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랬다. 그와 함께 본 하늘은 아주 예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한가로이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따뜻한 햇볕, 자신의 손을 쥔 커다란 손, 그 손에서 넘어오는 온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실리스.”
“왜 부르지.”
“사랑하고 있어.”
베르타스의 말에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해 돌아갔다.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로 베르타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지켜주마.”
다물린 그의 턱선을 올려다보면서 이실리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렇게 고집스러운 면도 베르타스다웠다.
“라르헨의 황제를 지켜준다고 말하는 이는 많아.”
“아니. 난 라르헨의 황제인 너를 지킨다는 것이 아니야. 나의 아이를 낳아준 너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가?”
“당연히 다르지.”
그제야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라르헨의 황제였기에 널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너이기에 나는 너를 사랑해.”
묵직하게 전해오는 그의 진심에 이실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가슴에 묵직한 것이 ‘턱’ 하고 올려진 기분이었다.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을 삼키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였나?”
“그래. 내가 너를.”
“라르헨의 황제가 아닌 날?”
“처음 우리가 만난 날을 기억하나?”
그녀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며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이실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그 끝에 입 맞추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때도 넌 라르헨의 황제가 아니었어. 그저 위험에 빠진 여인이었을 뿐.”
자신의 말에 입을 다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다시 말했다.
“그런 여인에게 나는 너무 깊게 빠져버렸지.”
“그래서 후회하는가.”
어딘지 모르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이실리스의 눈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나는 너에게 빠져있지만, 후회 따윈 하지 않아. 내가 힐렌튼에 한 짓을 보면 모르겠나.”
“제대로 소식을 차단했더군.”
“애 좀 썼지.”
정말 어렵긴 했다. 황성 곳곳에 숨어있는 첩자들을 일일이 색출해서 처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각국에 그가 섭정공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정리가 끝나자마자 라르헨으로 넘어왔기에 그의 부관인 헥터 경이 그곳에 남아서 군사를 정비하고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힐렌튼의 곳곳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나라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라르헨으로 향하는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의 곁으로. 그것이 그의 유일하게 남은 목표였다.
“베르타스. 힐렌튼을 라르헨으로 넘기면 돌이킬 수 없어.”
“알고 있어.”
“네가 사랑하는 조국이 없어져도 괜찮은가?”
“사랑하는 조국이라니.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이제 세상에 단둘이야. 너와 우리 아이.”
그의 말에 숨을 들이켜는 이실리스가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실리스.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내가 널 사랑한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야. 나라를 통째로 넘긴 폭군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 네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베르타스.”
“부황께서 돌아가시고 나를 구해 준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열 살에 황족의 위를 포기했을 때, 나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복수심.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지. 그러던 중, 네가 나타났고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게 되었어. 그 미래가 설령 어둠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너와 함께 걸을 거다. 네 옆에서 널 지키면서 걷겠어.”
이실리스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그러니 그대. 나에게 입술을 내어주겠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아오는 이실리스의 허리를 안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달았다.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감미로운 술을 마시는 것처럼 그를 몽롱하게 만드는 키스였다. 달큰한 이실리스의 체향이 그를 자극하면서 그에게 깊은숨을 내어주었다. 그 깊은숨을 거칠게 집어삼키며 잠식하는 베르타스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게 사랑이로군.’
이실리스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그의 허벅다리 위에 앉히면서 입술을 맞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했다.
“우는 것은 내 품에서만. 다른 놈에게 그 귀한 눈물을 보여주면 안 돼.”
“별스런 소리를 하는군.”
언제 눈물이 고였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눈가를 핥으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속삭였다.
“나와 함께 해줘. 그대.”
“지금도 함께하고 있지 않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잖나.”
“생각해 보겠어.”
“쉽지 않군.”
“라르헨의 국부가 되는 일이 쉬울 리 있나.”
장난스럽게 눈매를 휘며 말하는 이실리스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웃었다. 정말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 * *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우스만이 발걸음을 돌렸다. 베르타스가 나타난 그 순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전하.”
“아무 말도 하지 말게.”
“그래도…….”
“저렇게 웃는 여인이었나.”
