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실리스.”
베르타스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흔들리려는 시야를 간신히 잡기 위해 서탁에 손을 짚었다.
“폐하!”
곁에 있던 메릴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내저은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팔에 안겨있는 아이가 보였다. 잠들어있는 아이는 그냥 보아도 그녀의 아이였다. 계속해서 찾던 그녀의 딸이었다.
“내 아이…….”
“폐하의 명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뤼르가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수고했네.”
알뤼르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 없었기에 그녀는 애써 표정을 바로 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가서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이기에, 이 나라를 다스리는 지고한 자리에 있기에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힐렌튼의 섭정공이십니다.”
“뭐라고 했는가?”
이어지는 말에 이실리스가 반문했다. 그녀의 말에 알뤼르가 다시 힘있게 답했다.
“힐렌튼의 섭정공이 오셨습니다. 폐하.”
“그대가 언제부터 힐렌튼의 섭정공이 되었는가? 아니, 그보다 그렇다면 황제는…….”
시선이 절로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아이의 머리 위에 놓인 작은 관이 보였다. 얼굴을 보느라 보이지 않았던 황관이었다.
“이게 대체…….”
“우리의 아이가 힐렌튼의 황제가 되었지.”
이실리스의 손짓에 다가서는 메릴을 향해 아이를 넘기면서 베르타스가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실리스가 사람을 물렸다. 알뤼르와 메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었고?”
“그래.”
“얼굴이 상했군.”
떨리려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하며 말한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베르타스는 단숨에 그녀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표정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다 누구 때문인데.’
‘뭐?’
갑자기 든 생각에 이실리스는 의문을 표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그녀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나. 마음을 준 것은 맞았다. 황제인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나 이미 그에게 넘어간 마음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였나. 이렇게 그녀의 일상에 영향을 줄 정도로 그를 마음에 두었던 것인가. 밤의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직 펼쳐보지 않았군.”
인장으로 밀봉된 봉인조차 뜯지 않은 서신을 힐끗 내려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이실리스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오늘 도착했네.”
“열어 볼 필요 없어. 아이를 내가 데리고 있다는 서신이었는데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서 도착하다니. 다한 경은 어디 있지?”
“다한?”
“그가 서신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나?”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둘 사이의 대화를 가르면서 메릴이 말을 잘랐다. 평상시 같았으면 호통이 떨어졌을 터인데 이실리스는 정신이 없었다. 메릴의 방자함을 지적하기도 전에 당황감을 감추느라 애썼다.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고?’
베르타스의 시선이 메릴에게 돌아가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 그녀였다. 그럼 아이가 없어진 그 순간 보낸 서신이란 말인가. 대체 이 서신은 왜 이제야 도착했나. 원망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다한 경은 어디 있지?”
“제집에 있습니다.”
“팔자 좋군.”
“다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도전적으로 말하는 메릴에게 웃으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대화에 시녀가 끼어드는 것도 아니지. 그렇지 않나 이실리스?”
“……물러나라.”
베르타스의 말엔 꿈쩍도 하지 않던 메릴이 이실리스의 한마디에 뒤로 물러섰다.
“충성스러운 시녀를 두었군.”
“말장난은 되었어.”
“이실리스.”
차갑게 떨어지는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원망스러웠다. 왜 아이를 이제야 데려왔는가. 아니, 왜 그녀를 떠났는가. 아이가 없는 동안 이실리스는 너무 힘들었다. 음식을 잘 넘기지 못했고, 시녀들이 쉬쉬하기에 제대로 된 사실을 파악하진 못했으나 몽유병이 생긴 듯했다.
우연히 손을 내려다본 그녀가 손톱 사이의 흙을 발견한 날, 그녀의 침소에 영상구를 직접 설치했다. 시녀들이 알지 못하게 몰래 설치한 영상구엔 휘적휘적 방을 나서는 제 모습이 있었고, 우스만 칼리파가 그녀를 데리고 들어오는 모습도 있었다. 저를 침대 위에 눕히고 바로 방을 나서는 우스만의 모습에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충격이었다. 약해진 자신도, 무너져내린 자신도, 마지막으로 남에게 의지하는 자신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와 국혼을 치러줘.”
“뭐?”
“힐렌튼을 너에게 바치겠다. 나를 라르헨의 국부로 받아준다면.”
