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진명이 있는 장소를 드러내 버리면 그 이후가 문제였다. 마법사의 진명은 그 마법사에 대한 구속력을 가진다. 이실리스의 진명이 있는 방은 황족 외엔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지만 초대 황제 때부터 비밀리에 감추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군.”
이실리스가 복도에서 꼼짝도 하지 않자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도 이실리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계속되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눈앞이 어둑해지더니 베르타스의 손이 눈을 덮었다.
“이게 무슨…….”
“쉬. 가만히.”
그녀의 눈을 가린 그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실리스. 생각이 너무 많아.”
“황제는 생각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어.”
“물론 그렇지만 지금은 잠시 내려놓아. 내 생각도 해줘야지. 사람을 옆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상념을 지울 수 없었던 그녀였다. 베르타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거기까지. 나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단지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뿐.”
그의 말에 따뜻한 것이 퍼져나갔다. 뒤에서 닿아온 그의 온기가, 그의 애정이 그녀를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고민을 혼자 할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저의 내심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베르타스 힐렌튼. 곧 라르헨의 국부가 되어 그녀의 곁에 서게 될 사람이.
“베르타스.”
아직도 그녀의 눈을 가린 채 손을 떼지 않는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손을 들어 얼굴을 보여주는 그의 손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베르타스에게 먼저 닿은 것은. 놀란 듯 숨을 들이켜는 그의 멍청한 표정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눈을 휘었다.
“지금 대체 무엇을…….”
“왜 나는 이리하면 안 되는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멍한 표정의 베르타스를 남겨두고 이실리스는 걸었다.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발걸음을 베르타스가 뒤쫓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그녀를 잡으려 따라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좋았다. 그녀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뒤에 굳건히 있다는 것은 대단한 마법사인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실리스.”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강하게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이실리스는 숨을 멈추었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안기니 그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나라의 황제.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괜찮겠지.
눈을 감고 그의 체온을 느꼈다.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베르타스는 밀려드는 감동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태도가 변화한 것이 가장 기뻤다. 힐렌튼의 황좌를 거머쥐었을 때도 이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진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먼저 와 안기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것이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돌려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 몰랐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어 그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심장이 뛰는군. 그대.”
이실리스의 말에 더욱 세차게 뛰었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뛰는 심장을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너와 함께라서.”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몸을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그녀의 몸을 강하게 잡으면서 베르타스가 다시금 속삭였다.
“네가 좋아. 아니, 너를 사랑해 이실리스.”
“베르타스 힐렌튼.”
“그러니 날 받아줘.”
진심을 담아 말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버둥거리던 몸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지 않나.”
“아니, 난 들은 적이 없어.”
단호한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눈이 휘었다.
“사랑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온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는 숨이 멈추었다. 그녀의 주위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고 이실리스, 그녀만이 그의 눈 안에 남았다. 밤의 별빛에 비추어진 그녀의 새하얀 얼굴, 아이와 같은 눈동자, 초승달 같이 휘어진 눈매 그리고 머리카락과 같이 붉은 입술.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숨이 맞닿으면서 그녀에게서 넘어오는 숨을 모조리 삼켰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그녀가 몸을 틀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베르타스 힐렌튼.”
사뭇 혼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대로 끌어안은 이실리스를 들어 올렸다. 머리에서 황관이 떨어지고 그녀의 의복에서 장신구들이 부딪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짤랑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는 그녀를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았다. 흡사 춤을 추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정신없어하는 이실리스가 보였지만 멈출 수 없었다.
“놓게!”
“봐 달라고 하지 않았나.”
“놓으라니까!”
마지막으로 그녀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으면서 베르타스가 다시금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그의 말에 의복을 정리하던 이실리스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는 이내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화답하듯 화사히 웃는 그녀의 얼굴에 베르타스는 결심했다. 그녀와 저를 갈라놓는 것은 무엇이든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이실리스의 뒤를 따라가는 베르타스의 눈빛과 마주한 기사들은 그의 눈을 피해야 했다.
* * *
“헥터 경은?”
“힐렌튼의 정리가 거의 끝났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다행이로군. 마력탄은 어떻게 되었지?”
