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161)

61화.

그러나 평안했던 시간도 잠시뿐, 전령이 그녀에게 소식을 전했다.

“급보입니다, 폐하.”

멀리서 달려오며 외치는 마법사의 말에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밀레르 후작이 황족의 정통성을 증명하라면서 나섰습니다.”

“뭐라고?”

황족의 정통성에 대한 증명. 그것은 나라를 이을 후계가 생기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지나가는 일이었을 뿐 이렇게 대놓고 증명을 요구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베루스 공작을 불러들여라.”

“명을 받듭니다.”

소식을 전해온 전령이 그대로 나가자 이실리스가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가면서 베르타스가 물었다.

“황족의 정통성?”

“황족의 혈통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있을 때만 가능한 요구지. 그런데 지금? 라르헨의 귀족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굳이…….”

“그러니 요구한 거로군.”

“그렇군.”

베르타스의 말에 금세 상황을 파악한 이실리스였다. 귀족들은 이제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실리스에 의해서 획책했던 모든 일이 어그러졌고 황가에 반대하는 불순한 사상을 가졌던 수많은 귀족이 피를 흘렸다. 누군가는 목숨을 내놓았고 누군가는 재산을 누군가는 작위를 내놓아야만 했다.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일은 단 하나. 황족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황족의 정통성 증명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미 그녀의 집무실에는 베루스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귀족 중 누구인가 했더니 밀레르 후작이었나?”

“폐하. 신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공작은 당연히 몰랐겠지. 알았을 거라 생각하지 않네.”

 베루스 공작은 그녀의 수호자.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수호의 맹세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베르타스가 그들의 말을 듣고 눈썹을 움찔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가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황족의 정통성을 증명하라니. 내가 황족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황태녀가 황족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증명하라는 대상이 누구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베루스 공작이 말을 뱉었다.

“폐하의 혈통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내가 황족이 아니면 누가 황족이란 말인가.”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만 밀레르 후작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자네 설마 저 헛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겠지?”

이실리스의 말에 베루스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하루 전. 밀레르 후작의 저택에서 베루스 공작은 후작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네.”

“이상한 소리?”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지.”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하나.”

밀레르 후작의 말을 웃어넘기면서 베루스 공작이 술을 넘기려 할 때였다.

“지금의 황제께서 황족의 혈통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지.”

목으로 넘어가던 술이 걸렸다. 켁켁대는 베루스 공작을 아랑곳하지 않고 밀레르 후작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황제가 황족의 혈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면, 그저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서 라르헨의 귀족들을 농락했다면 자네는 어찌할 텐가.”

“무슨 헛소리인가. 내가 그 자리에…….”

“자네. 황제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나?”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족이 탄생하는 자리에는 산파와 황족 그리고 황실에 이름을 올린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는 황족의 표식이 분명하네.”

“선황께서는 붉은 머리카락도 타고 나지 않으셨고 군청색이라고 하기엔 색이 옅지.”

“그야 항상 그리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지금의 황제께서는 그리 타고 났지?”

“그야 선황의 부군께서…….”

“선황의 부군이 붉은 머리카락이었지. 그러나 그는 황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붉은 머리카락을 타고난 자.”

“선황의 부군이 어찌 됐든 지금의 황제께서는 선황의 피를 이은 분!”

베루스 공작의 말에 밀레르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 황족의 혈통이어서 붉은 머리카락과 군청색 눈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저 마력이 강력한 자들의 특징이 붉은 머리카락과 군청색 눈이라면 어떨까.”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가! 그건 황족을 능멸하는 말이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 기억하는 자는 많지 않지만, 황제가 황족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네.”

“그건 헛소문이야!”

“사이르카 후작도 그 소문을 들었지.”

“자네…… 자네가 사이르카 후작을 끌어들인 것이었나?”

“어린 후작 하나 끌어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그 후작이 아버지와 떨어져 정에 굶주린 아이였다면 더욱.”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밀레르 후작을 보면서 베루스 공작은 몸을 떨었다.

“미쳤군, 자네!”

“황제께서 귀족의 권리를 인정해 줬다면 나도 나서지 않았을 걸세.”

“라르헨은 황족의 마력에 기대어 사는 나라일세!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황족의 권위에 흠을 내면 어쩌자는 겐가!”

