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전령이 서둘러 나서는 것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생각했다. 대체 누구인가. 힐렌튼과 라르헨의 사이를 오가면서 두 나라에 긴장감을 심어주려 했던 자는. 전대 황제와 황태자는 베르타스가 반역을 일으킬 때를 대비하여 마력탄을 사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가 품은 역심을 몰랐으니. 그렇다면 라르헨을 공격하기 위해 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마력탄이 쓰레기였다니.
“대체 누굴까.”
정원의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베르타스의 얼굴이 굳었다.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질색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급하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페일러스의 정보력이 필요했다.
* * *
며칠 후, 이실리스는 다시 페일러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왜 자꾸 불러.”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얄미운 얼굴을 때려주고 싶었다.
“자료는 어찌하였나 페일러스.”
“너에게 준 것이 다야.”
“그 전의 자료는?”
“그것을 조사한 자는 내가 알아낸 만큼 알 수 없지. 우리 조직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지 않나. 그들이 조사해오면 내가 수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야. 그러니 네가 걱정하는 것이 밖으로 새어나갈 리는 없어.”
“네가 배신하는 경우를 빼고는.”
“그렇긴 하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웃으면서 페일러스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입을 다물지.”
“그래야 할걸세.”
그대로 서류에 눈을 돌리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를 너무 믿는 것 아니야?”
“너를 믿는 것이 아니라 네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왜지?”
“넌 생각보다 너의 가족들을 사랑하니까. 그들이 수도에 있는데 내가 굳이 너를 강제할 필요는 없지. 가족들을 아낀다면 입을 다물게 분명한데.”
“이실리스!”
“목소리를 낮추게 페일.”
아무런 표정 없이 페일러스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건방진 그대를 살려두는 것도 단 하나. 이 자리에 욕심이 없기 때문이야. 네가 아니고 너의 어머니였다면 말이 달랐겠지.”
“우리 어머니도 황실의 피를 이었어!”
“그러나 포기했지.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자보다 마력이 약한 자가 무슨.”
그녀의 말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페일러스가 불퉁하게 말했다.
“나를 화나게 한 뒤, 반응을 보려고 했다면 아주 성공적이군.”
“반응을 보려고 했는데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아 아쉽군.”
“난 정말로 너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 없다니까?”
“내 자리는 아니어도 내 딸의 자리를 넘볼 수 있지 않나.”
이실리스의 말에 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얼굴로 페일러스가 눈을 돌렸다.
“너와 베르타스가 버티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이실리스.”
“그러니 너도 장담하는 것이 아니야.”
“설령 우리 어머니께서 너의 딸을 노린다고 한다면 내가 나서서 뜯어말릴 걸세. 너 하나로도 벅찬데 베르타스라니. ‘그’ 베르타스 힐렌튼이라니. 절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네.”
몸을 떠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넌 가끔 보면 나보다 베르타스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군.”
“네가 속고 있는 거야 이실리스. 그자보다 음흉한 자는 없어.”
“무슨 헛소리를.”
페일러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저에게 순하기만 한 그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제 마음도 사랑한다는 그가 저에게 다른 모습을 숨길 리 없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믿으라고. 어차피 사랑에 빠진 너는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릴 테니.”
“헛소리를.”
“됐어. 됐어.”
손을 내젓는 페일러스의 모습이 불손했지만 이실리스는 내버려 두었다. 모든 것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른 것이었으니. 설령 베르타스가 음흉한 자라 할지라도 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였으니 어떠한가. 그런 점도 사랑스러운 것을. 저에게 내숭 떠는 베르타스라니.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이실리스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초승달같이 아름답게 빛났다.
“그나저나 어쩔 생각이야.”
“뭘 말이지.”
“선대 부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아?”
“아버지의?”
페일리스가 전해온 사실 중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아버지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고 그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지금, 굳이 기억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서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지만 그뿐. 다시 사라진 어머니와 소식도 알 수 없는 아버지를 신경 쓰기에 그녀는 너무 바빴다. 생각할 여력이 없어 밀어둔다는 것이 맞았다.
