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161)

65화.

저 가탄 백작을 살려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상급자의 명에 따르는 사람, 그러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는 사람. 베르타스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저의 말에 알듯 말듯 한 표정을 짓는 가탄 백작에게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대로 된 자료를 찾아오라 전하게. 말을 전하는 것은 백작이지만 라르헨의 마법사와 함께 돌아오는 것은 다한 경이어야 할 거야.”

“다한 경이 이곳에 있습니까?”

“입궁하라 불렀으니 이제 곧 오겠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어서 오게.”

몸이 거의 회복되어 팔을 휘저으며 들어오는 다한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괜찮은가?”

“이 정도야 뭐. 독만 아니었으면 당장 일어나서 다녔을 겁니다.”

“다행이로군.”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당연하게 말하는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선 다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가서 전 황제의 비밀 장부를 찾아오게.”

“장부요?”

“라르헨과 거래한 장부가 있을 게 분명하네. 황궁의 비밀지도를 내어 줄 테니 다 뒤져서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다한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신뢰할 수 있는 신하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곧 알뤼르가 도착했고 그와 함께 둘은 떠났다. 투덜대는 알뤼르를 모른 척하면서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게.”

“걱정 마십시오. 각하.”

다한이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셋은 베르타스의 앞에서 사라졌다.

“찾아오기만 한다면.”

정리가 거의 끝났다고 하지만 분명 남아서 기회를 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힐렌튼을 떠나온 시기가 너무 일렀다. 이실리스에게 어떤 연락도 없었기에 서둘러서 라르헨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가 없는 사이 힐렌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라르헨의 귀족과 힐렌튼의 황족이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만 찾아낸다면 그와 관련이 있는 귀족들도 모조리 없애 버릴 수 있었다. 명분이 없어 없애지 못했던 귀족들을 한 번에 처리할 기회였다. 찾아오기만 한다면. 

힐렌튼으로 다녀오고 싶었으나 이실리스의 상태가 불안했다. 어딘지 흔들리는 그녀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망가진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결심했다. 절대 혼자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차라리 힐렌튼의 일을 미루더라도 지금은 이실리스가 우선이었다.

“몽유병이라니.”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얻는 병이 아니던가. 아이를 잃은 것이 그녀에겐 큰 충격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몽유병이 제대로 낫지 않은 이 시기에 짠 것처럼 황족의 혈통을 증명하라고 나선 귀족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무언가가 있어.”

아무런 이유 없이 귀족들이 저렇게 나설 리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문다고 했던가. 확신도 없이 황족의 혈통을 증명하라고 나서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제 안위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귀족들이 저렇게 나섰다니. 누군가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 준 것이 분명했다. 이실리스가 황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황족이 아니라면 이실리스는 대체 어떻게…….”

계속해서 생각하던 베르타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과거, 이실리스와 항구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사용한 마력의 색깔은 붉은색이 아니었다.

“그때는 분명히 푸른색이었지.”

그래서 그도 속았었다. 그녀가 눈동자 색을 속이기도 했지만, 마력의 색깔이 푸른색이었기에 라르헨의 황족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동자색이 군청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력의 색깔이 달랐기에.

“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 * *

며칠이 지났다. 계속해서 머리가 아팠다. 옆에 있는 페일러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절로 찡그려지는 얼굴을 펼 수 없었다.

“괜찮아?”

“페일러스. 네 생각은 어떻지?”

“뭘.”

“네 생각에도 내가 황족이 아닐 거라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가 황족이 아니면 누가 황족이지?”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차마 선황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반응이 이상했다. 혈통의 증명을 하지 말라니. 무슨 의미로 한 말이었을까.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엔 저를 걱정하여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로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증명 이후의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거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귀족들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고 계시냐고 캐묻고 싶었다.

“이실리스.”

계속되는 상념에서 그녀를 끄집어낸 것은 페일러스였다.

“…….”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야.”

“넌 아무런 생각이 없겠지만 나에겐 중요한 문제지.”

“아니. 걱정할 필요 없어.”

“왜지?”

“네가 황족이 아니라면 누가 황족일 수 있을까.”

확신을 담아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껏 넌 황족으로서 의무를 다해왔고 충분히 황족다운 모습을 보였어. 그런 네가 황족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황족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잖나.”

“아니, 적어도 황족은 너와 같아야 해. 나는 네가 가장 이상적인 황족이라 생각해.”

