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161)

62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도 생각에 잠겼다. 이실리스의 마력은 라르헨의 황제 중 초대 황제의 마력에 버금가는 마력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다스리는 라르헨은 제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이상한 일이로군.”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무슨 근거로 이실리스에게 증명을 하라는 것일까. 후작 정도 되는 귀족이라면 아무런 증거 없이 저런 것을 들이밀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증거는 무엇인가.

“증명은 아무나 제기할 수 있는 것인가?”

“후작 이상의 고위 귀족 셋이 모여서 상소를 올리면 가능하지.”

“그렇다면 누가…….”

“이번 일로 자식을 잃은 귀족 셋이로군.”

“죽었나?”

“아직 죽진 않았지. 곧 죽을 목숨이지만.”

“그렇다면 그들이 앙심을 품고 제기한 것이로군.”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면 오히려 외통수에 걸리는 것은 저들이야. 그런데 대체 왜…….”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선황이 들어왔다.

“증명이라니! 이게 무슨 헛소리냐!”

“선황 폐하.”

“이실리스. 그걸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사색이 되어서 달려온 선황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놀랄 일이 뭐란 말인가.’

알 수 없었다. 

“두려울 게 무엇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실리스.”

“걱정 마세요.”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를 외면한 채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위선처럼 느껴졌다. 

‘방치할 때는 언제고 이제야…….’

그녀의 애정에 목말랐을 때, 이실리스를 내친 것은 선황이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실리스에게 선황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걸 하지 않으면 귀족들의 공세를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귀족들이란 라르헨을 수호하는 황족에겐 한낱 미물과도 같은 것. 그들의 의견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황제의 정통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어떻게든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저를 만류하는 선황의 말에 문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자꾸 말리는 것인가. 끊임없이 오가는 설전을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중간에서 입을 열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시지요.”

“그대가 힐렌튼의 섭정공인가? 황태녀의 아버지가 된다는?”

베르타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선황이 그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차가운 선황의 시선을 도전적인 눈으로 받아치면서 그가 말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어머니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서둘러서 입을 열었다.

“선황 폐하.”

“어쨌든 나는 나의 의사를 전하였으니 이만 가보겠다.”

“어머니.”

이실리스의 부름에 잠시 멈칫하는 그녀였지만 결국 몸을 돌려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속삭였다.

“뭔가 이상하군.”

“이상해?”

“뭔가 숨기는 것이 있군.”

“선황은 늘 그랬지.”

어머니는 늘 그랬다.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더 심해졌다. 적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웃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는데 그가 죽고 난 후, 웃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살갑게 안아주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실리스는 떠오르는 이전의 기억들을 떨쳐내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한시가 급했다.

“귀족들의 동태를 파악해야겠군.”

“도와줄 일이 있나?”

“아니.”

이실리스의 가벼운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페일러스를 불러라.”

“알겠습니다. 폐하.”

* * *

페일러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터였다. 이실리스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베르타스가 따라 걸었다.

“안 바쁜가?”

저를 졸졸 쫒아다니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이실리스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희미한 웃음을 던진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서 속삭였다.

“바쁜 일이 없군.”

“그거 참 이상하군. 힐렌튼의 섭정공이 할 일이 없다니.”

이실리스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잠시 말이 없는 베르타스였다.

“나의 아이가 황제인 나라를 제대로 지켜야 하지 않나?”

“그것은 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장난스러운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입매를 굳히며 말했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굳은 그의 표정에 이실리스의 입이 다물리자 베르타스가 곧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되나?”

“뭐?”

“내가 걱정돼?”

“무슨…….”

“그렇다면 걱정된다고 말하면 되지 않나.”

“흰소리하는군.”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힐렌튼의 섭정공이 되었으니 분명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터. 제아무리 멍청한 자들이 황제와 황태자였다고 하지만 피를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가 걸었을 피의 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이실리스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이제 다 지나간 일. 그 일을 다시 꺼내 봐야 그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실리스.”

“…….”