“뭐 하러.”
가볍게 말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페일러스가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그…… 네가 선대 부군을 많이 좋아했으니까.”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은 것을. 끄집어내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지.”
“하긴.”
이실리스의 말에 긍정하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대로 평화로운 상황이 계속되다가 베르타스와 국혼을 올리면 그보다 더 완벽한 마무리가 어디 있을까. 아이를 가지기 위해 움직였던 그녀가 국혼을 올린다. 부군은 필요 없다고, 국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녀의 곁에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선다니.
그때였다. 계속해서 미소를 던지던 이실리스는 바깥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알현장 안에 있던 페일러스도 마찬가지였다. 라르헨의 황궁에서 누가 저리 경망스럽게 뛰는가.
“폐하!”
그들의 대화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알뤼르로 인해 끊어졌다. 무례한 그의 행동에 이실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알뤼르의 뒤에서 들어오는 사람으로 인해 그녀의 시간이 멈추었다. 페일러스도 입을 떡 벌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선황제의 부군이자 이실리스의 아버지인 타르토스였다.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의 몸이 휘청였다. 그 모습을 본 페일러스도 부축을 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의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알뤼르가 부축하려고 일어섰으나 이실리스의 손짓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간신히 옥좌의 팔걸이를 잡은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
거의 들리지 않을 속삭임이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페일러스의 보고를 통해서 죽지 않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아버지인 타르토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복잡해진 이실리스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겉으로 태연한 척하려 노력했으나 성공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상황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이실리스 뿐이 아니었다. 페일러스도 마찬가지였다. 이실리스에게 아무렇지 않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던 조금 전의 저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다. 저런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니.
점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바로 잡으면서 이실리스가 앞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다르게 목소리는 떨리지 않고 나왔다.
“아버지.”
조금은 힘있게 내뱉어진 그 목소리에 안도한 이실리스가 계속 생각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보고 싶었다고? 대체 지금까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냐고? 아니면 왜 저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모든 것을 감추고 사라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끝까지 어머니를 감싸주어서 고맙다고? 아니, 저를 버려두고 간 이유가 무엇이냐고? 모든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저의 얼굴에 닿아온 차가운 시선에 이실리스는 달싹이려던 입술을 다물었다.
뭔가 제 기억 속의 아버지와 달랐다. 무심한 얼굴. 심드렁한 표정, 차갑게 굳은 얼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던 그녀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긴장되어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괴리감에 이실리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저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저 이는 누구인가. 누구인데 나의 아버지의 탈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저런 시린 눈을 한 자가 그녀의 아버지일 리 없었다. 그녀를 향해서 항상 따뜻하게 웃어주던 그였는데 그가 저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줄이야.
“잘 있었느냐.”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에 저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아버지가 맞았다. 그런데 저 눈동자 색은 뭐란 말인가. 군청색이라니. 그녀의 눈동자 색과 꼭 같은 색을 바라보면서 이실리스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너무 낯설게 변한 아버지의 모습에 그녀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애써 가다듬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페일러스의 말에 안일하게 답했던 저 자신을 욕하면서 그녀는 자세를 바로 했다.
왜 지금에 와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여태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아버지가 지금에 와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의 등장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는 저는 황제였다. 아슬아슬했던 그녀의 분위기는 단박에 제자리를 찾았다.
돌변한 그녀의 기세에 타르토스가 눈을 빛냈다. 차게 얼어있던 그의 눈동자가 불꽃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이실리스도 지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니라 흡사 일생일대의 적을 두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부딪치는 것을 본 페일러스가 우물쭈물하며 몸을 움직였다. 나가고 싶었으나 시기를 놓쳐 나가지 못한 저 자신을 책했다. 페일러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실리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눈동자 색은 왜 그러합니까.”
“아, 깜박하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