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의 말에 입을 떡 벌리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계속 웃음을 흘렸다.
“아니 아무리 사랑에 빠졌어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아무려면 어떤가. 그녀의 곁에 선 것은 나인데.”
음험한 웃음을 짓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페일러스가 흠칫했다. 이실리스는 페일러스를 보느라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페일러스의 표정이 구겨지자 이실리스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 안 좋은 것인가?”
“이리스. 설마 저 녀석과 국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저 녀석?”
“그래. 저 녀석.”
페일러스는 조금 전까지 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을 후회했다. 이실리스가 백배는 아까웠다. 저렇게 음흉한 녀석에게 제 순진한 사촌을 넘길 바에는 차라리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저 베르타스 힐렌튼이 어떤 녀석인지를.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표정을 굳히는 것이 보였다.
“곧 라르헨의 국부가 될 사람에게 말이 가볍군. 페일.”
낮지만 단호한 답에 베르타스의 표정이 펴졌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불편해졌다. 저렇게 밝게 웃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웃는 것을 보니 그나마 괜찮다고 해야 하는가. 페일러스는 계속해서 드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려 말을 돌렸다.
“왜 불렀지?”
“페일러스. 최근 밀레르 후작의 동태에서 이상한 것이 있었나?”
“그치는 늘 이상하지.”
“늘 이상하다?”
“브레고 지방에 영지를 두었으나 영지엔 전혀 가지 않고 수도에만 머무르는 것도 이상하고, 영지에 있는 대리인이 브레고 와인을 힐렌튼으로 넘기는 것도 이상했지.”
“왜 미리 말하지 않고!”
“이실리스. 난 너의 사병이 아니야.”
페일러스의 말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그는 그녀의 신하가 아니었다. 단지 사촌이기에 그녀가 원하는 때에 도움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사촌이자, 나아가서는 라르헨의 대공이었다.
‘페일러스도 위험한 것인가…….’
그녀의 치세에서 대공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미미했지만, 그 권력이 페일러스의 정보와 만나게 된다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를 없애버려야 할 수도 있다고. 그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목격한 페일러스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어서 보고하지 않았지. 뭔가 더 확실해지면 말해 주려고.”
“그랬군.”
페일러스의 믿음을 주는 말에 그녀는 잠시 떠올렸던 위험한 생각을 지웠다. 그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이실리스의 눈빛에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였다. 하마터면 라르헨의 황제와 척을 질 뻔했다.
“와인을 수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그 수출 경로가 국내를 가로지르는 것이라는 걸세. 그런데 후작은 허가를 받지 않았지.”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페일러스가 이실리스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제대로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고 그도 덤터기를 쓸 수 있었다.
“이상하군.”
“그도 그렇군.”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한참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알뤼르가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인가.”
“황태녀 님께서 마력을 움직이고 계십니다.”
“벌써?”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아이가 어렸다. 아이가 마력을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는데 마력을 제대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알뤼르의 말에 서둘러서 아이에게 걸음을 옮기는 이실리스를 보내고 남은 남자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군.”
“숨기는 것?”
“그 후작이 허가도 받지 않고 와인을 힐렌튼에 수출했다는 것은 힐렌튼과 모종의 계약이 있었다는 것과 같지.”
“지금 힐렌튼은 자네가 다스리지 않나.”
“힐렌튼의 황궁에 뭐가 있었는지 아나?”
뜬금없이 물어오는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황궁을 내 발아래에 복속시킨 것은 단 하루였어. 하루 만에 이루어진 일이라 황제도 그리고 다른 귀족들도 대처할 여력이 없었지. 그러나 그 하루가 틀어져서 이틀이 되었다면 나는 힐렌튼의 황궁을 장악할 수 없었을 거야.”
“며칠이 걸려서라도 했을 것 아닌가.”
“아니, 불가능했을 거야.”
“왜지?”
“힐렌튼의 황궁엔 라르헨의 마력탄이 가득했거든.”
“뭐라 하였나 자네.”
베르타스의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 페일러스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별것도 아닌 것을 다시 묻는다면서 베르타스가 힘주어 말했다.
“라르헨의 마력탄이 가득하였다고 했네.”
“라르헨의 마력탄은 마법사들에 의해서 반출이 통제되는 품목이야! 그런데 그게 왜 힐렌튼의 황성에 있단 말인가!”
“그야 나도 모르지.”
웃음 지으며 말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페일러스였다. 심각한 문제였다. 라르헨의 마력탄은 마법사들에 의해 중요하게 관리되는 것이었다. 황제의 허락 없이는 그 마력탄을 누구도 반출할 수 없었다. 황성의 무기고에 보관되어있는 마력탄의 개수를 확인해야 했다.
