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161)

69화.

“라르헨 황족의 진명이 보관되어있는 이 방은 황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려고 한다면…….”

한 신관에게 눈짓하자 대신관의 눈짓을 받은 신관이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대자마자 문으로부터 전격 마법이 발사되었고, 다른 신관이 서둘러 그에게 신성력을 주입해 구해내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력이 강한 자라면 그 마력으로 결계를 무효화 할 수도 있지 않소.”

밀레르 후작의 말에 대신관이 웃으며 말했다.

“이 방은 가지고 있는 마력만큼 전격 마법이 발생하는 곳입니다. 정 그렇다면 시험해 보시죠.”

대신관의 말에 밀레르 후작은 주춤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해 보지.”

베르타스가 나섰다.

“나는 소드마스터인데 그럼 나는 어찌 되는가?”

“가지고 계신 오라의 양에 맞추어 마법이 발동됩니다.”

“살아남을 수나 있나?”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방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결계이니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마도?”

대신관의 말에 되묻던 그가 방문을 잡으려 하자 이실리스가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본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전의 신관이 잡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번개가 내려쳤다. 신관들이 서둘러서 그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었고 커다란 빛 사이로 옷이 그을린 베르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참……. 대단하군.”

아무렇지 않게 웃는 그였지만 눈썹이 찡그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꽤 따끔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찔한 느낌이었지만 애써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는 그였다.

“또 시험해 볼 자가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며 이실리스가 말하자 하나둘 나서는 귀족들이 있었다. 결과는 모두 실패. 문을 열지도 못하고 내려치는 번개에 정신을 잃을 뿐이었다. 더 나서는 이가 없자 이실리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내가 들어가도 되겠는가.”

“이곳은 언제나 폐하께 열려있습니다.”

대신관이 공손하게 절하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스가 방 앞에 섰다. 문을 여는 그녀를 저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도 안 돼!”

모든 것을 지켜본 밀레르 후작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그녀는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어릴 적 보았던 풍경과 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이곳만 멈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는 이실리스의 눈에 유리관에 담긴 책이 보였다. 그녀의 진명이 적혀있는 책이었다. 

이실리스 티케 라르헨. 그것이 숨겨진 그녀의 진명이었다. 행운의 여신을 뜻하는 그 이름이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이제야 그 뜻을 명확하게 알게 된 그녀였다.

“어머니…….”

그녀의 진명을 지어준 선황을 떠올리며 이실리스가 책을 손에 쥐었다.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다고 하지만 결계가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법. 황족의 명줄을 쥐고 있는 이 책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이곳에 온 그녀였다. 

그녀의 손에 책이 들리자 환한 빛이 퍼지며 잠시 마력이 튀었지만,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모든 것은 다 황족의 뜻대로. 라르헨이 건국된 그 날부터 전해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 그녀였다. 건국 황제가 황족의 목줄을 쥐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도 귀족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 장소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의 제일 첫 장에 쓰인 건국 황제의 말에 이실리스는 결정을 확고히 했다.

[모든 것은 너의 뜻대로.]

밖으로 나온 그녀의 앞에 베르타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무릎 꿇고 있었다.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은 기사들에 의해 억지로 꿇려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확인이 다 되었는가?”

“폐하! 용서를……!”

“용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고개를 조아리는 귀족들을 보며 이실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용서라니. 저들 때문에 힘들게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게다가 계속해서 그녀의 아이를 노렸던 이들도 저들이라는 계산이 나오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아이를 노렸기에 아이를 잃었고 그녀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병을 얻은 그녀를 보며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베르타스가 아이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 상태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 다시 그녀를 떠밀었겠지. 새로운 후계가 필요하다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눈앞에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자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폐하. 그 책은 이제 파기하시는 겁니까?”

“황족이 그동안 스스로 굴레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만하게 구는 저들을 보니 이런 배려조차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대신관이 허리를 숙이자 이실리스가 손에 마력을 일으켜 그녀의 진명이 쓰인 책을 태웠다. 속이 후련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살았던가.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귀족들 너머로 베르타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서 환하게 웃고있는 그에게 웃음을 돌려주며 이실리스가 말했다.

“모두 끌고 가라. 반역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즉결처형이다. 처형은 내일로 하겠다.”

“폐하! 자비를!”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그대들은 나의 사정을 봐주었나.”

싸늘한 그녀의 말에 귀족들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아, 연좌제를 적용하여 가문의 사람들도 모조리 잡아들이게.”

“명을 받듭니다.”

