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너무 심하오!”
“심해?”
“아니, 좋은 생각이로군.”
그의 말에 동조하며 이실리스가 나섰다.
“후작이 목숨을 내놓고 그와 함께 상소를 올린 자들도 영지의 일부를 내놓게.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은 황족에게 혈통의 증명을 요구한 사례는 이제껏 없었네. 이런 상황에서 아무 조건도 없이 내 혈통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법. 그러니 목숨을 걸게.”
이실리스의 말에 밀레르 후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입을 여는 후작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되었군.”
빙긋 웃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작이 내 조건을 받아들였고 다른 귀족들도 그것에 동의한 것으로 알겠네. 그러면 일주일 후, 황족의 혈통을 증명할 장소를 공지하지.”
“명을 받듭니다.”
“가보게.”
그녀의 말에 서둘러 알현장 밖으로 사라지는 귀족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한심한 시선을 던졌다. 남아있던 베루스 공작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폐하.”
“됐네. 아무 말 말게.”
침울한 표정의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제 편이 되어줄 귀족들이 이리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황제는 그만큼 외로운 자리였다. 그녀의 측근을 제외하고 이 라르헨에서 그녀에게 경외와 두려움 대신 충성을 보이는 귀족들이 드물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이실리스였다.
“신전에 가려고 하십니까.”
베루스 공작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 외엔 수가 없으니.”
“진명이 노출되는 장소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베루스 공작도 이실리스가 혈통을 증명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족의 수호자인 그로서도 이번 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여론이 좋지 않았다. 밀레르 후작의 이상한 상상을 이해할 수 없는 베루스 공작이었지만 이미 후작에게 넘어간 귀족들을 다시 되돌리기란 어려웠다. 이실리스가 감내해야 하는 위험이 안타깝기만 한 그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진명? 마법사의 진명 말인가?”
“그렇다네.”
“이실리스!”
“그만. 그대까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게.”
마법사의 진명이 있는 장소가 노출되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 베르타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실리스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페일러스와 나누었던 이야기처럼 대신관과 말을 해 볼 작정이었다. 황족에게 부여된 굴레를 완전히 벗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녀의 아이를 위해서. 이번 일이 선례처럼 남아버리면 그녀의 아이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그녀가 결정을 내렸다.
“대신관을 부르게. 공작.”
“폐하.”
“입궁하라 이르게.”
“본디 신전은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습입니다.”
“나도 알지만, 신전의 협조를 구해야 하네. 이번 일로 나의 진명이 있는 장소가 노출되면 진명이 담긴 책을 파기하려 하네.”
“…… 영명하신 판단입니다.”
또 다른 관습을 없애겠다고 말하는 이실리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베루스 공작이 말했다. 공작의 대답에 이실리스가 기뻐하며 말했다.
“자네라도 내 편이어서 다행이군.”
“라르헨의 귀족은 늘 폐하의 곁에 서 있습니다.”
“아닌 자들도 많아서 말일세.”
“이번 일로 옥석을 가리셨으니 앞으로 라르헨이 발전할 일만 남았습니다.”
오랜 친우에게 남아있던 미련을 버린 베루스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눈을 빛냈다.
* * *
이실리스가 약속한 일주일이 되기 직전, 베르타스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다한과 그리고 알뤼르였다.
“각하.”
“생각보다 빨리 왔군.”
“찾았습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말하는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당연히 찾을 줄 알았다.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온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디서 찾았나.”
“비밀통로 사이의 벽 틈에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문서들?”
이번 일로 힐렌튼의 황성에 있던 모든 비밀통로가 노출되었으나 베르타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망할 나라. 비밀통로쯤 드러나면 어떠한가. 베르타스는 힐렌튼의 국명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지도에서 없애버리리라.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다한이 내미는 문서들을 살피던 그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력탄을 챙겨둔 이유가 라르헨을 공격하기 위해서라고?”
“그러합니다. 각하.”
“힐렌튼의 전 황제와 황태자가 제정신이 아니었군.”
“각하께서 승승장구하시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는 정도가 지나쳤다. 국력의 차이가 상당했는데 라르헨을 먼저 공격하겠다고 하는 것은 제국민들을 다 죽이겠다는 소리와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었군.”
“또 있습니다.”
“또?”
다한의 시선에 알뤼르가 품 안에 있는 서류를 꺼내려다 멈추었다.
“폐하께 먼저 드려야 하는 것이 맞네.”
알뤼르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지금 서류를 보겠다고 해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이실리스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니.
“이실리스에게 갈 건가?”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말게.”
