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1/161)

70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대신관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렇군. 대신관의 말이 맞군.”

“조만간 목걸이를 들고 또 오십시오.”

“그날엔 국혼일을 정해 주겠나.”

“제국의 대사엔 당연히 신전이 나서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셔도 좋은 날을 신께 받겠습니다.”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는 대신관이었다. 그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두었던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베르타스도 일어났다. 그들을 향해 대신관이 속삭였다.

“앞길에 축복만이 가득하길.”

“고맙네.”

“고맙군.”

이실리스는 따라나서려는 대신관을 만류하고 베르타스와 함께 흡족히 신전을 나섰다. 그리고는 나서자마자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접촉에 놀란 그가 고개를 들자 이실리스가 그의 얼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그를 보고 이실리스가 아름답게 눈을 휘었다.

넋 놓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가 바뀌었다. 이실리스가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얼떨떨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속삭였다.

“우리도 가볼까?”

“가다니…… 어딜?”

“놀러.”

* * *

이실리스는 황궁으로 들어가려던 좌표를 바꿔서 라르헨의 수도로 갔다. 수도를 둘러보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덕이었지만 이실리스는 지금의 제가 퍽 마음에 들었다.

“뭔가 달라졌군, 그대.”

“그래서 싫은가?”

“아니. 아니야.”

그녀에게 희미한 웃음을 돌려주는 베르타스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옷의 마법사 거기에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의 사람이 시장에 등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폐하!”

“황제 폐하다!”

“이런 머리 색을 바꾸는 것을 잊었군.”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몰려드는 인파가 너무 많아 이실리스가 다시 마법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누군가 그녀의 옷을 잡았다.

“폐하!”

“이실리스!”

그 순간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잡아 제 몸 뒤로 빼었다. 그녀의 옷을 잡았던 제국민은 그의 엄정한 눈초리에 쭈뼛거렸다. 그녀를 꽉 안고 놔 주지 않는 베르타스의 팔을 이실리스가 살짝 건드렸다. 놓아달라는 그녀의 눈초리를 보고서야 그가 힘을 풀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허리를 세우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고아한 기운이 풍겼다. 위엄있는 그 모습에 지켜보던 제국민들이 숨을 죽였다.

“무슨 연유로 나의 옷을 잡았는가. 고할 것이 있나?”

그녀의 물음에 그녀의 옷을 잡았던 제국민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옷을 잡은 것은 가까이에서 황제를 본 것이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뻗어진 손을 멈추지 못한 것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그에게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할 것이 없다면 가도 되겠나? 나는 잠행을 나온 것이라 말일세.”

“그…… 그러십시오!”

베르타스는 우아하게 저를 향해서 팔을 뻗는 이실리스를 에스코트하면서 나란히 움직였다. 몰려든 제국민들이 길을 내어주자 이실리스가 마법을 사용하여 말했다.

“하던 일 하시게. 나는 그저 둘러보러 나온 것이니.”

그녀의 말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잠행…….”

“왜, 다들 모른 척해주지 않나.”

그녀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간 사람들이 상기된 얼굴로 그녀와 베르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가든 몰리는 시선에 베르타스가 불편해하는 것이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포기한 베르타스가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이런 게 즐거운가?”

“아니, 그보다 제국민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운 것이지. 저들이 나의 사람들 아닌가.”

그녀의 목소리에 시끄러웠던 시장이 조용해졌다.

“이들이 없었다면 라르헨도 없었고, 나도 없었어.”

“힐렌튼의 전 황제와는 다르군, 그대.”

“힐렌튼에선 황족에게 어떤 교육을 하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아이는 라르헨의 방법을 따라갈 테니.”

“그도 그렇군.”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붉은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그 모습을 본 베르타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이실리스는 계속 걸었다. 떠들썩했던 시장이 조용해진 것은 안타까웠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제국민들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그대는 이렇게 다녀 본 적이 있나?”

“아니. 없군.”

“이것은 얼마인가?”

옆에 보이는 장신구를 파는 가판에 다가서며 그녀가 묻자 당황한 상인이 그녀에게 큰 소리로 답했다.

“그냥 가져가셔도 됩니다!”

“제국의 황제를 도둑놈으로 생각하나 보군.”

“절대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상인의 모습에 그녀가 웃으며 홍옥을 집어 들었다.

“가격은 적당히 받아야 할 걸세.”

“당연합니다!”

“나쁘지 않은 물건이로군.”

“지난번 항구도시에서 했던 말과는 다른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나.”

