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161)

51화.

그의 말에 기절한 마법사를 챙겨서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남자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언젠 죽이라더니?”

“그거야 제가 당황하면 당신이 더 위험하니까 그런 거죠.”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요.”

남자들에 의해 더럽혀진 옷을 ‘툭툭’ 털면서 그녀, 메릴이 말했다.

“그…… 황궁 시녀입니까?”

“그런데요?”

경계하는 메릴의 얼굴을 보면서 다한이 서둘러서 입을 열려 했다. 마음이 급했다. 

“저를 통해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을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멋쩍어하는 다한의 말에 메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을 남기고 지나치는 그녀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다한이었다.

“그런 거 아닌데.”

* * *

이실리스는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사이르카 후작의 처형식이 있었다. 이실리스가 집권한 이래 처음으로 이루어진 처형식이었기에 직접 자리에 나서야만 했다. 사이르카 후작뿐 아니라 그를 따르던 다른 귀족들도 벌을 받았다. 그동안 하나둘씩 색출되는 귀족들이 문제였다. 사이르카 후작과 결탁한 젊은 귀족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들을 일일이 벌주는 것도 어려웠다. 그들의 부모들이 나서서 후계를 걱정하는 통에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고민하는 그녀에게 베루스 공작이 나서서 말했다.

“나라의 근간을 흔들려고 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 반발하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귀족은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들이 하려고 한 짓은 라르헨의 근본을 흔드는 짓이었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이 이번 일로 인해 이실리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 일부도 아까웠다. 이 일의 원인이 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 다른 귀족들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그 일로 인해 이루어진 처형식이었다.

처형식은 잔인했고 저를 향해 소리치는 사이르카 후작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법사들에 의해서 혀를 잃었다. 

봐줄 수가 없는 몰골에 혀를 잃은 필레르의 모습에도 이실리스는 무표정했다.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요요히 웃었다. 그 얼굴을 본 귀족들이 흠칫하며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처형을 시작하라.”

거열형이었다. 사지가 동물에게 묶여 갈가리 찢기는. 원시적인 방법이기에 라르헨에서 사장된 형벌이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부활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처형을 지켜보는 이실리스의 모습에 귀족들은 몸을 떨었다. 잔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을 찌푸렸다. 

그들을 향해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제국의 근간을 뒤흔든 자이자, 제국을 위험에 처하게 한 자다. 똑바로 보아라.”

그녀의 말과 동시에 압도적인 기운이 흘렀다.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앞에 무릎 꿇은 사람들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용해진 사위를 둘러본 이실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라르헨은 제국의 근간을 뒤흔든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일벌백계하리라. 누구든지 이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자가 있으면 순찰을 도는 마법사들에게 이야기해도 좋다. 내 포상하리라.”

마력이 그녀의 목소리를 확장하여 제국의 곳곳을 흔들었다. 지엄한 황제의 말에, 반역을 고발하면 포상을 한다는 그 말에 제국민들이 눈을 반짝였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이실리스가 짜낸 묘책이었다. 

일어나 황궁으로 돌아가는 이실리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제국민들의 눈엔 충성심이 가득 차올랐다.

변경백은 그 자리에서 작위를 빼앗겼으며 백의종군을 그에게 내렸다. 많은 귀족이 반대했으나 국경을 지키던 그를 자식의 죄로 인해 죽일 수는 없었다. 작위를 몰수하고 일개 장병으로서 나라를 지키도록 했다. 선황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반대하는 귀족들을 알고 선황이 나타나 그들을 내리눌렀다.

“변경백은 나의 시절부터 충신이었네. 그의 자식이 실수하였으나 그 자식은 이미 벌을 받아 이 세상에 없으니 더는 죄를 묻기 어렵지 않은가?”

한 손에 마력을 일으키면서 말하는 선황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실리스도 막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노쇠한 충신이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죄를 고하는 사람의 얼굴엔 죽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가 백의종군을 명하지 않았다면 어디론가 사라져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변경백의 얼굴을 떠올린 이실리스가 잠시 펜을 멈추었다. 좋은 아버지였다고 들었다. 필레르와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하던 시절, 그에게 늘 들었던 것이 아버지 자랑이었다. 존경하는 분이라고. 그런데 그랬던 그가 어쩌다 그런 일에 빠지게 된 것인지. 아직도 이실리스는 알 수 없었다. 흑마법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도 알기 어려웠다. 사이르카 후작의 뒤에 그 모든 일을 계획한 자가 따로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리 없는데.”