그녀의 말에 아우성치는 귀족들이 눈에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었다. 저들이 그동안 그녀를 핍박했던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끌려나가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그녀를 부른 것은 대신관이었다.

“그냥 가시지 마시고 차나 한잔하시지요.”

“대신관.”

“이런 일이 아니면 존안을 뵐 수 없으니 이 늙은이가 이렇게 요청하는 것 아닙니까.”

눈을 접어 웃으며 말하는 대신관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대신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계신 힐렌튼의 섭정공께서도 함께 하시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베르타스에게 한 마디 남기는 대신관이었다. 베르타스가 성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자 대신관이 웃으면서 자리를 안내했다.

* * *

베르타스는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피려고 애썼다. 혈통을 증명하라니. 황족의 혈통을 증명하라고 나서는 귀족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어나기를 황족으로 태어난 베르타스는 라르헨의 황족들이 가진 희생정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족은 그 혈통만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그런데 라르헨은 약간 달랐다. 황족의 혈통을 타고 나더라도 마력이 없으면 대접받지 못하고, 강한 마력을 타고났어도 신하들을 좌지우지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지금 이실리스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일을 저의 딸에게 겪게 하지 않겠다고. 이실리스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조금씩 없앨 생각이었다. 황족에게 주어지는 것은 별로 없으면서 의무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이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실리스는 눈앞의 찻잔에만 시선을 주었다.

“폐하. 차가 식습니다.”

대신관의 재촉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찻잔을 들어올리는 그녀였다.

‘무슨 생각이 저리 많은지.’

다 해결된 것이 아니었나. 모든 일이 좋게 해결되었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은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걱정이 있습니까.”

그의 말에 그녀의 고개가 들렸다.

“아닐세.”

“국혼은 언제 하실 겁니까.”

“곧 해야겠지.”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려졌다. 그의 눈이 환희로 빛났다.

‘드디어!’

공식적으로 이실리스의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국혼을 통해서만이었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으나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내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녀의 마음뿐이었으니. 서서히 욕심이 올라왔지만, 그것도 참았다.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대접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던 중 대신관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베르타스의 얼굴을 살핀 대신관이 다시 말했다.

“부군 되실 분이 힐렌튼의 섭정공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랐습니다. 폐하.”

“그랬나?”

“라르헨의 사람과 국혼을 하시진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힐렌튼의 섭정공일 줄은 몰랐습니다.”

“우스만 칼리파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군.”

“원래 나이가 먹으면 소문이 제일 먼저 들리는 법입니다.”

“또 무슨 소문이 들렸나.”

대신관에게 웃으면서 대꾸하는 이실리스였지만 베르타스는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존재감이 옅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모든 것을 감내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는 자는 저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자리를 비운 우스만 칼리파의 이름이 대신관의 입에서 들려오자 베르타스는 견딜 수 없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베르타스의 눈에 대신관의 옆자리에 놓인 성물이 보였다.

“저것은…….”

“아, 라르헨의 성물일세. 보여주겠나.”

이실리스가 답하자, 대신관이 성물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자그마한 검처럼 생긴 그것은 그의 목걸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한참을 들여다보는 그에게 이실리스가 물었다.

“뭐가 잘못되었나?”

“아니, 이것과 비슷하여…….”

베르타스가 목걸이를 옷 안에서 꺼내자 검이 목걸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성물이 그대로 목걸이에 흡수되더니 커다란 검 하나가 그의 앞에 떠올랐다.

“아니, 이것은…….”

이실리스가 놀란 눈으로 대신관을 부르자 그가 미소 지으며 베르타스에게 말했다.

“사실 이것을 드리려 힐렌튼의 섭정공도 뵙자고 했습니다.”

나타난 검을 조심스럽게 쥔 베르타스가 검을 휘둘렀다. ‘휙’ 소리와 함께 가볍게 움직이는 검이 꽤 마음에 든 듯 그가 여러 번 검을 움직였다. 

힐렌튼은 라르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라였다. 라르헨의 선대 황제가 마법으로 나라를 세웠다면 힐렌튼의 선대 황제는 검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각각 선물을 교환했는데 힐렌튼의 것이 라르헨으로 와, 성물이 되었고 라르헨의 것이 힐렌튼으로 가 국보가 되었다. 그러다 둘이 만나면 검 한 자루와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 무구가 되는 것이었다. 

나타난 검을 손에 쥔 베르타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손에 꼭 맞는 검이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눈을 휘며 바라보는 이실리스에게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나머지 하나의 목걸이를 가져오시면 폐하께서도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왜 이제야 알려주는가.”

“그동안 힐렌튼과의 국혼이 없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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