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안 되네.”
단호한 베르타스의 말에 알뤼르는 놀란 눈을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적법한 힐렌튼의 황제. 이 아이를 데리고 라르헨으로 가려면 저 많은 병사를 다 죽이고 가야 할걸세.”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검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알뤼르가 외쳤다.
“이분은 라르헨의 하나뿐인 후계자야!”
“힐렌튼의 황제이기도 하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내가 섭정공 자리에 앉은 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나?”
베르타스가 힐렌튼 밖으로 나가는 정보를 원천 봉쇄하고 있었기에 힐렌튼의 주변국들은 아직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가 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은 나라 안의 제국민들에게도 퍼지지 않은 소식. 오직 수도 안의 제국민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수도를 봉쇄한 베르타스였다. 그리고 그 상황은 이제 슬슬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을 모두 죽여 없앤 베르타스의 잔혹성에 다른 귀족들은 무릎을 꿇었으며, 본래 그를 따르던 기사들의 손속에도 자비는 없었다. 단 한 번의 제의, 거절할 경우 척살. 그것이 베르타스 힐렌튼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죽인다. 일부러 공포정치를 펼치는 것이었다. 힐렌튼을 라르헨으로 복속시키려면 그편이 더 나았으니.
“베르타스!”
“섭정공 각하라고 부르게. 엄연히 말하면 나는 라르헨의 국부가 될 예정인 사람이니까.”
“네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폐하께서도 아시는가? 감히…….”
“내 딸의 마력을 진정시켜준 것은 고마우나 선을 넘는 것을 봐주겠다는 것은 아닐세. 헥터! 이자를 정중히 모셔라.”
베르타스의 명령에 따라 헥터가 알뤼르를 이끌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방에 갇히게 될 예정이었다.
“힐렌튼에서는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갚는가?”
“일주일만 참으면 될 걸세. 자네가 나와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하니 마력을 회복하려면 푹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뭐?”
“자네가 이동마법을 사용할 때 같이 가겠다는 소리일세.”
얼른 가보라는 듯 손을 젓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헥터가 알뤼르를 데리고 알현장을 나섰다.
“뭐 저런 무도한 자가 다 있는가!”
“다행으로 생각하십시오. 각하께서 살려 보내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헛소린가!”
도와준 사람에게 이런 대접을 한다고 분노를 터뜨리는 알뤼르였다. 그런 그를 향해 헥터가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외부인은 모두 죽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힐렌튼의 사정이 좋지 못해서 말입니다. 다른 제국에서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섭정공께서 힐렌튼을 원래대로 세우실 예정입니다.”
“이미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세워서 뭐 한다는 건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미 헥터는 베르타스의 진의를 알고 있었다. 그가 라르헨에 나라를 넘기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막을 길이 없었다. 이미 힐렌튼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던 베르타스가 저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그쪽에겐 더 좋을 겁니다. 어차피 라르헨으로 간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힐렌튼의 황제인데 라르헨으로 가면 어쩌자……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보이는 알뤼르의 표정에 헥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셨으니 입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일주일 뒤,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반드시 내 마력을 회복하지.”
“여깁니다.”
알뤼르에게 머무를 방을 안내한 헥터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심란했다. 이럴 때, 그의 단짝인 다한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속내를 내어놓고 술이라도 할 텐데.
“언제 오는 거냐. 이 녀석.”
* * *
그 시각. 다한은 칼리파 제국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하느라 술집을 나와 뒷골목으로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칼을 맞대고 싸웠으나 라르헨의 경비병이 출동할 것을 두려워한 칼리파 제국인이 진법을 사용했고 그 진법을 피해 달아나다가 던져진 단검에 어깨를 내어줬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단검이었지만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단검에 독이 발라져 있는 듯했다. 서둘러서 도망친 그의 눈에 들어온 흐릿한 인영이 있었다.
“도와줘…….”
그리고 암전이었다. 다시 눈을 뜬 다한의 앞에 일전에 구해줬던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의원으로 보이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성을 보면서 다한은 눈을 깜박이며 뿌연 시선을 바로 하려 애썼다.
“독이요?”
“그렇소. 사막의 독인 것 같은데 독한 것이라오. 전갈에게서 얻어내는 것인데 어쩌다가 저렇게 젊은 청년이…….”
“그럼 해독은 할 수 있나요?”
“천천히 상황을 지켜봅시다. 일단 타스갈 풀을 끓인 물을 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마시게 하면 될 거요. 일주일 치 약을 처방해 주겠소.”
