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161)

71화.

“그런 것인가…….”

“이실리스. 넌 너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없어. 너만 한 황제도 없으니 이제 그만 자격지심을 버려.”

“자격지심이라니. 내가 그런 것을 가질 리가 없지 않나.”

그녀의 말에 페일러스가 웃었다. 

“알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는…….”

“날 빼고 비밀 이야기라도 하나 보군.”

갑자기 들이닥친 베르타스를 본 그녀가 방음마법을 거두었다. 소리 없이 들어온 것을 보니 시종의 제지를 피해 들어온 것 같았다.

“어서 오게.”

“자네는 왜 자꾸 이실리스와 독대를 하는 거지?”

“왜, 질투하나?”

페일러스의 장난기 어린 어조에도 베르타스의 날 선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페일러스가 웃자 베르타스가 불퉁하게 이실리스를 향해 말했다.

“그대가 사촌과 너무 친한 것은 싫어.”

“왜, 질투하는가?”

“그래. 질투해. 난 그대의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을 질투해.”

“우리 아이도?”

“……우리 딸 빼고.”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실리스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그에게 그녀가 속삭였다.

“나도 그대의 시선에 닿는 것을 질투해.”

그녀의 말에 등잔만 하게 눈이 커지는 페일러스를 슬며시 옆눈으로 바라본 이실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면서 중얼거리는 페일러스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그녀가 베르타스에게 손짓했다. 이실리스의 손짓에 바로 앞으로 다가온 베르타스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닿아온 온기에 몸을 흠칫할 뻔했으나 애써 내리눌렀다. 불꽃을 품은 눈동자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베르타스. 지금은 사촌 간의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 나가 주겠나?”

“난 그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때론 모른 척 덮어두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일세.”

“그대가 원한다면.”

재빠르게 다가와 이실리스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페일러스가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빼주게.”

그 말을 끝으로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는 페일러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눈을 빛냈다.

“그대, 그대의 사촌이 도망치는데?”

“내버려 두지.”

“오늘 할 일은 이제 끝난 건가?”

“아직 볼 서류가 남아있지만, 그대에게 내어줄 시간은 있군.”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허리를 숙이면서 손을 내미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이실리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렸다. 손을 잡고 알현장을 나오는 그 우아한 모습에 시종들과 시녀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지나치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이실리스. 최근에 아이를 보았나?”

“당연히.”

“머리카락 색이 점점 붉어지고 있어.”

“나도 알고 있네.”

아이의 마력이 발현되면서 머리카락 색이 점점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황족이 마력을 발현하면 늘 붉은색으로 변했다. 아닌 황족도 있지만, 마력이 강할수록 머리카락의 색이 붉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머리카락도 타오를 정도로 붉지 않은가.

‘아버지의 머리카락 색도 붉었지.’

페일러스가 넘겨준 자료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녀가 걸었다. 베르타스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허술하게 넘겼다.

“이실리스!”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뭐라 하였는가.”

“요즘 생각이 너무 많군.”

“황제라면 늘 그런 법이지.”

“나도 제국의 섭정공이지만 내 머릿속은 그대로 가득한데?”

“나쁜 섭정공이로군.”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입꼬리만 올려 웃는 그 모습에 이실리스가 눈썹을 들어 올리려다 표정을 바로 했다. 저런 식으로 속내를 감추는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해 보게.”

“항상 내가 그대에게 끌려가는 느낌이라서 말이야.”

“끌려가?”

그녀의 말에 잠시 숨을 고르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 머릿속은 항상 이실리스, 너로 가득한데 너는 그러지 않는 것이 속상해. 그러나 이런 말로 너의 심기를 어지럽히기엔 너는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나는 너에게 속상하다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럽지.”

“…….”

“힐렌튼의 섭정공이 된 것도, 우리 아이를 황제 위에 올린 것도 단 하나. 너의 옆에 서기 위해서였다.”

“베르타스.”

“그러니 이제 나를 돌아봐 주겠나. 나는 항상 너를 따라가고 있어 이실리스.”

그의 절절한 마음에 이실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젠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퍼붓는 애정이 너무나도 커, 그녀가 주는 미미한 애정이 그 빛을 잃을 정도로. 황제인 그녀의 위치가 원망스러워지긴 처음이었다.

“내가 평범한 이였다면 그대와 만날 일도 없었을 걸세.”

“그 점엔 감사하지. 그대가 귀족들의 등쌀에 항구로 외유를 나오지 않았다면 나에겐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

“…….”

이전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녀는 황제이니 이해하라고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진 둘의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보았으니. 