“왜지?”

“넌 무엇보다 라르헨을 가장 우선시하니까.”

그랬다. 그녀에게 우선순위는 늘 라르헨이었다. 그녀의 아이도 라르헨을 위한 것이었고 그녀가 아이를 잃고서도 정신을 놓지 못했던 것도 라르헨을 위해서였다. 베르타스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라르헨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라르헨을 위해서. 이실리스 개인을 위한 것은 일생 동안 단 한 번이었다.

“페일러스.”

“잘하고 있어. 이실리스.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않나.”

“네가 황족이 아닐 리가 없어.”

“증명은 또 다른 문제야.”

“뭐가 문제지? 그냥 신전에 들어갔다 나오면 될 것 아닌가.”

“신전이 노출되면 진명이 있는 곳을 또 옮겨야 해.”

“다른 신전을 찾으면 될 일을 왜 어렵게 생각하지?”

“그곳이 가장 안전하기에 그곳에 진명을 넣어 놓은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날카로워진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움찔했다. 마법사에게 진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이실리스의 진명이 있는 곳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녀의 신변에 위험이 생길 수도 있었다.

“누군가 나의 진명을 알아내 나를 강제한다면 어찌할 생각인가.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너무 심한 비약…….”

“마법사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너도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해?”

“그럼 어떻게 하려고. 그곳이 아니면 혈통을 증명하기가 어려워.”

“왜 하필이면 내 대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이실리스에게 페일러스는 아무런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황족이기에 진명을 꼭 신전에 두어야 하는 이실리스와는 달리 페일러스의 진명은 본인과 그의 부모 중 한 명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이미 죽었으니 그의 진명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일 이후로 진명을 신전에 두는 것을 없애면 어떨까?”

“뭐?”

“네가 두려워하는 것도 그것 때문 아닌가. 진명을 신전에 넣어 두었는데 신전이 공격당하는 것.”

“그렇지.”

“마법사인 건 다 같은데 황족만이 진명을 그런 곳에 두는 것은 불합리하지. 그러니 이번 일이 끝나면 진명을 다 태우는 것은 어때?”

“태워?”

“진명을 적어놓은 책을 세상에서 없애자고. 황족이 족쇄를 차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

페일러스의 말이 맞았다. 마법사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진명을 보관하는 것은 황족뿐. 그것은 초대 황제가 스스로를 그리고 황족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황족이 그들의 의무를 저버리고 방만하게 행동할 경우 그들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을 신전에 쥐여 준 것이었다. 신전에서 황제의 진명을 휘두른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신전은 일절 정치에 끼어들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신전에 진명을 놓아두었다는 사실도 서서히 잊혔다.

“신전에서는 아마 허락해 줄 거야.”

“페일.”

“라르헨 제국이 세워진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어. 그동안 황족들이 단 한 번도 그들의 책무를 어긴 적이 없지 않아. 그러니 신전에서도 굳이 위험한 것을 떠안고 있을 필요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히.”

단호한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도 일리 있었다. 그녀가 여태껏 황족의 의무를 게을리한 적은 없으니 이제 진명을 적어놓은 책을 파기하여도 되지 않을까. 조만간 신전의 대신관을 만나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일단 시기를 조율해야겠군.”

“얼른 해결하고 그냥 누르는 것이 좋겠어.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거짓이 사실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이니까.”

냉정한 말이었지만 그의 판단이 옳았다. 발언이 나온 지 겨우 하루였으나 점점 변하는 여론을 느끼고 있었다.

“대신관을 불러올려야겠군.”

“빠르게.”

“당연한 것 아닌가.”

결정을 내리자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깊은숨을 내쉬는 이실리스를 가만히 지켜보던 페일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베르타스 힐렌튼과 국혼을 올릴 건가?”

“그건 왜 묻지?”

날카로운 시선을 돌리는 이실리스를 향해 흔들리는 시선을 던지는 페일러스의 얼굴이 보였다. 당황감이 드러난 그의 얼굴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너 정말 그를 좋아하는군.”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웃었다. 그를 좋아한다니. 맞는 말이었다. 제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던 그녀였으나 이제 확실해졌다. 라르헨이 그녀에게 최우선이라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었지만 베르타스 힐렌튼도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라르헨의 일부를 내려놓을 만큼 그가 중요했다. 변화하는 저의 모습이 두려웠지만 이젠, 그조차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선황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도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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