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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4/161)

73화.

마력을 일으켜 눈동자 색을 바꾸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말을 잃었다. 눈동자의 색마저 속인 것이었다니.

“제국에서 눈동자 색을 바꾸는 것은 불법입니다.”

“아니지. 불법이라고 정해지진 않았다. 단지 관습일 뿐.”

그 관습이 정형화되어서 라르헨의 제국민이라면 누구도 눈동자 색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에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라르헨의 제국민들이 지키는 관습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면서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눈썹을 움찔했다.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었나. 그녀에겐 언제나 웃는 모습만을 보였던 그인데. 

“아일라는 어디 갔느냐.”

“어머니를 왜 여기서…….”

“이제는 선황 폐하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한쪽 눈썹을 꿈틀하는 그의 태도에 흠칫한 이실리스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타르토스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자신이 알던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았다. 저의 기억 속에 있던 아버지는 늘 자상하고 저를 위해 웃던 사람이었는데 저 이는 누구인가. 머뭇거리던 페일러스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일러스. 아직 살아있군. 죽었을 줄 알았더니.”

인사하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악담을 던지며 타르토스가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딸아.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더냐. 너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이 아닌 것을 살려두면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아버지 그 말은…….”

그 말은 어머니인 선대 황제가 전쟁터에서 했던 말이었다. 기억에 혼란을 느끼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이상 상태를 알아챈 페일러스가 옆에서 부축했고, 부축하는 그에게 기대어 천천히 생각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말은 선대 황제인 어머니가 한 말이 맞았다. 첫 전쟁터에서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 그렇군.”

그녀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눈치챈 타르토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나와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실리스.”

흡사 황제와 같은 태도에 베르타스가 눈을 찌푸렸다. 아버지라고 했지만, 태도가 불손했다. 심지어 선황인 그녀의 어머니도 이실리스에겐 한 수 접어줬건만.

“베르타스 힐렌튼과 국혼을 한다지?”

“거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그가 힐렌튼을 정리했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아쉽군.”

“뭐가 말씀이십니까?”

“그가 나서서 힐렌튼을 점령하는 바람에 마력탄이 갈 곳이 없어졌으니.”

타르토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이실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게 지금 제 아비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단 말인가.

“그럼…… 여태까지 마력탄을 제공한 것이…….”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시련 없는 황제는 성장할 수 없는 법이니.”

“아버지!”

타르토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소리높여 그를 불렀다. 저것은 국가적인 반역이었다. 감히 라르헨의 국부였던 자가 라르헨의 국익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어머니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셨답니까?”

“그 사람이 알아봤자, 어쩌겠느냐.”

싸늘하게 눈을 빛내는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직감했다. 모든 일은 저 사람이 벌인 일이었다.

‘아…… 어머니.’

저는 왜 어머니를 미워하였나. 왜 어머니를 피하기만 했던가. 한 번쯤 터놓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가 가졌던 아픔,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이는 저뿐이었는데! 물밀 듯이 밀려드는 생각에 이실리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모든 태도가 이해되었다.

“이제 와서 황제의 위라도 찾으시겠다는 겁니까? 정당한 황손으로?”

* * *

아일라 라르헨. 황족의 피를 타고난 그녀는 마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황족의 피를 타고난 여동생보다 간발의 차로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평온한 나날이었다. 가끔 마력이 부족하여 종일 침대 위에 있는 날도 있었지만 행복했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다 라르헨의 제국민들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남자가 찾아오면서 모든 상황이 변했다.

“타르토스 헬베르입니다.”

평민의 몸으로 소드마스터의 오른 자였기에 그를 치하하기 위해 황궁으로 불렀다. 그가 제국의 국경을 지키고 마물로부터 고통받는 제국민들을 구해주었다고 칭송이 자자해, 그녀의 신하들이 그를 불러올렸다. 그녀가 원하지도 않았건만. 그러나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녀의 제국을 위해서 싸운 자이니. 그리고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불행은. 독대를 요청하는 그를 위해 주변의 모든 이를 물리고 마주했던 그 순간 남자는 강력한 마력으로 그녀를 옭아매었다.

“내가 내 자리를 차지한 여자를 만나면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아나?”

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남자에게 순식간에 끌어 올려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남자는 그냥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마검사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대마법사이자 소드마스터. 그가 바로 타르토스 헬베르였다.

“이것 좀…….”

그의 마력에서 벗어나려고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은 그의 마력에 비하면 정말 자그마한 것이었다. 붉게 빛나는 그의 마력을 보면서 그녀는 직감했다. 그가 아버지의 그리고 어머니의 잃어버렸던 아이라는 것을. 

