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161)

53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를 따르던 귀족들은 목숨을 부지했고 그에게서 돌아선 귀족들은 모조리 숙청당했다. 민심은 이미 황가로부터 돌아선 지 오래였기에 베르타스가 권력을 잡은 것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황제와 황태자는 국경 밖으로 쫓겨났으나, 국경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갈고 있는 제국민이 그들이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을 안아 들고 황좌에 올랐다. 베르타스와 똑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딸의 모습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자리에 앉자마자 오래 참고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저……. 아이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섭정공께서는 혼인은 하지 않으실 예정입니까?”

“나라가 안정되면 그녀를 찾아갈 예정이니 그건 묻지 않는 것이 좋겠네.”

단호한 베르타스의 말에 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역시. 저런 소리가 나올 줄 알았다. 이전에도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던 귀족들이었으니 권력을 잡은 지금은 아마 더할 듯했다. 지금이야 자신의 말에 입을 다물었지만 아마 계속해서 압박이 들어올 것 같았다. 새삼 이실리스가 느꼈던 부담감이 떠오르는 베르타스였다.

-5개월 전.

‘다한 경이 소식을 전하였나.’

라르헨의 황궁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베르타스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식이 들렸어도 벌써 들려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새로 사람을 보내야 하나 고심하던 즈음에 황녀의 몸이 심상찮았다.

 계속해서 아이를 안고 있는 베르타스였다. 한시도 멀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는 시녀가 따로 있었으나 그는 항상 아이를 옆에 두었다. 집무를 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를 안고 집무를 보고 아이가 잠잘 동안에는 이동 침대를 만들어 아이를 옆에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이를 안고 알현실에서 집무를 보다가 라르헨에 전령을 더 보낼 것을 고심하는데 아이의 몸이 뜨거워졌다.

“황의! 황의를 불러라!”

베르타스의 외침에 다들 놀라서 바라보았다. 베르타스의 보좌관들이 서둘러서 귀족들을 내보냈다. 쫓겨나다시피 알현실에서 내쫓긴 그들이 수군거렸다.

“혹…… 황제가 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섭정공께서 반드시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겠군요.”

“그렇겠군요.”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귀족들은 자리를 피했다. 그런 귀족들의 뒷모습을 본 헥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저 꼴을 또 보네.”

“나도 마찬가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가 덧붙이는 말이 들렸다. 귀족들의 동태를 베르타스에게 알려야 했기에 다른 동료는 서둘러 다른 귀족들의 뒤를 쫓았고, 헥터는 다시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가 열이 있네.”

황의가 서둘러서 달려왔다. 황제가 될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온 것이었다.

“열이 높다.”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라고 부른 것을.”

황의가 아이를 진찰하는 동안 베르타스는 옆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석 달여 동안 먼 길을 달려와서 탈이 난듯했다. 아이를 유심히 살피던 황의가 베르타스에게 입을 열었다.

“섭정공께서는 제가 아니라 마법사를 찾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법사?”

“그렇습니다. 황손께서 마력이 발현하려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였나. 마력 발현?”

“그러합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이실리스였다. 그녀에게 알려야 했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다. 알리러 가는 길에 버리는 시간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스크롤 하나도 부족한 나라에서 라르헨까지 전령을 보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궁정 마법사는 어디 있는가.”

“일전의 일로 사직하셨습니다.”

두 개의 태양을 모실 수 없다면서 사직하고 그만둔 궁정 마법사의 자리를 아직도 채우지 못했다. 힐렌튼은 그만큼 마법사가 귀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다른 마법사는 없는가.”

“라르헨에서 오신 분이 계십니다.”

“라르헨에서 여기까지?”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왔다고 하나.”

“사람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아직 찾지 못하셔서 잔류 중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을?”

힐렌튼은 마법사가 부족한 국가였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이 수도 안에 들어오면 검문소에서 반드시 확인 작업을 거쳤다. 수도에 드나드는 마법사를 인재로 영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입을 원했으나 라르헨의 국적을 가진 자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들렸다.

“그럼 그 사람을 데려오게.”

베르타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헥터가 시종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열이 있는 아이를 안아 들고 전전긍긍하던 베르타스의 앞에 라르헨에서 왔다는 마법사가 등장했다.

“라르헨에서 온 알뤼르라고 합니다.”

‘알뤼르?’ 어쩐지 들어 본듯한 이름에 낯도 초면이 아닌 듯해 베르타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힐렌튼의 섭정공 베르타스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가 마력 발현을 하였네. 봐줄 수 있는가?”

“그러겠습니다.”

* * *

알뤼르는 황족을 찾기 위해 힐렌튼 제국까지 넘어왔다. 다른 마법사들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라르헨의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황족을 찾지 못하였기에 마지막 수를 강구한 그들이었다. 라르헨에 없다면 다른 제국으로 갔을 수도 있다는 알뤼르의 의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 세계를 다 뒤져서라도 찾겠다는 알뤼르의 고집이었다. 그런 수석 마법사의 고집에 다들 두 손을 들었다. 

