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161)

56화.

거의 날 듯이 그들을 향해 뛰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제지하려는 시녀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베르타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비록 이곳에 손님으로 왔으나 엄연히 황녀의 아버지. 그러니 비켜서게.”

망설이던 기색의 시녀들은 흉흉한 베르타스의 표정에 길을 열었다. 질투심으로 눈에서 불꽃이 튀는 기분이었다. 이실리스를 끌어안고 있던 우스만이 베르타스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실리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베르타스는 더 가까이 다가섰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배신감을 눌러 삼키며 거칠게 안겨있는 이실리스를 돌려세웠다. 울고 있었다. 그녀가.

“이실리스.”

“베르타스?”

눈동자가 흐렸다. 그가 알던 이실리스가 아니었다. 눈물 젖은 얼굴에 흐린 눈동자는 흡사 정신을 놓아버린 누군가와 꼭 같았다. 아버지를 잃고 목숨을 끊은 어머니. 그래. 그의 어머니와 같은 눈동자였다.

“무슨 일이지?”

시선을 돌려 우스만을 향해 물으니 어깨만 으쓱할 뿐 아무런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녀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이실리스에게서 답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려. 그대.”

“베르타스. 우리 아이를 잃어버렸어.”

정신없이 그 말만 중얼거리는 이실리스를 보듬어 안으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아이는 잃어버리지 않았어.”

“아니야?”

“그럼. 우리 아이는 잠들어 있잖아. 너와 나의 아이.”

“잃어…… 버린 게 아니야?”

“내가 데려왔잖아. 너와 나의 아이. 우리 딸.”

“그럼 새로운 아이를 낳지 않아도 돼?”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새로 아이를 낳아?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베르타스가 싸늘한 시선을 우스만에게 던졌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열 번은 베었을 것이다. 빙글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니 이실리스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저자의 수작이 분명했다.

“우리의 아이가 있어. 이실리스. 아이를 낳을 필요는 없어. 우리 아이가 돌아왔어. 너의 아이가.”

“내…… 아이?”

“그래. 너와 나의 아이.”

“…….”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으며 쓰러지는 이실리스를 안아 들었다. 형형해진 그의 눈빛에 다들 시선을 피했다. 오직 우스만 칼리파만이 도전적으로 그 눈빛을 받아쳤다.

“이야기는 들었지. 힐렌튼 제국을 통째로 라르헨에 넘기는 조건으로 국부로 받아달라고 했다지?”

“우스만 칼리파.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대체 무엇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냥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나?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위로해 준 것은 네가 아닌 나였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가?”

“네놈!”

“쉿. 그녀가 잠에서 깨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마 또 울면서 아이를 찾을 텐데.”

“여기서 기다려.”

거의 으르렁대다시피 하면서 말을 던진 베르타스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실리스의 몸이 너무 가벼웠다.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몸에 베르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하디귀한 사람이었다. 제국의 황제였고 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처참한 그녀의 상황을 목도한 베르타스에게로 칼에 베인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는 그였다.

* * *

이실리스를 침대 위에 눕혔다. 베르타스는 이런저런 생각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꺼풀이 열렸다.

“이실리스.”

그의 부름에 또렷하게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신께 감사했다.

“정신이 드나?”

“내가 또…… 나갔나?”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랬나.”

“나도 잘 모르겠군.”

고개를 젓는 그녀의 얼굴에 짙은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가냘픈 그녀의 손을 꼭 쥐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내가 너무 늦었어. 너를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너의 길을 간 것뿐. 네가 늦은 것은 없다.”

“내가 곁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터. 그러니 제발…….”

다음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그러니 제발 뭐.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그것은 이실리스를 기만하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온 그녀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베르타스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황의에게 물었더니 서서히 좋아지고 있다고 하였어.”

“그…… 나갔던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 건가.”

“기억에 없어서 방에 영상석을 설치했지. 우스만 칼리파가 데려다주더군.”

“…….”

아무 말이 없는 베르타스에게 이실리스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저 나를 데려다주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난 너를 두고 힐렌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고 있어.”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자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해 베르타스. 너는 내 옆에 있는데 왜 옆에 있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걸까.”

“…… 너무 피곤해서 그럴 거야. 이제 우리 아이도 찾았으니 편하게 쉬도록 해.”