* * *

그녀에겐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그녀가 그 비밀을 눈치챈 것은 처음 그녀의 진명을 넣어놨다는 신전을 방문했을 때였다. 황족이라면 누구나 진명을 적은 책이 대신전의 비밀의 방에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은 아일라가 아무도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신전을 향했다. 신전에서 방을 지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대신관도 아버지의 부름으로 자리에 없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그 방 앞에 서서 문을 연 그녀는 처음엔 당혹감을 느꼈다.

“이게 왜 안 열리지?”

황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방이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미약하게 전격 마법이 흘렀다. 움찔한 그녀가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에 숨었다. 달려온 신관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누구냐!”

“무슨 일이지?”

신관들의 웅성거림에 서둘러서 신전으로 돌아온 대신관이 물었다.

“방에 누군가 들어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황족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괜한 헛걸음을 하였군.”

대신관의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황족이 아니라니. 내가? 여동생보다 마력이 뛰어나 황위를 이어야 하는 내가 황족이 아니면 누가 황족이라는 것인가.

‘내가 황족이 아니야?’

마음속에 의문을 품은 채 돌아온 황궁. 방에서 고심하던 그녀가 방에 들어온 시녀장과 마주했다. 그녀는 늘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이었다. 저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라고 들었으니 저 사람은 무언가 알고 있겠지.

“시녀장.”

“어딜 다녀오십니까. 전하.”

공손하게 저에게 고개를 숙이는 시녀장에게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그녀가 물었다.

“내 황족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네.”

“네?”

“황족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단 말입니까?”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하는 시녀장의 태도에 아일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녀장의 본래 성격대로라면 조용히 웃으면서 허튼소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니. 어딘지 모르게 당황하는 모습의 그녀를 침잠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일라가 일부러 말했다.

“나는 늘…… 의심을 했네. 아버지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을 타고났지만 라르헨의 황족이 지니고 있다는 강력한 마력도 없고, 눈동자 색도 그리고 머리카락 색도 황족의 고유한 그것과는 다르지 않나. 거기다 마력마저…….”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서 눈시울을 붉히는 시녀장을 보고 아일라는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저이가 저에게 숨기는 것은 무엇인가.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내가 황족이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는 어디에…….”

“전하! 다 제 잘못입니다!”

시녀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녀를 경악하게 했다. 황후가 아이를 가졌을 그때, 시녀장도 마법사와 정분이 나서 그의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갖자마자 모른 척 돌아선 마법사에게 상처 입었다. 혼자서 아이를 낳을 생각에 너무 두려웠고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가 들리면 죽을 것이 뻔했기에 그녀는 펑퍼짐한 옷으로 부푼 배를 가리고 일했다. 다행히 황후의 눈에 들어 그녀의 측근이 되었다. 

귀족이나 몰락 귀족인 그녀를 불쌍히 여긴 황후는 그녀에게 잘해주려 했었다. 유약한 황후의 마음을 파고들어 황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녀였다. 그녀의 산달이 가까워지자 마찬가지로 황후의 산달도 가까워졌다. 어린 그녀는 아이가 나오려는 것도 몰랐다. 마음 약한 황후가 측근으로 삼은 유일한 시녀였기에, 황후가 아이를 낳는 곳에 불려갔다. 그녀에게 황후가 많이 의지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 안엔 산파와 그녀 그리고 황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후는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남자아이였다. 산파는 황족의 성별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황후를 돌보았고, 그녀는 아래가 터지는 것을 느끼며 강렬한 고통과 함께 아이를 낳았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통증을 버텼다. 무언가 주륵하는 느낌에 제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는 그녀에게 산파가 소리쳤다.

“뭐 하는가! 나가서 황의를 부르지 않고!”

“산파님…….”

얼굴색이 좋지 않고 식은땀이 흘렀다. 망설이는 그녀를 바라보던 산파가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황후는 정신을 잃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 잠시 황후를 들여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갓 태어난 황족에게로 향했다. 황후의 아이는 요람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치마 속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이는 찬 바닥에 누워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순간 억울했던 그녀는 아이를 바꿔치기해 버렸다.

그녀의 아이를 요람에 누이고 황족을 천에 싸서 숨겼다. 황족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자 그녀는 몰래 밖으로 나갔고 황성 밖으로 빠져나가 한 신전에 아이를 맡겼다. 그리고 기억에서 지웠다. 라르헨 황족의 폐쇄적인 관습이 낳은 불행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아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고 머리색도 황제와 같았다. 황제도 마력이 미미해 붉은 머리카락이 아니었기에 속일 수 있었다. 마력을 가진 아이가 황태녀로 자라고 아무 문제 없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상황에 안도하면서 그녀는 아이의 곁을 지켰다. 아이의 유모로 그리고 시녀장으로 승진하며 곁에서 애정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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