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베르타스의 말에 우스만의 입이 다물렸다.
“그래서 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줄 걸세.”
“그게 쉬울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어렵겠지. 내가 힐렌튼을 가지는 것도 쉬웠을 거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차를 넘기며 말하는 베르타스에게 우스만이 외쳤다.
“좋아하는 여인이 힘들어하는데 그를 내버려 두고 떠난 이가 하는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군.”
“내가 그때 이실리스를 떠나 힐렌튼을 손에 쥐지 않았다면, 나에겐 아무런 기회도 없었을 거야. 그걸 잘 알지 않나?”
“반쪽짜리 황족에게 누가……!”
“그래. 너희들이 늘 말하는 그 반쪽짜리 황족. 그러나 힐렌튼은 그 황족에게 무릎 꿇었고, 그 황족의 아이에게 황제 자리를 넘겼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라르헨의 황녀이자 황위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될 거야.”
“마력이 없는 이에게 라르헨의 황제 자리를 준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네.”
“아, 못 들었군? 내 아이가 마력 발현을 하였어.”
“뭐?”
“정확히는 이실리스와 나의 아이가.”
* * *
어디서 소식을 접한 것인지 귀족들이 알현을 요청해왔다. 다들 지난날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들이었는데 듣다 지친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시류에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자들에게 황족의 교육을 맡길 수 없네.”
“염두에 두신 자가 있으십니까.”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곧은 시선을 마주한 귀족들이 눈을 피했다. ‘쯧’ 하며 혀를 찬 그녀가 베루스 공작을 향해 말했다.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에게 맡기겠네.”
“허나 폐하. 그는 이미 수석 마법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라…….”
“알뤼르.”
“네. 폐하.”
“어려운가.”
“영광입니다.”
알뤼르의 말에 귀족들은 수군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가 귀족들을 둘러봤기 때문이었다. 그가 황족을 찾아온 사실을 알고 있는 귀족들은 오히려 그에게 줄을 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
“되었네. 공작. 황족을 찾아온 자이고 황족이 마력 발현을 할 때 옆에서 돌본 자이니 차기 황제의 측근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이일세.”
“명을 받듭니다.”
이실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뤼르가 답했다. 냉큼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베루스 공작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이실리스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이미 내려진 결정이니 더는 듣고 싶지 않네.”
“그러나 폐하.”
“되었다 하질 않나. 황족이 마력을 발현하였으니 이제 그냥 황족이 아니라 황태녀. 곧 책봉식을 해야 할 듯하네. 공작이 힘써주시게.”
“명심하겠습니다.”
공작에게 아예 다른 일을 맡기면서 발언을 차단해 버리는 그녀였다.
“그렇다면 폐하, 국혼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황족의 생부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명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지금 라르헨의 황태녀께서 힐렌튼의 황제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후작, 그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게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실리스가 손을 들어 귀족들에게 말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전에는 사이르카 후작이라고 했다가 다시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라고 했다가 마지막으로 이젠 베르타스 힐렌튼인가?”
“폐하.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상황이 다른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나, 공작?”
“그러합니다. 폐하.”
“일단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세.”
“폐하.”
“조용히. 내가 마치자고 하였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실리스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황망히 바라보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지금이 기회일세. 힐렌튼을 차지할 수 있는!”
“그동안 베르타스 힐렌튼이 그곳을 수호하느라 넘보기 힘들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왔군.”
“일단 힐렌튼을 차지하면 그곳의 귀족들은 필요 없지 않나.”
“마도 제국에서 힐렌튼같이 기사 출신의 귀족들이 많은 곳을 흡수하려면 마법사들을 파견하면 될 텐데…….”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귀족들을 향해 한숨을 내쉬는 베루스 공작이었다. 그런 공작을 공작의 친우인 밀레르 후작이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러는가.”
“저들이 아무리 떠들어 봐야 뭘 하는가. 힐렌튼이 라르헨에 복속된다고 하여도 힐렌튼의 기사들은 베르타스 힐렌튼을 따를 걸세. 그들이 우리 황태녀님의 충복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헛생각들에 들떠서. 쯧!”
“저들이라고 그걸 모르겠나. 저렇게라도 떠들어서 불안감을 없애려고 하는 걸세.”
“불안감?”
“모르는가. 폐하의 표정을 보니 나는 알겠더군. 피가 흐를 걸세.”
“대체 왜?”
“황족을 멸시하고도 살아남을 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저들 중 대부분은 황태녀께서 마력이 없을 당시, 황제께 국혼을 강요했던 자들일세. 우리 폐하께서 그런 것을 잊을 리 없지.”
“하긴…….”
“그러니 공작. 걱정은 접어두고 술이나 한잔하세.”