“황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이번 일로 밀레르 후작의 딸도 붙잡혔다. 사이르카 후작의 무리와 함께하는 모임에 참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 그의 딸은 그 모임에 참여하여 황제를 끌어 내리는 문서에 서명을 남겼고, 그 일로 감옥에 갇혔다. 그의 딸이 그에게 먼저 와서 상의했다면 그는 딸을 감추었을 것이다. 너는 나서지 말라고.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획책한 모든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가 없었다.

“자네 딸 때문에 이러는 것인가? 이번 일은 깊게 관여한 자가 아니라면 괜찮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

베루스 공작의 말에 밀레르 후작은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누가 알까. 이 모든 일을 획책한 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밀레르 후작은 오랜 시간 선황에게 연심을 품었다. 갑자기 선황의 부군이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가장 유력한 부군 후보였다. 선황도 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주었으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원했다. 하여, 선황의 부군을 전쟁터에서 죽이려고 했다. 화살을 맞은 채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살아남기란 요원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선황이 저를 새로운 부군으로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였다. 지금의 황제가 어느 정도 자라자 바로 길을 떠난 선황이었다.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인가.”

“지금의 황제가 선황의 딸이 분명하다면 왜 선황은 어린 딸을 버리고 길을 떠났을까.”

“그야 힘드셔서 그런 것 아닌가!”

베루스 공작의 말에 밀레르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힘들더라도 유일하게 남은 딸을 버리고 길을 떠나기는 어렵지. 그렇게나 사랑하는 남자의 딸이 아닌가.”

밀레르 후작의 말에 베루스 공작의 입이 다물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선황의 친딸이 아닌 게지.”

“뭐?”

“아이르의 경우가 있지 않나. 너무도 사랑하여 친딸이 아닌 아이를 황족으로 받아들인 거야.”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자네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나는 지금의 황제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의심했어. 그리고 그 의심은 이제야 확신이 되었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 그럼 대체 언제부터……?”

베루스 공작은 밀레르 후작의 말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황가에 충성하는 줄 알았던 친우가 앞뒤가 다른 자였다니. 그렇다면 자신과 여태까지 주고받았던 많은 이야기가 전부 다른 귀족들에게 들어갔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네에겐 미안하게 되었군.”

“자네는 이제 나의 친우가 아닐세.”

“한낱 황족 때문에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버리겠다는 건가?”

“…….”

밀레르 후작의 물음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베루스 공작은 뒤로 돌아섰다.

“그 문을 나가는 순간 우리는 적이 될 걸세.”

“나도 알아.”

밀레르 후작의 경고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하면서 베루스 공작은 앞으로 걸었다. 오랜 친우와 갈라서는 그의 마음이 시렸다. 입술을 깨문 곳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피를 손으로 훔치며 베루스 공작은 계속해서 걸었다.

* * *

“폐하 제가 믿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중요한 것은 밀레르 후작이 황제의 정통성을 증명하기를 요청했고, 폐하께서는 그것을 증명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베루스 공작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자네 괜찮나?”

이상함을 느낀 이실리스가 그에게 물었다. 지친 듯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은 베루스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신의 상태를 걱정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한시가 급합니다 폐하. 이미 밀레르 후작은 귀족들을 상대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황족이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어제 밀레르 후작에게 들은 말을 감추며 전하지 않는 베루스 공작이었다. 공작이 생각해도 헛소리였다. 

‘지금의 황제가 황족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황족이란 말인가. 아니, 황족의 피를 이은 자가 있긴 있는 것인가.’ 

베루스 공작은 문득 든 생각을 떨쳐버리며 말했다.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으신 것을 알지만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폐하.”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서 헛웃음이 다 나오는군.”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는 이실리스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베루스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공작이 걱정하는 바는 알겠으나 그들이 하는 소리는 헛소리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네.”

“신도 그리 생각합니다.”

“오늘은 피곤할 터이니 퇴궁하고 내일 다시 오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의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나는 베루스 공작의 뒷모습이 왜소해 보였다. 그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베르타스가 이실리스를 향해 말했다.

“황족의 정통성을 증명하라?”

“가끔 있는 일이지. 황제는 강력한 마력을 타고나야 하는데 황제의 마력이 미약하다면 황족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에 생긴 악습이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근래엔 저것을 요구한 귀족들이 없군.”

“…….”

“선황의 치세에도 없었고, 그 이전에도 없었어. 그런데 라르헨의 황제 중에서도 마력이 손에 꼽히는 나를 물고 늘어졌단 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실리스가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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