이실리스가 저리 환하게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우스만은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그녀가 좋아 빠져들었던 그의 과거가.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10개월간 이실리스가 그리 웃는 것은 보지 못했다. 어릴 적처럼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던 그녀가 이젠 다른 방식으로 웃고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이실리스는 이제 없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인가.”
부채감도 있었다. 그가 이실리스의 전령을 막고, 성으로 들어오려는 베르타스의 전령을 막았다. 아이를 잃어버린 그녀가 아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차단한 우스만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저질렀던 일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이실리스가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것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전하.”
“되었네. 짝사랑이 너무 길었군.”
“전하…….”
그렇게 한 남자의 사랑이 피지도 못한 채 지고 말았다.
* * *
이실리스는 베르타스의 어깨에 기대어 계속 생각했다. 라르헨의 국부라니. 국혼을 한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국혼을 피해 도망친 그녀가 만났던 사람과 국혼이라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울렁이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베르타스가 힘주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온한 느낌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이 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베르타스를 느끼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나.”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속삭이는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다시금 말했다.
“조금 더 일찍 왔다면 좋았을 것을.”
“…… 전령이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
“알았다면…….”
“알았다면 어떻게든 너에게 왔을 거야.”
그녀의 머리에 계속해서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 몸짓에 담겨 있는 절실함에 이실리스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가 조금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밤마다 정원을 헤매는 날도 줄어들었겠지. 갑자기 든 생각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인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게 된 것인가.
‘내가 대체 왜…….’
베르타스 힐렌튼이라는 자에게 이렇게나 마음을 주었나.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얻게 된 마음의 병은 그녀를 계속해서 좀먹고 있었다. 약해진 스스로를 다잡으며 이실리스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베르타스에게서 벗어나 일어서려는 그녀를 그가 꽉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
“내게서 벗어나려 하지 마, 이실리스.”
변한 그녀의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알아챈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그의 애잔한 목소리에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사랑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베르타스의 진심 어린 애정을 매정하게 쳐낼 수 없는 그녀였다. 망설이는 그녀의 귓가에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나에겐 너밖에 없어 이실리스. 날 거부하지 마.”
“베르타스.”
“너 하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온 나야. 그러니 내게 마음을 내어줘.”
“이미 넌 나의 마음을 가져가지 않았나.”
“그것으론 부족해. 더.”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잘라 말하며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리는 베르타스를 거부할 수 없었다.
“간지러워.”
“간지럽기만 한가?”
이실리스의 말에 욕망을 담은 목소리로 답하는 베르타스였다. 낮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몸이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하늘은 실컷 보았나?”
“실컷 보기 전에 얼굴로 가렸으면서 무슨.”
“그럼 다시 보면 되는 것을.”
다시 이실리스를 의자에 눕히자 다시 한번 시녀가 담요를 들고 다가왔다. 내밀어지는 담요를 거절하지 않으면서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몸에 담요를 덮었다. 보드라운 담요의 느낌에 선선한 바람 그리고 따뜻한 베르타스의 체온까지. 눈이 절로 감겼다.
‘잠들면 안 되는데…….’
그 생각을 끝으로 이실리스는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도 알지 못하는 편안한 잠이었다.
* * *
제 무릎을 베고 누워 곤히 잠든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살포시 내려앉는 입술은 깃털같이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녀들이 그와 이실리스가 정원에 앉은 그때부터 뒤돌아 서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그의 품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이실리스의 표정에 베르타스는 웃었다. 얼마만의 여유인가. 그녀와 헤어져 있는 동안 그도 힘들었다.
주변에서 도움을 준다며 도와줬지만, 아이를 추단하기가 힘에 겨웠다. 울면 괜히 아픈 것인가 걱정이 되었고 제대로 먹지 않으면 어디 안 좋은 것인가 염려가 되었다. 아이도 아이였지만 그 아이를 지키는 것도 힘에 겨웠다.
베르타스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귀족들이 그가 아닌 아이를 노렸다. 아이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그뿐이랴. 황족들을 처단하고 아이를 황위에 올린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그 뒤였다. 그를 견제하는 귀족들을 하나씩 색출하느라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그것은 그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이전에도 느꼈던 아이러니한 감정이 그에게 밀려들었다.
‘적국이나 다름없는 라르헨에서 이렇게 편안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