“자네 집에 있는 술을 꺼내주는 건가?”
“물론.”
오랜 친우와 함께하는 술은 언제나 즐겁다며 베루스 공작이 앞서갔다. 그런 공작의 뒤에서 은밀한 웃음을 짓는 밀레르 후작이었다.
* * *
“승냥이 떼 같으니.”
“폐하. 건강에 좋지 않사옵니다. 진정하시옵소서.”
“내가…… 하아. 그래 진정해야지.”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지끈대는 머리에 손을 올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지자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왜 이렇게 피곤한 것인가.”
“회복 마법을 걸어드릴까요.”
“되었네. 자네의 마법은 나에겐 통하지도 않으니.”
마력의 격차가 너무나도 커서 알뤼르의 마법은 이실리스에게 작용하지 않았다.
“폐하. 들어가서 쉬심이…….”
“이실리스.”
베르타스였다. 그의 목소리에 알뤼르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무례하군.”
“자네는 나서지 말게.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니.”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정말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저어 보이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알뤼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음흉한 네놈보다는 차라리 단순한 우스만 칼리파가 나을 수도.”
“사막의 남자가 단순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냉정한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미소지었다. 알뤼르를 향해서 손짓하는 그녀에게 읍하며 그가 자리를 피하자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힐렌튼의 섭정공께서 한가하신가 보군.”
“그렇게 말하지 마. 이실리스.”
“그럼 섭정공을 섭정공이라 부르지 내 뭐라고 부르겠는가.”
“이실리스. 그대. 내가 너무 늦어서 서운한 것은 알겠지만 너무하는군.”
“이실리스.”
베르타스와 이실리스의 사이를 가르면서 우스만이 나타났다. 우스만 칼리파의 등장에 베르타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베르타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우스만이 이실리스에게 말했다.
“정원에 차를 준비해두었어. 쉬러 가겠나?”
“정원?”
“이 시간이면 늘 거기 나가 있는 것이 아니었나.”
“그랬지.”
말하면서 베르타스의 얼굴을 흘끗 바라본 이실리스가 가벼운 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함께 가겠나?”
* * *
차가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 향긋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적어도 그랬다. 베르타스는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들이켜고 있었고 우스만은 그 반대쪽에서 싱글거리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얄미워 보이는 그 모습에 이실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오랜 숙적을 만났으나 그 숙적이 제대로 기를 못 펴니 즐거울 수밖에.”
“오랜 숙적?”
“그럼 아닌가?”
우스만의 말에 베르타스가 묻자 가볍게 받아치며 우스만이 다시 말했다.
“이실리스. 조금 있으면 업무를 보러 들어가야 할 시간 아닌가?”
“그렇군.”
저의 시간을 꿰고 있는 우스만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대로 베르타스와 우스만을 두고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정원에 핀 꽃이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찻잔에만 시선을 두었다. 불편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결국 이실리스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베루스 공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일어서기가 무섭게 소식을 전해오는 시종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지. 두 사람은 계속 이곳에 있을 건가?”
“나는 여기서 차를 더 즐기다가 가겠어.”
“나도 그렇게 하지.”
남아있겠다는 우스만과 베르타스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실리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음에 보지.”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한 두 사람은 이실리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로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우스만 칼리파.”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숫제 원수를 만난 듯했다.
“그렇게 부르면 뭐하나. 이미 그녀는 변했어.”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
“왜 내 말이 틀렸나?”
“너의 생각일 뿐이라고 하였어.”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차를 넘기는 우스만을 분노에 찬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없었던 시간 동안 그녀의 곁을 지킨 것은 우스만 칼리파가 맞았으니. 베르타스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고생이 많았겠군.”
베르타스의 말에 우스만이 움찔했다.
“내 여인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자네 지금 뭐라 하였나?”
“내 여인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했네.”
“정말 나와 해보자는 것인가?”
“내가 자네와 무엇을 할 필요는 없지. 모든 것은 이실리스가 결정하는 것인데.”
차향이 좋았다.
“내가 없는 동안 노력했지만 너는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지.”
“뭐?”
“내가 아는 그녀는 너에게 마음을 주었다면 나를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야.”
“너를 받아들였다고?”
“그럼 아닌가?”
“너는 아직 그녀를 보지 못하여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너 때문에 괴로워한 그녀를 보지 못해서.”
“나 때문에 괴로워했으니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나뿐이지.”
자신감 넘치는 베르타스의 말에 우스만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실리스와 베르타스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저자는 저리도 당당한가.
“오만방자한 말이로군.”
“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 이실리스를 그만큼 알고 있는 나이기에.”
“너보다 내가 그녀를 안 시간은 더 오래되었어!”
“그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그녀와 마음을 터놓지 못하였다니. 남자도 아니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