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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5/161)

74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당장 부황에게 알리겠다며 나가려는 그녀를 시녀장이 팔을 붙들고 말렸다.

“가서 어쩌시려고요. 제가 황족이 아니다. 이러시렵니까? 이미 그 황족은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국민인 자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부황의 보호를 받아 살면서 이런 짓을!”

“저에게 욕하셔도 좋습니다. 저를 보면서 그게 떠오르신다면 제가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전하. 전하는 이 나라의 황족입니다.”

“피가 이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황족이야!”

“황족이 별겁니까!”

화를 내며 말하는 시녀장의 모습에 아일라가 당황했다. 마력만 있다면 황족이 아니어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문제가 없다고. 이미 제왕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것엔 문제가 없지 않냐고 계속해서 말하는 그녀의 말에 아일라는 설득당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두려움에 입을 닫았다는 것이 더 맞겠다. 

시녀장을 고향으로 내려보낸 그녀는 그 뒤로 이를 악물었다. 여동생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타고난 마력이 적어 계속해서 마력을 상승시키기 위한 수련을 했다. 물론 타고난 마력이 강한 자를 이길 수는 없었으나 라르헨의 마법사들은 황족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경외했다. 그게 무서워서 계속 노력했다. 저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저들에게 저가 황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약한 마력으로 황제가 되려 한다는 욕을 들을까 봐 아일라는 노력했다. 아득바득.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앞에 타르토스 헬베르가 나타났다.

* * *

“죽여 버리고 싶었지. 갈기갈기 찢어서.”

발버둥 치는 제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아일라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그녀가 늘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왔구나.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체념한 듯 눈을 감는 그녀의 모습에 타르토스가 희게 웃었다.

“그러나 쉽게 죽일 순 없지.”

더러운 것을 떨쳐내듯 그녀를 팽개치는 그의 행동에 알현장 바닥에 굴렀다. 엉망이 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저벅저벅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덜덜 떠는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타르토스가 말했다.

“제법 반반하게 생겼군.”

입술을 혀로 핥는 남자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저항하며 그의 혀를 깨물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력의 차이란 이런 것이었다.

‘황족이…… 이런 것이었나.’

이런 마력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짓누르는 마력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면서 아일라는 그렇게 침잠했다.

제 옆자리를 차지한 타르토스의 아이를 갖고, 부부로 살았다. 이실리스에게 애정을 퍼붓고 싶었지만 타르토스의 눈치에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제가 관심을 두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애는 그 때문에 제가 낳은 아이에게 애정을 주지 못하고 늘 거리를 두었다. 제 모습으로 변하여 이실리스를 데리고 전쟁터를 전전하는 그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아일라가 몸을 떨었다. 멀어진 황궁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부족한 나를 용서해라. 이실리스.”

* * *

아무 말이 없는 타르토스에게 이실리스가 다시 물었다.

“황위라도 찬탈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나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지.”

단호한 거절에 이실리스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렇다면 왜 온 것인가.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돌변한 그의 태도는 그녀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거기다 마력탄이라니. 저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서 마력탄을 힐렌튼에 넘겼다니. 저런 말이 어디 있는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왜 오신 겁니까?”

“아일라를 찾으러 왔다.”

“어머닌 떠나셨습니다.”

“보니 그런 것 같군.”

“아버지!”

“네가 아일라의 피를 더 짙게 이어받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구나. 그랬다면 내가 너에게 더 다정하게 대해 주었을 텐데.”

“죄를 묻겠습니다. 어쩐지 후작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반역을 준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역?”

그녀의 말을 듣던 타르토스가 날 선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건 개 주제에 주제넘은 짓이었다. 나는 그에게 힐렌튼으로 마력탄을 넘기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지시한 적이 없다.”

“마력탄을 다른 곳으로 반출한 것은 엄연히 불법입니다. 아버지.”

이실리스도 지지 않았다.

“그게 제국에 등록된 마력탄이었을 경우에 그렇지. 그건 내 마력으로 만든 거다.”

차갑게 떨어지는 타르토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치켜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라르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행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

“그렇습니다.”

“용서라고 했느냐? 네가? 나에게?”

“아니면? 라르헨의 황제는 나 이실리스 라르헨. 그대가 아닐세.”

여태까지의 존대를 내팽개친 이실리스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말했다. 급변한 그녀의 분위기에 타르토스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내가 가르친 너 답지.”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는가?”

“누가 너에게 장난이라고 했느냐. 그럴 리가. 힐렌튼에 넘긴 마력탄은 나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것. 그것엔 하나의 장치가 되어있다. 내 마력이 아니라면 작동하지 않아.”

이미 이실리스와 타르토스는 서로의 마력으로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이실리스가 먼저 일으킨 마력을 타르토스가 저지하고 있었다. 타르토스의 말에 서서히 잦아드는 마력을 느낀 페일러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긴장된 상황에서 그들이 일으키는 마력의 파동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나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으킨 일이라는 건가?”

“너는 너무 쉽게 황제의 위에 올랐지. 방해하는 자가 아무도 없이 오른 그 자리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내가 준비했다.”

타르토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제 아비라는 자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부모라면 제 자식에게 이리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의문 어린 그녀의 표정을 본 타르토스가 웃었다.

“왜, 내가 이러는 것이 이상한가?”

