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161)

58화.

“뭐?”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쥐고 놓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유하게 구니 나에게 이실리스를 빼앗긴 것이 아닌가.”

“굉장히 자신만만하군 그래. 좋아. 그렇다면 밤의 이실리스를 알아서 달래보게.”

“이미 보았네.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는 것과 직접 느끼는 것은 다르지.”

그 말을 끝으로 우스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걸어가는 걸음걸음에 화가 묻어난다는 것은 그와 베르타스만이 알았다.

“다혈질은 여전하군.”

우스만이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그의 태도에 베르타스는 생각에 잠겼다. 우스만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밤의 이실리스라니.’

지난번 우스만과 보았던 그 모습 이외의 모습이 더 있단 말인가. 궁금했다. 그리고 죄책감에 잠겼다. 이실리스에게 어떻게든 소식을 전할 것을. 아이는 제가 잘 데리고 있다고. 다쳐서 누워있다는 다한 경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베르타스는 메릴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

“황족의 유모는 어디에 있는가.”

“황태녀 님의 방에 계십니다.”

“안내하게.”

베르타스의 물음에 시녀 하나가 답하자 그가 명령했다. 그의 말에 망설이는 시녀들이었다. 시녀들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황족의 친부이자 라르헨의 국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스만 칼리파는 여태까지 그들의 황제에게 온정을 베푼 사람이었다. 어느 쪽으로 서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녀들은 우스만과 이실리스가 잘 되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베르타스가 떠나고 난 후, 마음의 병을 얻은 이실리스를 알고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녀들의 얼굴에서 망설임을 읽은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실리스와 나의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 너희들은 너희의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황궁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눈에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것이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의 불문율. 다시 말하겠네. 안내하게.”

약간의 경고를 담고 있는 베르타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시녀가 나섰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시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베르타스가 깨달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우스만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의 원천을. 그가 없는 동안 그는 라르헨의 황궁에 있는 이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비록 이실리스의 마음은 얻지 못하였으나 그녀를 곁에서 모시는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렇기에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이었다.

‘정작 본인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을.’

주변을 파고든 것은 칭찬할 만했다. 그러나 모든 일의 결정은 이실리스가 하는 것. 황궁에 있는 이들은 그녀의 손발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없다면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그런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자신만만한 우스만 칼리파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그의 앞에서 걷던 시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방문을 두들겼다.

“시녀장님. 힐렌튼의 섭정공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베르타스의 시야에 아이가 들어왔다. 매일 같이 있었는데 며칠 곁에 두지 않았다고 허전했다. 아이도 그러했는지 베르타스를 보자마자 자지러지게 울었다. 갑자기 우는 아이 때문에 당황하는 메릴에게서 아이를 받아든 베르타스가 아이를 향해 웃었다. 그의 품이 편안했던지 금세 잠이 드는 아이의 모습에 감동했다. 이 성안에 적어도 그의 편이 한 명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는 베르타스였다.

“황태녀께서 불안하셨던 것 같습니다.”

“불안?”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항상 나와 함께 자다가 이제 떨어졌으니.”

“항상 함께 계셨습니까?”

“전시에 아이를 따로 두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한을 어디다 풀겠는가.”

베르타스의 말에 메릴의 입이 다물렸다. 부드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메릴을 향해서 물었다.

“다한 경이 너의 집에 있다고 하였나?”

“치료 중입니다만.”

“입궁하라고 하게.”

“언제…….”

“지금 당장.”

그의 말에 메릴이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의 베르타스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적어도 메릴이 본 그는 그랬다. 머뭇대는 기색을 읽은 베르타스가 메릴에게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사막의 독에 당했다고 하여 정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힐렌튼의 기사이자 나의 수족일세. 나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벌을 내려야 하는 것도 나고 그가 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어야 하는 것도 나야. 그러니 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기다리지.”

“저는 지금 황태녀 님을 돌봐야 합니다.”

“아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장 가보게.”

더는 듣지 않겠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메릴이 다른 시녀를 불렀다. 메릴의 부름에 방으로 들어온 시녀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한 그녀가 베르타스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방으로 들어와 문 옆에 얌전하게 서 있는 시녀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던 베르타스가 다시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다한이 메릴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각하.”

“어서 오게. 다한 경. 많이 늦었군.”

“각하의 명을 제때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랬다고 하더군. 무슨 일이 있었나.”