* * *
베르타스가 던진 말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귀족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국무회의가 열렸고 선황과 신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열변을 토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이실리스는 정신이 없었다. 베르타스가 아이를 안고 나타난 것도, 섭정공이 된 것도, 아이가 힐렌튼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그가 청혼을 했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부옇게 된 듯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는 말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흘러가는 대화들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선황이 나서서 말을 잘랐다.
“그만.”
선황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대들의 의견은 잘 알겠으니 폐하께 생각할 시간을 주게.”
“폐하!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
귀족들을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오는 시선에 고고하게 입을 열었다.
“베르타스 힐렌튼은 황녀의 아버지이기도 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네.”
“네? 그 말씀은…….”
“그러니 다들 물러가게.”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서 가서 쉬어야 했다. 흔들리려는 몸을 애써 바로 하면서 이실리스는 걸었다. 고개를 들고 어깨를 내리고 시선은 정면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있는 방의 방문을 연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칫했다.
“이제 오나?”
베르타스였다. 아이의 옆에서 놀아주고 있는 그를 보니 그제야 머릿속이 환해졌다.
“회의가 길었군.”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아이가 그를 향해 방긋방긋 웃고 있다가 이실리스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그녀를 향해 반갑다는 표현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떨리는 시선을 바로 하고 아이를 안아 들었다. 풍겨오는 달큰한 향내가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
‘아…… 내 아가.’
아이에게서 풍기는 우유 냄새. ‘꺽’ 하는 소리를 내며 트림을 하는 아이였다. 당황하여 등을 두들기니 아이가 웃고 그 모습을 본 베르타스도 웃었다.
“방금 먹었어.”
“그랬군.”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얼마 만인가. 이 웃음이 그리웠다. 이 보드라운 뺨도 그리고 나를 보는 저 군청색 눈도 까만 머리카락도. 아이를 살피던 이실리스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붉은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지.”
“마력 발현을 하였나?”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 마력이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지만, 마력이 확실했다.
“내 아이가 드디어!”
“우리 아이야.”
이실리스의 말을 고쳐 말하면서 베르타스가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이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력 발현을 하였다면 고생했을 터인데…….”
이 작은 아이가 그 힘든 일을 겪었다니.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걱정이 되었다. 몸에 이상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려고 아이에게 마력을 살며시 흘려보냈다. 다행히 아이의 마력은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알뤼르와 힐렌튼의 마법사가 고생했지.”
“알뤼르가 마력을 진정시켰나?”
“그 때문에 너에게 오는 길이 늦어지기도 했고.”
라르헨의 황족은 강력한 마력을 타고 난다. 일반 마법사들이 그 마력을 진정시켰다면 시일이 꽤 걸렸을 것이었다. 베르타스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알뤼르는 어떻게 그곳에 닿았지?”
“알려줄까.”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속삭이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피하며 이실리스가 아이를 다시 아기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어느새 그녀의 품에서 조용히 잠들어있는 아이였다.
“날 피하지 마. 이실리스.”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느낌이 달랐다. 눈앞에 있는 자가 베르타스 힐렌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달까. 이상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사람.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던 사람인데 왜 느낌이 다른 걸까.
아무 말 없이 표정만 굳히고 있는 이실리스의 손을 베르타스가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손에서부터 밀려들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덥혀주지는 못했다. 이실리스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늦었으니 오늘은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표정이 보였으나 애써 외면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상하고도 기묘한 그 느낌에 이실리스는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
침소로 돌아오자마자 시녀들도 다 물리고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피곤하여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늦은 밤. 달이 한가운데 걸리는 것을 보고도 베르타스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실리스의 미묘한 태도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가 반갑지 않은 것인가.’
바라만 보아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실리스를 얻기 위해서 그의 병사들을 재촉했고 그의 기사들을 잃었다. 그의 아이를 황제의 자리로 내몰았으며 마지막으로 힐렌튼의 제국민들을 저버렸다. 그가 수호하고자 했던 제국은 그를 버렸고, 그 또한 제국을 버렸다. 계속되는 상념에 심란한 밤이었다.
계속해서 뒤척이던 그는 결국 밖으로 나가는 길을 택했다. 황궁의 1층 귀빈 숙소에서 머물던 그가 문도 열지 않고 바로 창문을 ‘휙’ 넘었다.
정원과 바로 통해있는 숙소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바깥 공기를 쐬니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음산하게 들릴 법도 하건만 베르타스는 아무런 감흥 없이 걸어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런 그의 눈에 띈 사람들이 있었다. 황궁 시녀들이었다. 그 앞에 이실리스가 그리고 이실리스를 끌어안은 우스만 칼리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