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161)

52화.

우스만은 인상착의를 유심히 살폈다. 할리만에게 붙잡아오라 할 예정이었다.

“어디로 갈 건가?”

“일단 저쪽으로.”

힐렌튼 제국의 사람이 있는 방향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우스만이었다. 그의 손짓을 따라서 이실리스도 움직였다. 뒤따르던 할리만에게 우스만이 조용히 명령했다.

“뒤쪽에 있는 힐렌튼 제국의 기사를 잡아 놔!”

“알겠습니다.”

“어느 한 군데 다쳐도 좋으니까 반드시 신병을 확보해.”

“명심하겠습니다.”

할리만이 조용히 뒤로 사라지자 우스만이 앞서가는 이실리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걸음걸음이 가벼웠다.

* * *

-7개월 전.

3개월 만에 군대를 이끌고 힐렌튼의 수도에 도착한 베르타스의 앞에 병사들이 섰다.

“무슨 일이냐?”

“베르타스 힐렌튼. 폐하의 명을 받아 체포하러 왔습니다.”

“체포? 누가 누굴?”

전에 하던 대로 순순하게 대해줄 생각이 없었다. 황위를 찬탈하러 이곳에 온 이상 여태까지와 같은 태도를 고수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코웃음을 치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병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황제 폐하의 명에 따르십시오!”

“싫다면?”

“강제하겠습니다!”

“그럴 능력은 있고?”

순식간에 그의 앞에서 떠들던 병사의 목이 사라졌다. 주변에서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베르타스는 그대로 말을 달렸다. 수도의 문이 열린 이상 그대로 달리면 황궁이었다. 힐렌튼의 황궁은 수도의 성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적이 침략하면 절대로 도망치지 말고 응전하라는 선대의 의지였다. 나무로 이루어진 황궁의 문은 제대로 된 문이 아니었으니 그의 오라로 충분히 베어낼 수 있었다. 

그의 눈앞에 성문이 보이자 베르타스는 그대로 성문을 베었다. 성문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가자 안의 병사들이 당황하며 검을 겨누었다.

“저항하는 자는 죽이겠다! 순순히 물러서라!”

“베르타스 힐렌튼!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오!”

“난 나의 자리를 찾으러 왔다.”

“그대는 이미 맹약의 샘물을 마시고 황위를 잇지 않겠다 선언하지 않았소!”

“내가 황위를 잇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아이가 황위를 이을 것이다.”

“뭐라고?”

성을 지키던 근위대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베르타스 힐렌튼의 명성을 듣고 있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들이 이렇게 쉽게 결정을 내린 이유는 여태까지 보아온 황태자의 악행과 황족답지 않은 모습에 지쳐서였다. 

너무나도 쉽게 투항하는 군사들을 본 근위대장의 낯빛이 어둡게 경직되고야 말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내 당황한 음색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검을 들어라! 너희들이 그러고도 황궁을 수호하는 근위대원이냐!”

“황궁을 수호하게 하려면 월급이라도 제대로 주던가!”

“맞소!”

저에게 겨누어지는 검에 황망해 하는 근위대장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외쳤다.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누구도 베르타스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 것을 본 근위대장이 결국, 검을 내던졌다. 완벽히 성문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성문이 뚫리자 내성까지 그대로 말을 달리는 베르타스의 뒤를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누구지?”

“헥터 경인 것 같습니다.”

“제때 도착하였군.”

북성도 뚫렸다. 베르타스의 군기를 든 병사들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다른 쪽은?”

“이제 곧일 겁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외치는 두 사람의 사이로 화살이 ‘휙’ 하고 날아들었다. 올려다보니 힐렌튼의 황태자였다.

“베르타스 네 이놈!”

“쏘았으면 날 맞췄어야지.”

“감히 날 조롱해?”

“그 정도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어.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절대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주변에서 다른 병사들이 듣고 있었기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베르타스는 후환을 남겨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또한 저들의 후환이었다. 저들은 그의 목줄을 옥죄었다고 믿었지만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목줄이 저들의 목덜미를 노리게 만들었다. 가장 큰 실책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너야말로 당장 무릎을 꿇어라! 맹약의 샘물을 마신 것을 잊은 것이냐! 약속에 따라 너는 힐렌튼의 황위를 넘볼 수 없다!”

“누가 내가 갖겠다고 했나?”

힐렌튼의 황위 따위 누군가 준다고 하여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황위를 노리는 것이냐!”

“나는 황위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통받는 힐렌튼의 제국민을 해방하려 한다!”

“뭐?”

“황족이 제대로 나라를 돌보지 않고 제 사리사욕만 채우다니……. 지금의 제국이 어떤 상황인지 아는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치는 황태자의 모습은 졸렬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외쳤다.

“제국민이라면 당연히 황족을 위해서 애써야 하거늘!”

“틀렸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타스가 외쳤다.