아픈 사람에게 꽤 냉정하게 묻는 베르타스의 말에 흠칫하는 메릴이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령이 제때 서신을 전하지 못하였기에 그녀에게 마음의 병이 생겼다. 서신만 제때 도착했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가 서신을 보낸 지가 언제인가. 아이를 발견하고 나서 바로 보냈었는데 10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궁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었다.

“각하의 명을 받고 라르헨의 수도에 들어온 것이 벌써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랬나?”

“라르헨의 성에 입궁할 방법을 찾았으나 어려웠습니다.”

베르타스는 천천히 이어지는 다한의 말을 들었다. 그가 황성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를 방해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칼리파 제국?”

“그렇습니다. 경계가 삼엄했습니다.”

“그랬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우스만 칼리파. 그자의 짓이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그래놓고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해?”

“각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뭐가 말인가.”

“칼리파 제국 쪽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닐까요.”

베르타스와 이실리스 그리고 우스만의 관계를 모르는 다한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점점 새하얗게 변하는 다한의 얼굴에 베르타스는 그제야 의자를 권했다. 다한이 의자에 앉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서신을 저 여자에게 준 것인가?”

“그러합니다. 제가 다친 몸으로 라르헨의 황성에 들어오는 것은 어려웠으니까요.”

“뭘 믿고?”

“저를 보는 눈을 믿었습니다.”

꽤 곧은 눈이었다고 웃으며 말하는 다한에게 웃음을 돌려주며 베르타스가 메릴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는군. 잘해보게.”

“네?”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다한이 멋쩍은 표정으로 메릴을 바라보았다. 귀 끝이 빨갛게 변한 것으로 보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는 이가 라르헨의 수석 마법사이니 가서 치료를 받게.”

“알겠습니다.”

“다한 경을 알뤼르에게 데려다주게.”

“수석 마법사 님은 바쁘십니다.”

“내 부탁이라면 들어줄 걸세. 혹여 안 된다고 하면 나에게 다시 오게.”

아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알뤼르가 저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이미 알뤼르에게 베르타스는 라르헨의 국부나 마찬가지였다. 가끔 인정하기 싫은 표정으로 틱틱대기는 했으나 알뤼르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곁에 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려는 베르타스의 집요한 성정을 지켜본 알뤼르는 그가 이실리스를 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중적인 면을 이실리스가 알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베르타스는 아이의 곁으로 갔다. 아이에게서 들리는 편안한 숨이 그를 편안하게 했다.

“내 딸.”

자그마한 손을 쥐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나와 이실리스의 딸.”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아이였다. 행여 혼자서 아이의 이름을 지으면 이실리스가 서운해할까 두려워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알았지만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다.

“모든 것을 다 쥐여 주마. 네 손에.”

“그대가 그리하지 않아도 내가 해 줄 텐데.”

이실리스가 들어오며 말했다. 속삭이는 베르타스의 말을 들은 그녀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메릴은 어디 갔지?”

“내가 시킬 일이 있어 어딜 다녀오라고 했지.”

“그랬군.”

그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봐라. 그녀는 이미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의 행동이 도를 넘은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이 없는 이실리스였다. 그녀가 베르타스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일은 다 끝났나?”

“아직 남았지만.”

아이가 보고 싶어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에게 바짝 다가선 그녀가 아이의 보드라운 뺨에 살며시 손가락을 대었다.

“괜찮나?”

“나는 아직도 아이가 없어지는 꿈을 꾸네.”

“그럴 일 없을 거야.”

“정말 그러할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지키겠어.”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시선이 아이에게서 그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너와 아이를 지킬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젠 가지 않나.”

“내가 있을 곳은 너의 곁이야.”

“베르타스.”

“그러니 이실리스. 나에게 너의 곁을 내어줘.”

“베르타스 힐렌튼.”

“너의 곁에서 나의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나를 받아줘.”

“그대.”

“나의 몸도 마음도 모두 다 너의 것이야.”

이실리스의 귓가에 베르타스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더러 어쩌라는 겐가.”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을 내게 묻다니.”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한 그녀가 그를 향해 속삭였다.

“그러나 베르타스. 난 끌려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럴 리가.”

“아니었나?”

“당연히. 나는 너에게 질 수밖에 없어. 이실리스.”

“정말 그러한가.”

“물론.”

“그렇다면 증명해.”

“무엇을?”

“그대가 나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해.”

“그것은 너의 마음만이 알겠지.”

“나도 나의 마음을 잘 모르겠군.”

“걱정하지 마.”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내리까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베르타스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군청색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담자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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