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웃기만 하고 말이 없는 이실리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페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가 해낸 것이었다. 그 베르타스 힐렌튼이. 그 집요한 자가 제 사촌의 마음을 얻었다.
“좋아.”
페일러스는 사촌에게 베르타스 힐렌튼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해서 함구하기로 했다. 나중에 그녀가 알아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실리스가 저 정도로 마음을 주었다면 웬만한 일로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테니.
“내 친우가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로군.”
“너의 친우이기 때문은 아니야.”
“누가 뭐라고 하였나.”
* * *
생긋 웃으며 말하는 페일러스의 얼굴이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입을 열어 물었다.
“뭔가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로군.”
“내 사촌께서도 사랑에 빠지셨다는데 당연히 만족해야지.”
“내가 사랑에 빠진 것과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왜 상관이 없나. 이제 무슨 일만 있으면 날 부르는 일도 적어질 것이 아닌가.”
“헛소리를 하는군.”
“인정할 건 해야지.”
장난스러운 그 얼굴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렇게 자주 불렀나.’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실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고집스러운 그 표정에 페일러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뭐라 말하려던 찰나 베르타스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방해한 건가?”
“아닐세. 마침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내 이야기?”
“그래.”
“무슨 일인가.”
페일러스가 뭐라 말하기 전에 이실리스가 그의 입을 막았다. 베르타스 앞에서 사랑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페일러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말했다.
“업무를 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듯하여 차라도 한잔하자고 왔네.”
“차? 자네가?”
네가 무슨 차를 마시냐는 페일러스의 어조에 베르타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같이 가겠나?”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둘 사이에 껴서 차를 마시라는 소리를…… 난 그냥 가겠어.”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을 나서는 페일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베르타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얼굴을 보니 좋다는 생각은 안 하고?”
“기대하였나?”
“물론.”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이실리스를 따라 웃으면서 베르타스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바람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입맞춤에 시녀들과 보좌관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황제는 무치라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면서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베르타스가 다시 그녀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늘 그대가 내 생각을 해 주었으면 좋겠어.”
“뭐?”
“물론 그대는 라르헨의 황제라 라르헨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겠지만.”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전과 같지 않게 너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면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내게 시간이라도 내어줘.”
“…… 알겠네.”
내민 손을 잡자 그녀의 손을 강하게 쥐는 것이 느껴졌다. 힘있게 잡아 오는 그의 손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그녀였다. 황족의 혈통을 증명하라는 요청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정원으로 나서서 의자에 앉자 마음은 더 편안해졌다.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베르타스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부드러운 그 느낌에 손을 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폐하!”
“또…….”
멀리서 달려오는 마법사의 모습에 베르타스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보인 것이 분명한 것을.
“귀족들이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오래도 참았다. 당장 달려올 줄 알았지만 그래도 며칠 시간을 두고 찾아온 그 인내심을 칭찬하면서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일찍 나올 것을. 아쉬워하는 베르타스의 뺨에 입술을 내리고 그녀는 돌아섰다. 놀란 듯 크게 뜨여진 그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마법사에게 그녀가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혈통 증명을 계속해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오늘은 마치 날을 잡았다는 것처럼 떼로 몰려왔습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이실리스도 느끼고 있었다. 혈통을 증명하기는 쉬웠다. 그 이후가 문제다.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하는가 싶기도 했다.
걸어가던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알현실을 가는 길목에서 선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황 폐하.”
“이실리스.”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무엇을 말입니까.”
“혈통 증명.”
“왜입니까.”
귀족들의 공세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것이 유일했다. 그 사실을 선황인 그녀도 모르지 않을 텐데 부러 이곳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대로 해.”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선황의 말에 즉각 반박하며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넘어가게 된다면 끊임없이 의심받을 겁니다. 그 의심이 커지면 나중엔 반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라고 하시다니. 선황답지 않으십니다.”