베르타스의 말에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알뤼르가 불퉁하게 말했다. 제게는 하늘 같은 분을 아무렇지 않게 끌어내리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젠 내가 그녀의 곁에 설 텐데.”
“그렇다고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도 된다는 것은 아닐세. 다른 이가 있는 곳에선 예의를 갖추게.”
“그야 당연한 것을. 그러나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자네는 그녀의 측근이자 힐렌튼 황제의 스승이니 이 정도면 가까운 자에 속하지.”
저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묘하게 설득된 알뤼르가 표정을 풀었다. 단순한 그 모습에 베르타스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 가지. 그녀에게.”
나란히 나서는 둘을 보면서 다한은 고개를 저었다. 제 윗사람이지만 무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남에게 가까움을 표하는 것이나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나 엎드릴 수 있는 그런 모습. 하루 이틀 본 모습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닥쳐오는 한기에 다한이 팔을 쓸었다.
“대충 무슨 일이 있었나.”
“힐렌튼에 동조한 자들이 있다는 이야길세.”
“라르헨에서?”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많은 마력탄이 라르헨 밖으로 나갈 수 없지.”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알뤼르의 얼굴에서 심각함이 묻어났다. 그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던진 베르타스가 다시 앞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러모로 다행이로군.”
“뭐가?”
“내가 라르헨의 국부가 되기로 한 것이.”
“자네가 라르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선택한 것이야!”
“그야 당연히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좋지 않나. 나여서.”
베르타스의 말에 곧 죽어도 동의하고 싶지 않았던 알뤼르가 무시하고 앞서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베르타스도 생각에 잠겼다.
‘라르헨에서 힐렌튼에 협조한 자가 있다라.’
없을 리가 없었다. 거의 반란과 비슷한 규모의 사건이었다. 힐렌튼에서 라르헨을 공격하기 위해 마력탄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마력탄을 제공했다는 것은 제공자와 모종의 계약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는데 베르타스, 그가 황성을 차지하면서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가 황제와 황태자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일이 더 크게 틀어졌을 것이다. 아마 그 둘이 살아있었더라면 라르헨의 반란 분자가 그 둘을 데리고 또 다른 일을 획책했을 수도 있었다. 재빠른 판단을 내려 그 둘을 처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베르타스는 걸음을 옮겼다. 그 길의 끝에 그녀가 있었다.
“폐하. 수석 마법사와 힐렌튼의 섭정공이 알현을 청하옵나이다.”
곧 저 시종장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힐렌튼의 섭정공이 아니라 라르헨의 국부로 바뀔 것이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저에게 허리를 숙이는 시종장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결심했다. 이제 곧이다. 서둘러 들어간 알뤼르가 이실리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되었네. 일은 잘 해결하고 왔는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조용히 들어와서 황좌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는 베르타스에게 시선을 던진 그녀가 손짓하여 주변을 물렸다.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보좌관과 기사들이 물러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엇인가.”
“폐하. 생각보다 큰일인 듯합니다.”
“큰일?”
알뤼르가 내미는 서류 꾸러미들을 받아든 이실리스가 한 장씩 그 서류를 읽었다. 천천히 넘어가던 서류는 점점 속도를 더하며 마지막엔 거친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손에서 넘어갔다.
“이자들이 제정신이 아니군!”
서류를 내팽개치듯 서탁에 내려놓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힐렌튼과 손을 잡고 라르헨의 황제를 몰아내자는 헛소리가 적혀있겠지. 그리고 그 헛소리를 한 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을 테고.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른 이실리스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서류를 그에게 넘겼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적혀있던 이름 중에 밀레르 후작의 이름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꼼꼼히 서류를 살피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거칠게 교지를 적어 내린 그녀가 인장을 찍은 후 고개를 들었다.
“베루스 공작을 불러라. 그리고 알뤼르.”
“네. 폐하.”
“가서 모조리 잡아 와.”
“명을 받듭니다.”
교지를 받은 알뤼르가 밖으로 나가 마법사들을 소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위대!”
그녀의 부름에 서둘러 기사들이 알현장으로 들어왔다.
“반역이다. 기사단장은 당장 가서 수석 마법사와 함께 주동자들을 잡아 와서 내 앞에 무릎 꿇려라.”
“명을 받듭니다.”
기사들도 우르르 몰려나가자 조용해진 알현장에는 이실리스의 한숨 소리만이 들렸다. 베르타스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을 추스르기를 기다릴 뿐. 한참을 빈 알현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난 왜 라르헨의 황제가 되었을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