아무 말이 없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인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그대도 사랑해.”

“그대.”

걷던 이실리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걸음이 멈추자 베르타스 역시 멈췄다. 벅차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날이 환하여 아직 정원엔 많은 이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실리스를 다정하게 안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린 베르타스가 그녀의 머리 위에 입술을 내렸다.

“그런 모습은 침대 위에서만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어.”

“베르타스.”

“그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듣기 좋지만, 그것 역시 침대 위라면 더 좋겠군.”

실없이 농담을 던지는 그의 말에 그녀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넓은 가슴과 그의 두 팔이 조심스럽지만, 힘있게 그녀를 안았다.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그가 좋았다. 두근대는 울림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를 좋아하니 그만큼 나를 더 생각해 달라는. 그 마음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씁쓸함을 느끼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한 듯 그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그대. 내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테니.”

“그럼 너무 희생…….”

“쉿. 희생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를. 나는 이렇게 그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내 욕심을 챙길 거야. 내가 이렇게 하면 그대는 나를 절대 버리지 못하겠지.”

작게 웃으면서 속삭이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농담처럼 들리는 그 말이었지만 그 이면에 느껴지는 그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라르헨의 황제를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것 아니겠나.”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났다. 그의 얼굴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던 그녀가 그의 입가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베르타스였지만, 이내 더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참 행복했다.

* * *

베르타스는 점점 변하는 이실리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황제이기도 했으나 저에겐 여인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태도를 고수하면서 그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녀를 차지하려고 했을 것인데, 그런 위험한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저가 있는 위치까지 그녀를 끌어내리려고 했던 자신의 저열한 마음을 숨기며 그가 이실리스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멀리서 전령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자 베르타스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방해꾼이 오는군.”

“본디 황제의 자리는 바쁜 법이니.”

“내 전령이야.”

이실리스에게 웃어 보이자 그녀도 마주 웃었다.

“이따 밤에…….”

“밤에…….”

똑같은 말을 하던 그들이 서로의 말을 기다렸다. 베르타스가 냉큼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따 밤에 보지.”

“그러지.”

달려오는 전령에게 시선을 돌리자 이실리스도 몸을 돌려 시녀들과 시종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섭정공 각하.”

“기다리고 있었네.”

일전 다한의 서류를 받고 추가 조사를 명령한 그였다. 서둘러서 조사했으면 좋겠다고 닦달하긴 했지만,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여기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꽤 빨리 왔군.”

“가는 도중 헥터 경께서 보낸 전령과 마주했습니다.”

“헥터 경이?”

힐렌튼에서 황제의 위를 노리고 반란을 시도한 자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이었다. 계획을 시작도 하기 전에 잡았으니 베르타스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서류는 그가 요청한 대로 마력탄에 대한 조사였다.

“이미 헥터 경께서 마력탄을 훑어보고 마법사를 초빙하여 조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마력탄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랍니다.”

“쓸모없는 것?”

“그렇습니다.”

전령의 말은 생각보다 놀라운 사실을 담고 있었다. 힐렌튼에서 사들인 마력탄은 반쪽짜리였다. 안에 마력이 담긴 것은 맞았으나 그 마력은 특별한 마나 배열로 이루어진 것이라 마력탄을 만든 자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돈을 주고 쓰레기를 산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마력을 끄집어낼 방법은 없는가?”

“재가공을 하는 것이 품이 더 많이 듭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궁정 마법사의 생각입니다.”

“그럼 이것을 사들인 전 황제와 황태자는 이 사실을 몰랐고?”

“마력탄을 사들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비로 사들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용하려던 흔적도 있었으나 마력탄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힐렌튼에 저런 것을 보냈단 말인가.”

“라르헨에서 힐렌튼의 돈을 노리고 한 짓이 아니었을까요?”

전령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힐렌튼은 그렇게 부유한 국가가 아니다. 힐렌튼의 상황을 라르헨에서도 알고 있을 터. 결과적으로 본다면 라르헨에서 힐렌튼을 가지고 논 것이나 다름없었다. 

“헥터 경은 뭐라고 하던가.”

“각하의 의견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판단을 피하고 저에게 의견을 물었다는 점에서 베르타스는 만족했다.

“반역자들은 모조리 처형하여 황성 밖에 목을 매달아라.”

“알겠습니다.”

“마력탄의 용도는 내가 조사해보겠다. 그리고 전대 황제와 황태자의 숨겨진 자금이 있을 터. 그걸 찾으라고 전해라. 비밀리에.”

“명심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