그녀의 말에 선황이 몸을 움찔하는 것이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이유길래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혹여 말해 주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
정작 중요한 순간엔 입을 다무는 선황의 모습에 이실리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언제나 한발 뒤에 물러서서 모든 것을 방관했다.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에 그녀에게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짚었다. 베르타스였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선황 폐하. 곧 라르헨의 국부가 될 사람입니다.”
“……힐렌튼의 섭정공이라기에 지난번은 새겨 보지 않았는데, ……그대가 베르타스 힐렌튼이로군.”
“또 뵙습니다.”
“그래, 그렇군. 이렇게 또 엮이는 것을 보니, 인연은 인연인가 보군.”
어쩐지 오래전에 안면이 있었던 듯한 둘의 말에 이실리스는 기억을 되돌렸다. 베르타스가 얻은 회복 포션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저에게 베푸신 친절은 잊지 않겠습니다.”
“되었네. 한순간의 변덕이었을 뿐이니.”
“그로 인해 저는 모든 것을 얻었으니 제게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 주십시오.”
베르타스의 말에 선황이 고요한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사라지는 선황을 보면서 이실리스의 마음이 울컥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울상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본 베르타스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 얼굴은 나에게만 보여줘 그대.”
“베르타스.”
“침대 위에서는 괜찮지만 여기선 아니야.”
귓가에 속삭여지는 외설적인 말에 이실리스의 눈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면서 이실리스가 표정을 바로 했다.
“그래 그대. 그게 잘 어울려.”
“그대도 꽤 문란한 사람이었군.”
“이실리스 너에게만 그런 것을.”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치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단지 그녀의 뒤에 그가 섰을 뿐인데 든든했다. 선황의 의미 모를 말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페일러스의 말대로 그녀가 황족이 아니라면 누가 황족일 수 있겠는가.
* * *
알현실에 들어서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베르타스 힐렌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귀족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일었다.
“이젠 대놓고…….”
“어떤가. 라르헨엔 이득일세.”
“그게 다가 아니지 않은가.”
“조용히.”
알현실에 마련된 자리에 앉은 이실리스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장내가 진정되었다. 베르타스는 그녀의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보자 하였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을 하는 밀레르 후작을 향해 눈을 두었다. 제 시선을 받고 움찔하는 후작의 몸이 들어왔으나 이실리스는 계속 그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무슨 볼일인가. 후작?”
“언제까지 혈통에 대한 증명을 피하실 수는 없다 사료 됩니다.”
“피해?”
“네.”
“내가 말인가?”
“그러합니다.”
“후작은 이제 보니 내가 우스워 보이나 보군.”
그녀의 말 한마디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좌중을 둘러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족들은 이리저리 눈을 피했으나 밀레르 후작만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후작을 옆에서 바라보던 베루스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아니라기엔 그대의 태도가 너무 방만하군.”
“…….”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무는 밀레르 후작을 엄한 눈으로 보던 이실리스가 다시 말했다.
“황족의 혈통에 대한 증명은 귀족들이 하라고 하여도 황족이 거부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나는 지금까지 나의 의무를 버려둔 적이 없네.”
“얼마 전에 마력을 거두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라르헨이 다른 나라에게 침략을 당했는가, 아니면 마물이 쳐들어오기를 했는가. 아무 일도 없었지. 단지 그대들이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웅성거리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계속해서 말이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렇게 하세. 내 혈통을 증명하고 황족임이 확실시되면 누가 책임지겠는가.”
“네?”
“누가 책임지느냔 말일세. 황족인 나에게 방자한 증명을 요구한 것을.”
그녀의 싸늘한 말이 떨어지자 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런 때는 조용해지는군.’
손해를 보는 것은 죽어도 싫어하는 귀족들의 행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베르타스의 말이 그들의 사이를 갈랐다. 갑자기 끼어든 그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다들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궁금히 여겼다. 그들의 시선을 고압적으로 내리깐 베르타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