쟁터에서의 어머니. 마지막으로 항구도시에서는 늘 모습을 드러냈던 아버지.
‘초대 황제의 마력과 충돌했던 거였군.’
그래서 그 도시에서는 어머니로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기억엔 늘 자상한 아버지로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외유를 함께 나가주는 자상한 아버지.
“폐하. 한쪽으로 생각이 치우치면 안 됩니다.”
“자네는 나의 신하인가 아니면 그의 신하인가.”
거침없이 제 아비를 그라고 칭하는 그녀에게 베루스 공작이 잠시 얼굴을 들었다 말했다.
“저는 늘 폐하의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후견인이기도 합니다.”
“후견인?”
“그분께서 평범한 평민으로 분하여 찾아오셨을 때, 저는 그분의 강력한 힘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폐하도 마찬가지십니다.”
“내가 힘이 없었다면?”
“그럼 저는 폐하를 모시지 않았을 겁니다.”
단호하게 떨어지는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저이가 원한 것도 결국 황제로서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그녀였다. 이실리스 라르헨. 라르헨 제국에서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황제 중 하나. 황제인 그녀를 원한 것이었다.
‘뭘 바랬는지.’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신하와 군주의 관계보다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반역자가 할 법한 소리를 하는군.”
“폐하…….”
“되었네. 그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이번 일은 덮겠네.”
그녀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인 선황께서 그를 벌하길 원하신다면 내가 그렇게 할 걸세.”
저를 농락한 것은 용서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를 그렇게 취급한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제국의 혈통이 아니라고 해도 황족인 아버지의 반려였다. 아버지의 그 태도는 반려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선황께서는 이미 그분을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를 일이지.”
베루스 공작의 말에 잘라 답하면서 그녀가 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절하고 나서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아버지가 부러웠다. 그를 따르는 충직한 신하가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질투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저에겐 저런 이가 없는가. 나는 무엇이 다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