그런 알뤼르가 도착한 곳은 힐렌튼의 수도. 수도에서 알뤼르는 조심스럽게 황족을 찾았다. 그러나 결과는 늘 같았다. 오늘도 수도를 돌아다니는 그에게 힐렌튼 제국의 기사가 다가섰다.

“마법사 님이십니까?”

“그렇네.”

“잠시 황궁으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로…….”

“가보시면 압니다.”

혹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알뤼르는 조용히 마력을 일으켰다. 기사는 그의 기색을 눈치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안내받아 도착한 장소에서 이상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이것은…….”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강력한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 *

아이에게 다가선 마법사의 기세가 돌연 변했다. 그의 기세가 변하자마자 외부인을 경계하던 베르타스가 오라를 일으켰다.

“감히…… 라르헨의 황족을 납치해?”

“납치?”

마력을 일으키는 마법사의 행동에 베르타스가 검을 들고 그의 마력을 베었다. 아이를 안고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마법사가 외쳤다.

“이 악적! 라르헨의 황녀님을 데려다가 무슨 짓이냐!”

다시금 마력을 일으키려는 마법사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한마디 했다.

“라르헨의 황녀이나 나의 딸이기도 하네.”

“…… 뭐?”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마법사의 말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마법사의 마력이 흩어졌다.

“나의 딸이라고 하였네.”

“그럼 네놈이…….”

“내가 이 아이의 생부.”

그때였다. 열이 오르던 아이가 소스라치게 울기 시작했다. 알현실에 있던 이들이 베르타스의 심복이어서 다행이었다. 다들 새로운 사실을 알고 놀랐으나 입을 다물었다. 알뤼르가 서둘러 다가가서 아이를 보았다.

“이런. 마력 발현이로군. 역시 황녀님께서 마력을 가지고 계실 줄 알았어!”

“태어나면서 마력 한 줌 없다고 시종들이 하는 말을 들었네만.”

“헛소리를! 라르헨의 황족이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아이의 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섬세하게 마력을 제어하는 알뤼르였다. 임시방편으로 아이의 마력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라르헨의 황족은 황족. 알뤼르의 마력으로는 턱도 없었다. 죽죽 빠져나가는 마력에 심한 탈력감을 느끼면서 그가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황족의 마력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황족뿐. 어서 폐하께 연락을!”

“이실리스에게?”

“그분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섭정공 각하! 수도에서 소요가 일고 있습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전령을 보고 다급하게 베르타스의 보좌관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섭정공으로 나선 지 겨우 2개월. 힐렌튼의 곳곳에서 황제의 복권을 노리면서 들고 일어나는 귀족들이 있었다. 말이 전 황제의 복권이지 그들의 탐욕을 위한 것이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반역으로 황좌를 거머쥐었으니 그들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가서 다 잡아 오게.”

“명을 받듭니다!”

헥터에게 명령을 내린 베르타스도 직접 검을 들고 일어섰다. 알뤼르는 계속해서 마력을 제어하고 있었다.

“부디 내 딸을 부탁하네.”

“라르헨의 마법사에게 라르헨의 황족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대상.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

곧바로 고개를 돌리는 알뤼르의 행동에 베르타스가 문밖으로 나섰다. 알뤼르의 관자놀이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거…… 마력 다 잡아먹겠네.”

* * *

-현재.

아이의 마력을 안정화시키는 데 오 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알뤼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대체 라르헨의 황실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아이가 여기 온 거지?”

“변고가 생겼어. 젊은 귀족들이 황족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어섰고 황녀님이 납치될 뻔했으나 빛이 났고 황녀님이 이곳으로 온 것….”

“마력에 기생하여 사는 자들이 황족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니. 미친 건가.”

베르타스의 조용한 말에 알뤼르는 입을 다물었다. 이실리스에게 전령을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들을 잡느라 시간을 허비했으며 전령을 보내는 족족 소식이 끊겼다. 누군가 그의 전령이 라르헨에 도착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궁정 마법사의 자리에 새로 앉게 된 이는 알뤼르와 같이 번갈아 가면서 아이에게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면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두 마법사를 챙기는 것은 시종들을 몫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뤼르가 마법을 사용하여 이실리스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당장 아이의 목숨이 위험할 판이었다. 

“이제 황녀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어느새 하얀 머리가 곳곳에 생긴 알뤼르가 베르타스를 보며 말했다.

“고생하였네.”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황제 폐하를 위한 것이오.”

“이실리스에게 연락이 닿았나?”

“이! 무도한 자! 매일 쓰러지는 걸 보고 그런 말이 나오나?”

“나의 전령이 그녀에게 닿지 않아 궁금한 마음에 물었네.”

알뤼르를 향해 말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쓴웃음이 묻어났다. 갈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라르헨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나라의 기반을 잡는 지금, 그가 자리를 비운다면 득달같이 달려들 승냥이 떼들이 아직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녀님은 내가 모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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