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9/161)

68화.

“어머니에겐 다른 자식이 없었어. 그렇기에 난 선택지가 없었지. 태어나길 황족으로 태어났고 라르헨을 다스리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대체 왜. 나를 내리누르려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분노를 담은 그녀의 외침에 베르타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주고 싶었다. 그도 합당한 근거가 있어서, 그리고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고. 권력을 원하는 자들은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너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절대 너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자리가 보기엔 쉬워 보여도 그렇게 편한 자리가 아니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늘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자리인데 대체 왜. 왜 다들 이 자리에 앉지 못해 안달인 거지?”

“이실리스.”

진정하라는 듯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실리스는 들리지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

“제국의 일을 생각하느라 잠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야. 아이는 또 어떻고. 아이를 더 낳고 싶어도 행여 황위를 이을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 조심스러워지지. 아이를 갖는 것조차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신하들이 아이를 가지라 종용했기에! 그래서!”

이실리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것이었나. 젊은 나이에 황위에 오른 황제. 게다가 여자. 부군이 없으니 부군을 맞이하라 했을 테고 그것을 거부하니 그렇다면 후사는 어쩔 것이냐고 물었겠지. 그 상황에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단 하나. 권력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보다 어디선가 후계를 데려오는 것을 택했을 터. 베르타스는 하늘에 감사했다. 그녀가 도망친 그 항구에 그가 머무르고 있었던 것을. 그가 아니었어도 이실리스는 어디선가 아이를 가졌겠지. 그게 황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테니까.

“후회하나?”

“뭐?”

“나와 아이를 가진 것을 후회하냐고.”

낮게 들려오는 베르타스의 물음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찡그리는 그녀를 향해 베르타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옆에 섰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뭐?”

“어떤 이유에서든 네가 나를 선택했고, 아이를 가졌어. 그 아이는 이제 힐렌튼의 황제이자 라르헨의 후계자가 되었지. 너와 나의 아이가.”

“후회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이실리스. 황제는 그런 것이지. 한 일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 않아야 해. 황제는 무치. 제왕학의 기본 아닌가.”

“베르타스.”

“그대가 황제의 자리에 앉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대에게 실망했을 거야. 내가 본 어떤 황제보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그대이니.”

이실리스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는 베르타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렇다면 그대. 그대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내버려 두면 안 돼.”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그럼 된 것이 아닌가.”

“그렇군.”

가볍게 말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정리된 듯 보이는 그 모습에 베르타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기 좋았다. 저 때문에 찡그리는 얼굴은 괜찮지만, 저 외의 이유로 그녀가 속상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금세 기분이 나아진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제가 생각보다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를 생각해 주는 그 마음. 그것이면 되었다.

* * *

베르타스의 말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배신감이 먼저 들었다. 그녀가 제국을 위해서 여태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이들이 이런 식으로 뒤를 칠 준비를 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상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라르헨 제국의 황제를 기만하다니.

‘이래 놓고 감히 나에게 혈통을 증명하라고 나서?’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었다. 베르타스의 말에 분노가 가라앉고 나니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들이 그녀를 흔든 이유도 힐렌튼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밀레르 후작의 영지 근처에서 나는 포도주. 대륙을 가로지르는 밀무역.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밀레르 후작이 힐렌튼에 마력탄을 넘긴 것이 분명했다. 마법사 중에서도 협조자가 있을 것이고 힐렌튼에 지속적으로 정보를 넘겼을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라르헨의 혈통이 아니면 황위를 이을 수 없다. 그것은 정해진 사실이었고 만고 불변의 진리였다. 그가 왜 이런 수를 사용했을까. 그에게 자충수가 될 것이 뻔한데.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언가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이실리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그 이후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보지 못했던 서류. 

페일러스가 두고 간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서류에 무언가 있을 것 같았다. 알현장에서 벌떡 일어나서 마법을 사용해 서둘러 방으로 돌아간 그녀였다. 환하게 빛나는 마력 사이로 베르타스의 놀란 얼굴이 들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침실에서 마법으로 봉인해 놓은 서랍을 뒤지던 그녀의 눈에 페일러스가 주고 간 서류가 밀봉도 뜯지 않은 채 보관되어있었다. 보고서였다.