“감사합니다. 의원님.”
약을 지어오겠다며 자리를 나서는 의원을 배웅한 여자가 다한의 옆에 와 앉았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쪽?”
“그냥…… 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면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전 얽히기 싫으니까.”
“이모!”
대여섯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달려와서 여자에게 안겼다. 아이를 다정하게 끌어안은 여자가 아이에게 무어라 속삭이자 아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한이 말했다.
“아이가 있으셨군요.”
“그래요.”
“그럼 부군은…….”
“없어요.”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정적이 흘렀다. 다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여자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이거 그쪽 소지품인데 제가 챙겼어요. 중요해 보이는 서신이 있더군요.”
“읽었나?”
다한의 기세가 변했다. 날카로워진 그의 표정에 당황하지도 않고 여자가 속삭였다.
“인장이 찍혀있어 읽지는 못했지만, 누구에게로 보내는 것인지는 보았죠.”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그 서신을 전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나요? 라르헨의 황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네. 그렇습니다.”
다한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하던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전해 줄 수 있어요.”
“네?”
여자, 메릴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전해드릴 수 있다고요.”
* * *
일주일 뒤. 이실리스는 메릴이 건넨 서신을 받아들었다.
“누가 보낸 거라고 하였나.”
“베르타스 힐렌튼이라 했습니다. 폐하.”
“너는 이것을 어떻게 얻은 것이냐.”
“우연히 다친 자를 구해 주게 되었고 그자의 소지품에서 발견했습니다.”
밀봉된 봉인을 뜯지 않고 탁자 위에 서신을 놓아둔 이실리스가 생각에 빠졌다. 베르타스가 떠나간 지 11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연락이 없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서신이 오다니. 서신을 바라만 보고 차마 열지 못하는 그녀에게 메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친 남자에 의하면 거의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수도에서 헤매었다고 합니다. 서신을 전해 줄 사람을 찾지 못했고, 서신을 전하기 위해서 황성에 들어올 수도 없어서요.”
“왜지?”
“노리는 자들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자들에게 다쳤다고…….”
“대체 누가?”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폐하.”
메릴의 말에 이실리스가 서신에 두던 시선을 들었다. 직접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쳤다고 하였나?”
“그러합니다.”
“지금 어디 있는가?”
“제집에 있습니다.”
“너의 집에?”
“그러합니다. 폐하.”
‘다쳤다 라. 베르타스의 연락이 제때 도착했다면 9개월 전. 그런데 그동안 누가 나에게 오는 서신을 막았나. 직접 궁 안에 들어올 수는 없어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건데.’
순간 우스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실리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생각을 거듭했지만, 알 수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 열어보고 싶었으나 겁이 났다.
그는 어떤 말을 전하려고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인가. 기다리지 말라고? 아니면 곧 돌아오겠다고? 그립다고?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모습에 메릴이 조용히 자리에서 멀어졌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서신은 받았을까. 그 서신을 받고 연락을 한 것일까. 궁금했다. 10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궁금한 마음에 힐렌튼에 있는 첩자들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힐렌튼에 아무런 일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베르타스는 왜 힐렌튼으로 돌아간 것인가. 어떤 이유로. 나를 이곳에 두고.
깊어가는 생각에 이실리스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관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그녀의 머리에서 황관이 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폐하…….”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황관을 마법으로 들어 올려서 업무를 보는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금색의 관에 비추어진 얼굴을 보았다.
‘저것을 위해 내가 희생한 것이 얼마이던가.’
황좌를 위해 그녀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잃었고 그녀 스스로 얻었던 사랑도 떠났다. 그녀의 아이를 잃었으며, 그녀의 사람들을 잃었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잃었기에 이제는 황좌를 놓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만약 우스만 칼리파가 아니었다면, 베르타스가 없는 동안 저에게 애정을 베푼 그가 아니었다면, 무너지려는 그녀를 잡아준 그가 없었다면 그녀는 황좌를 내던지고 스스로가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스만에게 마음을 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겠지.’
허리를 바로 세우면서 시선을 돌렸다.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메릴에게 손짓하자 그녀가 서탁 가까이에 다가왔다. 귀를 들이대는 그녀에게 이실리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
문을 벌컥 열고 시종이 들어왔다. 예의 없는 그 행동에 이실리스의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찰나, 시종이 외쳤다.
“알뤼르 님께서 복귀하셨습니다!”
“뭐라고?”
이실리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의 도착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찌 되었다고 하는가! 아이를 찾아온 것인가?”
“폐하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