저를 부르는 베르타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창문 틈으로 내려앉은 햇살이 그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검은 머리를 바라보면서 항구에서 본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도 저랬다.

“사랑해.”

갑자기 들려온 그 말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멈추어 서자 뒤에서 따르던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멈추어 섰다. 놀라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힘주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해.”

“그 말을 왜…….”

“매일 말해줄게. 사랑한다고.”

남들이 다 듣는 곳에서 저런 소리를 하는 베르타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실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어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너의 가족은 나와 내 아이뿐이야. 알고 있지?”

“당연한 소리를.”

그가 의도적으로 선황을 빼고 말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실리스는 그 부분을 집어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설 사람이었다. 이미 곁을 내어준 사람. 그 의미는 제법 컸다. 

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갈 때까지 이실리스는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녀를 옭아매던 진득한 그의 시선이 떨어지자 움직일 수 있었다. 시선만으로 사로잡혔다. 어느덧 베르타스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실리스. 브레고 지방의 와인을 기억하나?”

“기억하지. 그대와 함께 마셨던 술이 아닌가.”

“얼마 전에 그 술을 구했지.”

“또?”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술은 그렇게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베르타스는 그 술을 쉽게 구했다.

“내가 어디서 그 술을 구했는지 아나?”

“어디인가.”

“맨입으로 알려주기엔 너무 고급정보인데.”

장난기를 머금고 빛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베르타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에게 먼저 키스해주겠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뭐라 하였는가.”

“먼저 입 맞춰줘.”

“나와 거래를 하자는 것인가?”

“이건 거래도 아니지.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먼저 입맞춤을 받아보고 싶은 남자의 미련쯤으로 여겨줘.”

계속해서 속삭이는 그의 밀어에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붉어지지 않은 얼굴에 괜히 부채질을 하면서 그녀가 그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나비 같은 손놀림에 따라 그가 고개를 내렸다.

“이따 밤에.”

“약속하였어.”

“라르헨의 황제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

“그렇다면 좋아.”

귀를 대고 있던 얼굴을 돌려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댄 베르타스가 말했다.

“이건 선금.”

“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의 입이 열렸다.

“힐렌튼의 황궁.”

“뭐?”

“힐렌튼의 황궁 창고에 그 와인이 한가득 쌓여있었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브레고 지방의 와인이 힐렌튼 제국의 창고에 쌓여있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지방은 라르헨 제국의 가장 남단에 있는 지방이었다.

‘제국을 가로지르는 무역은……. 그랬군.’

일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실리스가 무언가를 눈치챘다. 밀레르 후작의 영지가 그 즈음에 있었다. 그가 획책한 일은 대체 무엇인가.

‘설마 사이르카 후작도 그의 짓인가.’

그의 영지 근처에 사이르카 영지도 자리하고 있었다. 변경백은 국경을 전전하고 있었으니 사이르카 후작의 곁에서 어린 그를 보살핀 밀레르 후작을 알고 있었다. 브레고 지방의 와인을 힐렌튼에 넘기고 그가 얻어낸 것은 무엇인가. 왜 그는 그런 짓을 하였는가. 계속되는 의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얼굴빛이 흐려지자 베르타스가 다시 속삭였다.

“함께 찾아보자.”

“함께?”

“이제 혼자서 생각할 필요가 없지. 내가 곁에 있잖나.”

베르타스의 말에 복잡했던 머리가 단박에 밝아졌다. 그랬다. 이제 더 이상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베르타스 힐렌튼. 곧 그녀의 옆자리에 서게 될 남자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믿어도 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힐렌튼을 통째로 그녀에게 바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자. 그게 바로 베르타스였다.

“나를 불러놓고 연애 놀음이라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페일러스였다.

“오랜만일세. 베르타스.”

“오랜만이로군.”

베르타스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페일러스의 손을 강하게 잡으면서 인사했다. 많은 것을 압축하고 있는 한마디였다. 아는 사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친밀하게 말하는 둘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실리스는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결국, 성공하였군. 자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래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이뤄낼 줄이야.”

아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페일러스에게 베르타스가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