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161)

59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는 저의 마음을 그가 어찌 안다는 말인가.

“나를 안다니. 그거 참 이상한 말이로군.”

“뭐가 이상하지?”

“그대와 나는 타인이 아닌가.”

“아니지. 타인으로 분류하기엔 우리의 시간이 너무 아깝군.”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연인. 일단 그것부터 시작하지.”

* * *

그날 밤. 이실리스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베르타스에게 들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신경이 쓰여 잠이 오질 않았다. 연인이라니. 그런 단어로 베르타스와 저의 관계를 단정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대체…….’

어떤 단어로 그와 엮이고 싶은 것이었단 말인가. 연인이라기엔 너무 부족했다. 이실리스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베르타스와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었다. 헤어질 수 있는 관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실리스는 그러했다. 방안을 서성이던 그녀는 바람이라도 쐴까 하여 침소의 문을 열었다. 한 발짝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목소리가 잡았다.

“이실리스.”

문 바로 옆에 기대어 있던 베르타스였다.

“여기서 뭐 하는 겐가.”

“내가 누구지?”

“뭐?”

“내가 누구냐고.”

“베르타스 힐렌튼. 대체 무슨 소리를…….”

말을 끝내지 못한 채 그에게 끌어안겼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실리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있어 줘.”

“뭐라고?”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제발.”

그의 목소리가 너무 절실하게 들려 이실리스는 밀어내려던 손을 다시 내렸다. 한참을 그에게 안겨있으니 나지막하게 베르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걸어 나오는 순간 너무 두려웠어.”

“........”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너를 만날까 봐 두려웠다. 아직도 아이를 찾는 너를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서웠어.”

그녀의 몽유병을 알고 있는 듯한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자 베르타스가 다시금 속삭였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그대. 너를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어.”

“베르타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 이실리스 나를 원망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아니. 내 잘못이다. 약한 너를 알면서도 너를 두고 떠난 나의 잘못이야.”

“라르헨의 황제는 약하지 않다.”

“아니. 나는 라르헨의 황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이실리스.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는 나에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 그런 너를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베르타스 힐렌튼.”

경고하듯 낮아진 목소리에 그가 그녀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후회로 점철된 그 표정에 이실리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러면?”

“아니야.”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베르타스의 말에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저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더할 수 있단 말인가. 여태까지 고민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베르타스 힐렌튼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온전히 마음을 내어주었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도 한잔하겠나?”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베르타스와 함께 걸어 나왔던 방으로 들어섰다.

“이실리스.”

제 몸을 돌리고 입술을 부딪쳐오는 베르타스를 거절할 수 없었다.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입술을 덮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허리를 감아오는 손을 느끼면서 몸에 힘을 풀었다.

* * *

정원에서 이실리스를 기다리고 있던 우스만은 시녀에게서 말을 전해 들었다.

“이실리스가 괜찮다고?”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다행히 폐하의 병증이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 되었군.”

베르타스 힐렌튼이 오자마자 그 병증이 나아졌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실리스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은 그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마음의 짐을 덜었군.’

이실리스가 보낸 전령을 막고 베르타스에게서 오는 사람을 막은 막연한 부채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베르타스와 같은 선에 서 있게 되었다. 그에게 미안한 감정 따위는 갖지 않아도 될 듯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모르겠지만.’

우스만은 혼자 웃으면서 정원에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후련했다.

* * *

햇살이 나붓하게 그녀의 눈썹에 내려앉자 절로 눈이 떠졌다.

“더 자.”

“아니. 일어나야겠군.”

“아직 이른 시간이니 더 자.”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아.”

울긋불긋한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베르타스가 줄을 잡아당겼다. 시녀들이 이실리스의 의복을 들고 들어왔다.

“이따 보지.”

“그거 남첩에게 하는 말 같아서 별로군.”

“남첩?”

헛소리를 한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좋아. 그대가 웃어준다면.”

“가야겠네.”

의복을 갖춘 이실리스가 돌아서자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할 일이 없는 저는 여기서 폐하를 기다리겠습니다.”

“뭐?”

“부디 내일도 소신의 방에 들려주시길.”

“흰소리를 하는군. 여긴 내 방이야.”

“어찌 됐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하는 베르타스에게 웃음을 남기고 이실리스가 방을 나섰다. 행복했다. 장난스러운 베르타스가 곁에 있는 것이 행복했고 저를 믿어주는 그가 있는 것이 행복했다. 그와 함께 아이가 돌아온 것도 행복했다. 행복하니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그녀의 앞에 우스만이 나타났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우스만.”