“이상?”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니 말이지. 그런 멍청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지 말아라. 나는 황족으로 태어났으나 이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마침내 그 자리를 쥐려고 했으나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그 자리를 포기했다. 그래서 갖지 못했는데 너는 황족이라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누리고 자라지 않았느냐. 그런 너에게 시련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말을 멈춘 타르토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사랑하는 나의 부인을 이곳에 두고 계획을 세웠지. 너의 발전을 위해서. 그랬는데 깜찍한 내 부인께서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이곳에 돌아왔더군. 나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어릴 적 내가 너의 납치를 사주한 것처럼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두려웠던 모양이야.” 

그제야 이실리스는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저를 질투했다는 것을. 황족으로 타고나 모든 것을 누리고 자란 그녀를. 모든 것을 가지고 자란 그녀를 질투한 것이었다. 거기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것도 한몫했겠지. 그뿐이랴. 그녀를 납치하면서 지금의 세력을 구축했겠지. 귀족들에게 그런 말을 흘렸을 것이다. 보아라 황족도 아무것도 아니다. 마력만 뽑아도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실리스가 표정을 바꾸었다.

“그것은 그대가 판단할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누구도 나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이 라르헨의 황좌의 위에 오른 이가 가질 수 있는 권리.”

“제대로 배웠구나.”

“그리고 그대의 방만한 행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실리스의 말에 주변이 얼어붙었다. 페일러스는 숨 쉬는 것을 잊으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잘못하면 알현장에서 마력이 충돌할 수도 있었다. 이실리스의 몸에서 이는 붉은 마력을 보던 타르토스가 웃었다.

“여기서 너와 내가 다투면 황성이 날아갈 텐데?”

“폐하께 무례하지 마십시오!”

알뤼르의 말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붉은 마력으로 흔들리는 그를 향해 타르토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주인도 못 알아본 황궁의 개 주제에 나서지 마라.”

“수석 마법사를 내려놓게.”

이실리스의 마력이 그를 휘감았다. 그러나 타르토스의 마력은 역대 황제 중 강력한 마력을 타고났다고 칭송받는 그녀의 마력을 상회하는 마력이었다.

“넌 나서지 마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알현장의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샹들리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밖에 있는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빠져나간 마력으로 휘청인 이실리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 내 제국의 신하를 놓으라고 했다!”

부족한 마력을 결계에서 끌어당기면서 이실리스가 마력을 퍼부었다. 그녀의 마력에 짓눌린 타르토스가 알뤼르를 내려놓고 마력을 회수했다.

“제법이구나.”

“이실리스!”

알현장의 문이 부서지며 문쪽에서 다급히 그녀를 부르는 아일라의 외침이 들렸다. 그녀의 어머니 선황이 돌아온 것이다.

아일라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마력을 쏟아부은 이실리스를 막지 않은 타르토스였다. 그녀의 마력이 쏟아지면서 타르토스가 피를 토했다.

“컥!”

“타르토스!”

그녀에게로 다가오던 아일라가 타르토스를 향했다.

“어머니! 비키세요!”

“이실리스. 이게 무슨 짓이냐!”

“비키라고 했습니다!”

황궁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더 멀리 도망치려다가 타르토스의 마력을 느끼고 돌아온 아일라였다. 그녀가 아는 타르토스는 그녀 자신이 없는데 이실리스를 내버려 둘 이가 아니었으니까. 마력을 운용하는 타르토스의 어떤 특별한 ‘작업’으로 인해 아일라는 타르토스의 마력을 느끼고, 타르토스는 아일라의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서둘러 돌아온 아일라의 눈앞에 보인 것은 타르토스를 핍박하는 이실리스 그리고 피를 토하는 타르토스였다.

“난 그럴 수 없다.”

제 앞을 막아선 아일라의 뒤에서 피가 흐르는 입을 옷으로 닦아 내며 웃는 타르토스를 정면으로 바라본 이실리스가 다시 말했다.

“비키라고 하였습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험하게 한 자입니다.”

“그가 그랬을 리 없다!”

아일라의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리 감싸고 도는 것인가. 그녀가 잠시 망설이던 사이 타르토스가 아일라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이동마법을 시전하여 사라지려는 그의 마력을 이실리스가 잡아채려는 순간이었다.

“폐하!”

베루스 공작의 부름에 그녀가 흠칫했다. 난장판이 된 알현장 안으로 들어온 그가 타르토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타르토스도 베루스 공작에게 시선을 흘긋 주더니 아일라를 끌어안은 채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공작!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분노에 찬 이실리스의 외침에 베루스 공작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대체……!”

그녀의 말에 허리도 들지 않으면서 계속 기다리는 공작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기에 그가 저렇게 나오는 것인가.

“마음이 아프신 분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렇다고 해서 황위를 이은 나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야!”

“압니다. 폐하. 그러나 제게는 아프신 분입니다.”

숨을 몰아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그녀를 향해 계속해서 사정하는 공작이었다. 알현장의 문은 아일라의 마력으로 날아가고 샹들리에는 산산조각이 났다. 정신을 잃은 알뤼르를 페일러스가 챙기고 있었으며 알현장 밖에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에게 시선을 던진 이실리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네.”

“감사하옵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에게 충성한 공작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알현장 앞에 놀라 달려온 베르타스의 얼굴이 보였다. 처참한 내부에 눈을 크게 뜬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를 걱정해 달려온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니, 그 모습에 위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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