“너의 말은 틀렸다. 황족이라면 당연히 제국민을 보살필 줄 알아야 하거늘! 하나, 호사스러운 생활에 빠져 고통에 빠진 제국민을 돌보지 않은 죄! 둘, 제국을 태평성대로 이끌어 달라는 선황과의 약속을 저버린 죄! 마지막으로 나와의 약속을 어겼으니 나 또한 너희와의 약속을 어기겠다!”

“맹약을 깨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오히려 맹약을 깨기를 바라는 듯 보였다. 그들로서는 그 방법만이 베르타스를 제어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맹약은 내가 황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것! 맹약대로 나는 황위에 오르지 않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말하지 않았나! 고통받는 제국민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거리에 나가면 배고픈 자들이 즐비하고 구걸을 하는 자들이 늘었다. 누더기를 걸친 자들이 늘었으며, 일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자들이 늘었다. 집이 없어 거리에서 몸을 누이는 자들이 늘었으며, 아이를 버리는 자들이 늘었다.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없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국은 더할 나위 없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렇게 황궁 안에만 있으니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거다.”

베르타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황족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조차도 갖추지 않은 자가 황태자라니. 용서할 수 없었다. 이러려고 나의 아버지를. 선황을 죽게 한 것이었나.

“베르타스 네 이놈!”

힐렌튼의 황제가 나타났다. 주렁주렁 금은보화를 달고 있는 그 모습에 베르타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반란을 일으킨 군대 앞에 칼을 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껏 치장하고 나타나다니.

‘저러느라 늦은 것인가.’

권위가 옷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숙부님.”

“숙부라니! 나는 이 나라의 황제다!”

“이것을 보십시오.”

베르타스가 이번 일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이 있었다. 선황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는 것이었다.

* * *

“선황의 죽음에 대해 고변할 것이 있다?”

“그렇습니다. 각하.”

베르타스가 성공적으로 국경을 넓히고 수도로 돌아오자 그에게 접근한 자가 있었다.

“선황께서는 암살당하신 겁니다. 그냥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걸 왜 나에게 말하는 거지?”

“네?”

“그때 너는 뭘 하고 이제야 나에게 말하느냔 말이다.”

몽피르 백작. 선황의 신하 중 하나였던 자였다. 지금은 황제에게 딱 달라붙어 단물을 빼먹고 있는 간신 중의 간신인 자. 그가 베르타스에게 접근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황제가 그의 저의를 알아 오라 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르타스는 이 모든 것을 궁 안에 심어둔 첩자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선황의 집무실에 항상 있던 영상석이 사라진 것을 안 베르타스가 수소문해서 영상석을 가진 자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백작이었다. 찾아온 그를 겁박하여 베르타스가 얻어낸 것은 영상석이었다. 선황의 죽음에 관한. 지금의 황제가 선황이 마실 잔에 독약을 타는 모습이 담긴 영상석. 영상석을 넘긴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 저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나에게 이것을 주었으니 봐주겠네.”

“감사합니다!”

황제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쥐고 있는 것이라 했다. 그가 순순히 내주려 하지 않자 베르타스는 자신이 소드마스터임을 밝히며 제국의 전복을 꿈꾼다고 밝혔다. 어차피 죽을 자는 정보를 알아도 소용없는 법이니.

* * *

영상석을 꺼내든 베르타스를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황제였지만 그 영상석이 환한 빛을 뿌리며 영상을 띄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황궁의 하늘에 띄워진 영상은 지금의 황제가 선황의 잔에 독약을 타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잔을 마시고 쓰러지는 선황까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한번 본 영상이었지만 베르타스는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

계속 감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계산을 마친 그가 외쳤다.

“당신은 정당한 후계자가 아니니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네 이놈! 네 놈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그렇지만 나의 아이는 다르지. 내 아이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베르타스의 말에 그의 병사들과 기사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여기저기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진격!”

말을 박차서 황궁의 내성으로의 진입을 시작하는 베르타스였다. 그의 뒤를 따라 병사들이 뛰어들었고 기사들도 말을 달렸다. 모든 영상을 본 내성의 기사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자는 죽여라!”

베르타스의 외침에 내성의 기사들은 무기를 내던졌다. 그가 내성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내성의 문이 열렸고 황제와 황태자가 포박된 채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성의 기사들이 베르타스의 뜻에 동조하여 비밀 통로로 도망치려는 황제와 황태자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베르타스 네 이놈!”

“닥쳐라. 네놈들이 선황께 한 짓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목을 쳐도 모자란다.”

절절하게 울분을 터뜨리는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끌고 가라!”

열 살부터 그를 괴롭혔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베르타스는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이리 쉬운 일을…….”

“공작 각하.”

“이젠 아닐세.”

그에게 다가온 부관에게 말했다.

“이젠 섭정공이지.”

“섭정공 각하 만세!”

“만세!”

“베르타스 힐렌튼 만세!”

“만세!”

부디 나라를 잘 이끌어 달라는 사람들의 말에 베르타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를 통째로 라르헨에 가져다 바칠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 저들은 어떻게 나올까.

‘뭐 상관없지.’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 나라에는 미련도 의미도 두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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