“베르타스 힐렌튼이 돌아와서인가?”

“우스만 칼리파.”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그대가 그동안 나의 병증을 위해 노력한 것을 알고 있네. 무엇을 원하나.”

“원하면 다 들어주나?”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라르헨의 국부자리를 나에게 줘.”

“헛소리하는군.”

우스만의 말에 가볍게 답하며 이실리스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왜, 그 자리는 베르타스 힐렌튼에게 줘야 하는 자리라 안 되나?”

“우스만 칼리파.”

“나는 왜 안 되는 거지?”

이실리스에게 물어도 소용없었다. 그녀도 알지 못했다. 왜 베르타스 힐렌튼이 아니면 안 되는가. 왜 그가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 줄 수 없네.”

“이실리스.”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베르타스 힐렌튼이 오해할까 봐 그러나?”

“그는 그렇게 속 좁은 자가 아니야.”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반응하는 우스만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베르타스 힐렌튼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만 알고 그녀에게 자상했으며 그녀의 어떤 허물도 덮어주는 자. 그게 바로 베르타스 힐렌튼이었다.

이실리스에게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우스만은 결국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보상 따윈 필요 없어.”

“왜지?”

“그런 것을 얻으려고 너를 도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은 너. 그러나 네가 나에게 오지 않으니 나의 노력도 헛거로군.”

“미안하게 되었군.”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짓는 이실리스의 얼굴에 우스만은 직감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그가 어떤 태도를 보여도 이실리스는 그에게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떠날 때가 된 것인가.’

길고 길었던 시간이었다.

“이실리스.”

“왜 부르지?”

“미안.”

“뭐라 하였나.”

“미안하다고 했어.”

“미안할 것이 무언가. 외려 내가…….”

“아니. 미안해.”

그랬다. 미안했다. 그녀가 마음의 병을 얻게 한 것이 미안했고 그녀에게 베르타스 힐렌튼을 떼어놓기 위해 얕은 수를 쓴 것이 미안했다. 그것으로 인해 웃음을 잃고 몽유병을 얻은 그녀에게 미안했다. 모든 것을 고백하지 못하는 저의 비겁함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우스만이 이실리스를 향해 말했다.

“한 번만 용서한다고 해 주겠어?”

“용서?”

“그래. 용서.”

“그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나에게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 용서하겠네.”

“고맙군.”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는 우스만을 잡을 수 없었다. 심란한 기분에 이실리스는 집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정원으로 돌렸다. 정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정원으로 향한 이실리스가 테이블에 앉자 시녀가 준비된 차를 따랐다. 짙은 차향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차를 한 모금 넘기는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베르타스였다.

“어쩐 일인가.”

“멀리서 보기에 피곤해 보여서.”

“그러면?”

“쉬게 해 주려고.”

“그대가?”

“그럼.”

이실리스에게 손을 내밀며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부디 나에게 그대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기꺼이.”

사붓이 손을 뻗는 이실리스의 손을 잡아 베르타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황궁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도 없는 곳.”

“이 황궁에 아무도 없는 곳은 없어.”

“우리 둘이 있다면 알아서 눈을 피하겠지.”

당당한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눈이 커졌다가 사르르 접혔다. 모처럼 보게 된 그녀의 미소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베르타스와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정원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과는 다르게 고작 정원이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정원에 놓여있는 기다란 의자에 앉으면서 이실리스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누워.”

“뭐라 하였나.”

황제인 저에게 정원의 의자에 누우라고 하다니.

“하늘을 본 적이 언제지?”

“베르타스.”

“하늘을 본적이 언제냐고 이실리스.”

아주 오래되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가 되고 난 후, 단 한 번도 하늘을 보고 누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배웠고, 누구도 그녀에게 하늘을 보자고 말하지 않았다.

“누워봐.”

“허나.”

“괜찮으니. 여기 누워.”

반대쪽에 앉으면서 허벅지를 ‘툭툭’ 치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이실리스가 망설였다. 그녀의 망설임에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어깨를 잡아 눕혔다. 머리가 그의 허벅지 위에 안착하자 바로 하늘이 보였다. 머리 위에 있는 무거운 황관을 들어 곁에 있는 탁자 위에 두었다. 어설프게 누워있는 이실리스의 머리를 이리저리 옮겨 가장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주는 베르타스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시녀 하나가 담요를 들고 왔다. 시녀를 향해 손을 내젓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조용히 말했다.

“예쁘지 않나. 오늘 날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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