이리저리 홍옥을 살피던 그녀가 상인에게 값을 치렀다. 받지 않으려는 돈을 억지로 쥐여 주며 이실리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상인의 모습을 돌아본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넋이 나갔군.”

“아무래도 황제를 직접 보았으니 그렇겠지.”

“계속 돌아다닐 건가?”

“가야겠군. 아무래도 저들이 불편할 테니.”

돌아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제국민이 생업을 중단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녀가 물건을 산 상점은 오늘 이후로 손님들이 넘쳐날 게 분명했다. 그녀가 손짓하자 그녀와 베르타스는 황성으로 이동했다.

“일부러 그랬나?”

“뭘?”

“그 상인에게 물건을 산 것 말이야.”

“눈치챘군.”

비슷한 자리에 있는 상점들 사이에서 가장 허름한 곳이었다. 게다가 주인의 옷이 주변 상인들에 비해 남루했다. 결정적인 것은 가판의 근처를 배회하는 아이가 있었다.

“관찰력이 꽤 좋군.”

“칭찬으로 듣지.”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뭐 하는 건가.”

“수고하신 황제 폐하를 안아드리려고.”

“뭐?”

“어서 와서 안겨.”

양팔을 벌리고 기다리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베르타스도 함께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를 안았다. 황궁 정원에서 끌어안고 있는 그들을 본 시종과 시녀들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에게 서로가 제일 중요했으니.

* * *

“아이의 머리카락 색이 변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걱정하지 말게. 마력을 발현했으니 당연한 것.”

아무렇지 않게 답하며 서류를 넘기는 이실리스에게 머뭇대던 메릴이 입을 열었다.

“저…… 폐하. 황태녀 님의 이름은…….”

“아, 즉위식에 공표할 걸세. 신경 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고심했던 그녀가 혼자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베르타스에게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였다. 베르타스가 아버지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아이는 황족이자 그녀의 후계자가 될 아이였다. 마력을 발현한 아이에겐 마법사의 진명도 필요했기에 베르타스가 알게 하는 것보다 아는 이를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좋았다. 

미리 짓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미리 지어놨다면 대신전의 책에 이름이 올라갔을 것이고 그렇게 올라간 이름은 신관의 확인을 거쳐야 했으니 진명이 노출되었을 수도 있었다. 책은 태웠으나 그녀의 진명을 대신관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선황은 어디 계신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그랬군.”

시간이 나면 어머니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너무 늦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선황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어머니로 바뀌었다. 집무실 앞에 있던 시종장이 페일러스의 방문을 알렸다.

“들라 하게.”

“이리스!”

저의 애칭을 부르며 다가오는 페일러스를 향해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가볍게 예를 취하는 그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모든 것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그렇군. 자네들은 그만 쉬도록 하게.”

업무시간이 아직 남았지만, 그녀의 말에 보좌관들이 재빠르게 서류를 정리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이실리스는 눈짓으로 호위를 서던 기사도 그리고 마법사들도 모두 내보냈다. 페일러스와 둘만 남게 되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마법까지 건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왜 너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 함구한 거지?”

“계속 말했잖나. 너만큼 황제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그 이유뿐인가?”

“아니,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다는 것도 한몫했지.”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페일러스가 말했다. 입가에 장난기가 어리면서 그가 다시 속삭였다.

“왜, 내가 의심스러워?”

“솔직히 말하면 그렇군. 그만한 비밀을 손에 쥐고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말이야.”

“이실리스.”

“왜.”

“내가 그 비밀을 가지고 무언가 하려고 했다면 난 이미 이곳에 없겠지.”

“하긴. 죽었겠군.”

“무서운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다시 묻지. 페일러스. 이유가 무엇인가.”

진지한 그녀의 목소리에 페일러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숨을 고른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만큼 황제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지. 선황은 그 자질이 부족했으나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어. 그러니 그런 약점을 가지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지.”

“선황의 마력이 부족했던 것은 나도 알고 있네.”

“그 부분은 선황의 부군이 채워줬지.”

“아버지께서 고군분투하신 것도 알아.”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너는 타고난 지배자였어. 마력으로 모두를 누르는 것 같지만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다른 이들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제왕. 그게 너였다. 이실리스.”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은 알고 있으니 칭찬은 그만둬.”

“아니, 황제의 자리에 앉고 나서도 태도가 변하지 않는 황족은 드물어. 난 너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다.”

“정보를 다룬다고 하더니 입에 꿀을 발랐군.”

“그래서였지. 내가 선황의 부군에 대한 일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모든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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