페이퍼 나이프를 이용할 새도 없이 마법으로 봉인을 태운 그녀가 보고서를 읽었다. 보고서를 읽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비밀에 그녀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일러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나에게……!’

어지러움이 일어 탁자에 몸을 기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보고서에 쓰인 내용은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내용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페일러스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입을 다문 것인가. 눈앞에 있다면 닦달하여 묻고 싶었다.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손에 있는 보고서를 태우면서도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이실리스의 귀에 시종장이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수석 마법사가 귀환했나이다.”

알현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이실리스가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여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곧 가겠다고 이르라.”

“알겠습니다.”

밀랍을 뒤집어씌운 듯 표정 없는 그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본 이실리스가 흠칫했다. 창백해진 제 얼굴에 이실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페일러스의 말대로였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이실리스 라르헨. 이 제국의 황제였다. 

마법으로 문을 열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시녀들과 시종들이 따랐다. 황궁 밖으로 나가서 임무를 처리하고 돌아온 기사단도 그녀의 뒤에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마법사들이 합류하였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바로 했다. 라르헨의 황제는 이실리스. 그녀 외엔 누구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 * *

알현장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귀족이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그마한 시선도 던지지 않으면서 이실리스는 황좌에 앉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황관이 빛났다.

“밀레르 후작. 그대는 왜 잡혀 왔는지 아는가?”

“반란이라니! 그런 것을 도모한 적이 없습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이실리스의 손짓에 알뤼르가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시각각 변하는 그들의 얼굴이 볼만했다. 마지막 한 줄까지 다 읽은 알뤼르의 목소리에 얼굴빛이 흑색으로 변한 귀족들 사이에서 오직 밀레르 후작만이 평온한 표정으로 있었다.

“이래도 할 말이 있나?”

“내가 힐렌튼과 협조하여 라르헨을 전복하려고 했다고 칩시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황위가 탐났던 모양이로군.”

“아니, 황족이 아닌 이에게 라르헨이 농락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소!”

밀레르 후작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태연한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그였다.

“이실리스 라르헨. 아니, 라르헨이라 불리기엔 그 피가 미천한 자. 제국을 기만하고 황좌에 앉아 있으니 라르헨의 귀족들이 우스워 보였나? 마력이 강하다고 하여 황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대가 가장 잘 알 텐데?”

“헛소리하는군.”

“끝까지 발뺌을! 어서 혈통을 증명해 보시지! 할 수 없을걸? 너는 황족이 아니니까!”

알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으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실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원하는 증명이니 해 주지. 어차피 내일 하려고 했던 것, 오늘 하나 내일 하나 상관없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이실리스가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준비해라.”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대신전으로 간다.”

알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을 이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마법사들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이 준비되는 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 자리에 있던 베르타스도 그리고 그 어느 귀족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베루스 공작만이 침통한 눈으로 밀레르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지.”

대신전은 라르헨의 황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생각보다 빨리 마법진이 준비되었다. 밧줄에 묶여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전부 마법진에 몰아넣은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하자 새하얀 빛이 일더니 시야가 전환되었다. 대신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폐하.”

“오랜만이오, 대신관.”

사람들이 나타난 자리에 나와 있던 대신관이 이실리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녀가 가볍게 손짓했다. 허리를 바로 세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명이 쓰여있는 방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그렇게 되었네.”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참관인일세.”

“…… 알겠습니다.”

이미 페일러스에게 모든 것을 들은 대신관이 걸음을 옮겼다. 대신관을 따라서 이실리스가 발걸음을 옮기자 그 뒤에서 귀족들과 베르타스가 걸었고 포박한 귀족들을 데리고 기사들이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일행의 제일 끝에서 신관들이 움직였다. 아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이 방입니다.”

대신관이 어느 화려한 방문 앞에 서자 모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붉은 마력이 감싸고 있는 그 방은 겉보기에도 황족 이외의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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