“황궁에 그대로 있습니다.”
헥터에게서 온 전령을 맞으면서 베르타스는 탁자를 두들겼다.
‘분명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을 것인데.’
저 많은 마력탄이 저절로 힐렌튼의 황궁에 와서 있을 수는 없었다. 거래 내역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했으나 이미 전 황제와 황태자는 죽었다. 죽은 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전 황제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였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럼 황태자의 측근은?”
“그 사람도 이미…….”
화근을 없앤다고 모조리 죽였다. 그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
“적어도 한 명은 남겼어야 했는데…….”
그의 중얼거림에 전령으로 온 가탄 백작이 몸을 떨었다. 황실의 개, 다른 이름으로는 전장의 악귀라고 불리는 베르타스 힐렌튼을 직접 본 것은 전쟁터에서였다. 검을 들고 종횡무진하는 그의 모습에 찬사를 보냈지만, 피를 뒤집어쓴 마지막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희게 웃던 그의 얼굴도. 그 뒤에 그 베르타스 힐렌튼이 힐렌튼의 수도로 쳐들어 왔다는 말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전쟁터에서 본 베르타스 힐렌튼은 그대로 황제에게 엎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백작은 바로 납작 엎드리는 것을 택했다. 다행히 베르타스 힐렌튼은 아무나 마구 죽이는 무도한 자는 아니었다. 권력욕이 없었던 가탄 백작은 그렇게 목숨을 부지했으나 다른 귀족들은 아니었다. 전 황제의 곁에 빌붙어서 권력을 누리던 모든 귀족이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귀족을 손에 꼽을 정도로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럼 직접 찾아야겠군.”
그의 말에 가탄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찾으란 말씀이신지…….”
“서류가 있을 터. 이 정도의 마력탄인데 아무런 증거가 없을 리가 없다. 라르헨에 이야기해서 마법사를 붙여 줄 테니 조사하고 바로 돌아오게.”
“네?”
“무슨 할 말 있는가?”
“아니 아닙니다.”
라르헨과 무슨 사이이기에 마법사를 밖으로 돌리기 싫어하는 라르헨 제국에서 마법사를 내어줄 거라 자신하는지 궁금했지만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베르타스.”
그러다 가탄 백작은 방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이를 보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라르헨의 황제였다.
“어찌 되었지?”
“지금 찾아보라 일렀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라르헨의 황제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베르타스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가탄 백작을 향해서 싸늘하게 말하던 그는 어디로 가고 저렇게 꿀 바른 듯한 목소리로 말한단 말인가.
“라르헨의 마법사를 한 명 불러주면 더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듯한데.”
“좋아.”
황제의 손짓에 뒤에서 대기하던 마법사가 다가왔다.
“누구와 가면 되는 거지?”
“소식을 전해온 저 가탄 백작.”
“아, 힐렌튼의 백작이었나?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실례하였군.”
“아니, 아닙니다!”
위엄을 담은 목소리가 그를 향하자 절로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를 보내야겠군.”
“그자는 우리 아이를 보아야 하지 않나?”
“내가 있으니 알뤼르가 다녀오는 것이 제일 빠를 것 같군.”
“그렇다면야.”
눈을 휘면서 웃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가탄 백작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저자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의 얼굴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가 베르타스와 눈이 마주친 가탄 백작이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저 봐라. 저에게 얼굴을 돌리자마자 표정 굳히는 모습을.
“10분 후에 출발하라 이르지.”
“여기서 기다리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는 라르헨의 황제에게 다시금 허리를 숙이면서 가탄 백작이 인사했다. 아무런 말 없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탄 백작이 베르타스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있던 일이 밖으로 새지 않을 거라 믿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긴. 새어나가지도 못하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말을 던지는 그의 눈을 피하면서 가탄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라르헨의 여제는 어쩌다가 저런 자와 엮여서…….’
강대국의 황제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백작.”
“예!”
“내가 왜 백작을 살려두었다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베르타스의 물음에 가탄 백작은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괜히 아는 척 뭐라고 떠들었다가 한순간에 목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탄 백작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에게 진득한 시선을 던진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일세.”
“네?”
“그래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