“내가 가서 이실리스에게 말하겠네.”
“다행이지 않나?”
서둘러 나가려는 페일러스의 발목을 잡는 베르타스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내가 라르헨의 국부가 되기로 한 것 말이야.”
생긋 웃으며 말하는 그 얼굴에 페일러스는 왠지 모를 오한을 느꼈다. 저 말이 국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실리스를 갖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넌 정말 무서운 놈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이실리스만 모르면 돼.”
“미친놈.”
“그러니 입을 다물어 페일러스. 내 일부러 너에게 이리 말하는 것이니.”
얼른 가보라는 듯 손짓하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페일러스가 뒷걸음질 치면서 알현실을 벗어났다. 이실리스가 알게 된다면 페일러스 그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베르타스의 숨은 의도를 파악한 그였다. 사랑 앞에서 친우고 뭐고 없다는 그의 말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 * *
“밀레르 후작!”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오!”
“폐하의 혈통을 증명하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못합니까.”
웅성대는 귀족들의 말을 자르면서 밀레르 후작이 입을 열었다.
“라르헨의 황족이 황족이 아니면 커다란 문제가 아닙니까?”
“황족의 피를 그만큼 짙게 타고난 황제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망발을…….”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백작의 얼굴에 시선을 꽂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해서 말입니다. 선황께서는 붉은 머리에 군청색 눈이 아니셨습니다.”
“그거야 격세 유전이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왜 폐하께서는 그렇게 진하게 피를 타고 나셨을까요? 선선황제께서도 아니었는데?”
그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지금의 황제가 실제 황족이 아니라면 그들이 받았던 핍박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확신이 되는 것이고 그 확신은 결국, 사람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밀레르 후작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말이 한 번 나온 이상, 이실리스 라르헨은 계속해서 혈통에 대한 의심을 받을 것이다.
“단지 마력이 강한 자가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을 타고나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폐하의 마력은 붉은색 아니오! 그것은 황족의 징표요!”
정신이 든 백작이 다시 외치자 그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밀레르 후작이 다시 말했다.
“그 마력 또한 눈속임이라면?”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이오?”
“무려 라르헨의 황제 자리.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사위를 뚫고 다시금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우리 귀족들뿐 아니라 제국민들을 농락한 희대의 사기극입니다.”
* * *
“뭐라고?”
“밀레르 후작과 다른 귀족들이 폐하의 정통성을 증명하라는 상소를 다시 올렸습니다.”
“이번엔 몇인가.”
“열둘입니다.”
“셋에서 많이 늘어났군.”
오전까지만 해도 단 셋이었던 자들이 오후가 되더니 열둘로 늘어났다. 내일이 되면 동조자가 더 늘어날 것이었다.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앞에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증명을 한단 말인가.
“진명이 있는 신전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나.”
그도 위험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진명이 있는 장소가 노출되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민하는 이실리스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그런 말이 들리고 나서 선황은 칩거했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 걱정이 되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한밤중이 되었으나 이실리스는 아직도 집무실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낮에 마력의 길을 이끌어 주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달이 중천에 뜨자 그제야 몸을 움직이는 그녀였다.
집무실 밖으로 나서니 베르타스가 저를 기다렸는지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녀를 확인한 그가 몸을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나오는군.”
“왜 여기 있는가.”
“그대가 생각이 많은 듯하여 기다렸지.”
집무실 앞에 시녀들과 시종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본 그가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페일러스의 말은 들었나?”
“들었지.”
어두워지는 이실리스의 표정에 그가 그녀의 미간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속삭였다.
“내가 능력 있는 남자라 너무 다행이지 않나.”
“뭐?”
“내가 힐렌튼을 장악하였으니 마력탄은 고스란히 라르헨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그 마력탄을 누가 힐렌튼에 넘겼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의 일인 것이지.”
“그렇긴 하지만 누구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
“그래.”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물증이 없으면 지금 밀레르 후작을 잡아들이는 것도 위험했다. 황제의 혈통을 증명하라고 나선 귀족을 핍박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저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는 것도 싫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나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 번 뜻대로 마력을 회수했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의지대로 했던 최초의 일이 그렇게 어그러지자 이제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갖는 것조차도 나의 의지가 아니라 신하들에게 떠밀려서였으니…….’
국혼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베르타스를 만나 아이를 가졌지만, 그 상황을 만든 것은 귀족들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원하는 대로 한 적은 그때뿐이었다.
‘어찌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