눈을 감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베르타스는 흉포해지는 기분을 애써 감추었다.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으나 이실리스는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완전히 잠든 그녀의 숨소리를 확인한 베르타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상황에서 우스만 칼리파는 왜 등장을 하는 것인가.

* * *

“어떻게 된 일이지?”

“섭정공께서는 아직 라르헨의 국부가 아니십니다.”

메릴의 말에 베르타스가 사납게 외쳤다.

“라르헨의 국부는 아니나 황녀의 아버지는 맞지. 나는 이실리스가 왜 저렇게 되었고 왜 이 상황에 우스만 칼리파가 등장하는지 알아야겠네.”

우스만이 기다리고 있는 정원으로 가는 동안 상황 파악을 하려는 그에게 메릴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서 사라지고 마음의 병을 얻으셨고, 섭정공을 찾으셨으나 계시지 않아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께서 폐하를 보살펴 주신 것으로 압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싸늘한 시선을 던지는 베르타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되받아치는 메릴이었다.

“그럼 폐하를 그대로 둬야 한다는 겁니까? 아이를 찾으시며 매일 밤 헤매시는 분을?”

메릴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베르타스였다. 다 제가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생각에 베르타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멀리서 우스만 칼리파의 얼굴이 보였다. 한가하게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우스만을 보니 다시금 속에서 열이 올라왔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차향이 좋군. 나도 한 잔 주겠나?”

“직접 따라 마시게. 시녀들이 줄지는 모르겠지만.”

베르타스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메릴이 다가서서 그에게 찻잔을 가져다주었다.

“고맙네.”

“폐하를 생각하여 하는 일입니다.”

이실리스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다는 메릴의 말에 베르타스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저 시녀들은 왜 저를 적대하는가.

“왜, 이상한가?”

“처음 보는 이들이 차가우니 얼떨떨하군.”

“그만큼 이실리스가 힘들었던 거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

“뭐?”

베르타스의 말에 우스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유롭게 웃으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이제 진짜가 왔으니 가짜는 사라져도 되지 않겠는가?”

“무슨 헛소리를!”

“그렇지 않나. 그동안 내 행세를 하느라 고생하였네.”

베르타스의 말에 부들부들 떨던 우스만은 그를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가다간 베르타스에게 말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의 행세라. 시작은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거 아나? 이실리스가 이젠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이라니. 그 정도 마음은 나도 가지고 있다네. 그녀의 마음은 열리는 것이 아니야. 단숨에 얻는 것이지.”

이제야 조금 마음이 풀렸다. 그녀가 우스만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주변의 시선이야 변하기 나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실리스였다. 그녀만 저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녀의 마음만 변하지 않았다면 베르타스는 무엇이든 다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두고 봐야 아는 법.”

“내가 장담하지. 너는 그녀에게 친우 정도밖에 될 수 없어.”

“뭐?”

“네가 그녀에게 남자로 다가서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늦었어.”

단정 지어 말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우스만이 분한 듯 얼굴을 붉혔다. 베르타스는 알고 있었다. 이실리스는 한번 결정한 것을 바꾸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스만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어려웠다. 저 베르타스 힐렌튼에게 지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 모든 심술을 부린 것은. 심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저열한 수법이었지만 적어도 그에겐 그랬다.

“이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반존대 따윈 생략하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승자의 여유가 담긴 미소에 우스만이 헛웃음을 쳤다.

“베르타스 힐렌튼. 자신만만하군. 네가 정말 아무런 잡음 없이 그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틀렸어. 우스만.”

“뭐?”

“내가 그녀를 가진 것이 아니야. 그녀가 나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거지. 그녀가 날 가진 거란 말일세.”

베르타스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멀리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시녀들도 수군거림을 멈추고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베르타스는 우스만의 멍청한 표정을 보면서 웃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그랬다. 처음부터 그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손을 잡은 것은 이실리스였다. 서서히 그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도 그녀였고 그녀가 그에게 곁을 내어주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관계였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둘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실리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넘어질 뻔한 그녀를 잡아준 일, 술집에서 허심탄회하게 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일, 그리고 첫 입맞춤과 그녀와 함께한 모든 것들. 그 모든 일은 그녀가 베르타스를 선택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이실리스가 날 선택한 거야. 내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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