자그마하게 속삭여진 그녀의 말에 보좌관이 시선을 돌렸으나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착각인가.’

어딘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잃은 지 거의 10개월이 다 되어갔다. 이제 조금 있으면 1년. 베르타스와 약속했던 1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다시 국혼을 준비해야 했다. 1년이 다 되도록 라르헨에 머물면서 기다리고 있는 우스만 칼리파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는 선황의 압박을 버티기 어려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이가 사라졌으니 이 제국의 후계도 없는 것. 시간이 지나자 다시금 후계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다만, 선황이 자리하고 있기에 아무도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을 뿐.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집무실이 벌컥 열렸다.

“이실리스!”

“또 너인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우스만 칼리파였다. 그 때문에 업무를 보다가 멈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녀들과 어떻게 친밀한 관계가 되었는지 몰라도 유독 그네들은 우스만에게 약했다. 캐물어도 얼버무리면서 얼굴이 잘생겼다고 말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날이 좋으니 산책하러 가자고.”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저 모습이 밉지 않았다. 아이를 잃은 뒤, 우스만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인가 어딘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어릴 적, 그와 함께 보내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친근하진 않았는데 대체 왜인가. 알 수 없었다.

“이 서류를 다 보아야 하네.”

“그거 금방 볼 수 있는 거 다 알아. 나가자니까?”

“어디를…….”

“황도!”

우스만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잃고 황도에 나서본 지 오래되었다. 종종 외유를 나가곤 했었는데 근래 들어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

“제국민이 어떻게 지내는지 봐야 하지 않겠어?”

“…….”

저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답답한 궁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 나가면 혹시 베르타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무슨 생각을!’

그에게 연락이 닿지 않은 지 10개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전령도 소식이 없었고, 베르타스의 전령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런 소식이 없다니. 

‘마음이 변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었다. 제 나라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힐렌튼 제국에서 베르타스를 필요로 하여 그 나라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락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슬슬 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아직 아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실 알려고 한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도 다른 나라에 보내둔 첩자들에게서 소식을 얻었으니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 암암리에 소문은 돌고 있을 터였다.

‘그랬는데도 연락이 없다니.’

알 수 없었다. 베르타스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계속된 상념에서 그녀를 끄집어낸 것은 우스만이었다.

“이실리스. 가자니까?”

그녀가 집무를 보고 있는 책상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얼굴의 들이미는 우스만이었다. 금안과 청안이 그녀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황금과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난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뺨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감히!”

“이정도 갖고 뭘. 앞으로 더한 것도 하게 될 텐데.”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면서 우스만이 속삭였다. 집무실 안에 있던 시녀들은 고개를 돌렸고, 호위 기사도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새로 뽑은 보좌관은 서류로 고개를 숙였다.

“봐, 아무도 안 보잖아.”

“…….”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왜 이리 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인가. 베르타스가 아닌데. 대체 왜.

“가자.”

속삭이는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 * *

붉어진 이실리스의 귀를 보면서 우스만은 환하게 웃었다.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그녀가 기꺼웠다. 어떤 의미로든 저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것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보냈던 불면의 밤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저의 손이 닿아도 질색하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그리고 저의 얼굴에서 다른 이를 떠올리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선황이 황궁에 있는 것도 한몫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선황과 이실리스는 가깝지 않았다. 힘든 일을 겪고도 선황을 찾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살가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 몰랐다. 선황은 말 그대로 황궁에만 머물 뿐 그녀에게 다가간 적이 없었다. 어떤 정겨운 말도 하지 않았고, 위로될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 대체 두 사람의 사연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우스만이 한번 선황에게 물었지만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그녀였다. 그러면서 선황이 한마디 했다.

[저 아이는 나보다 자네가 곁에 있는 것이 나을 걸세.]

씁쓸한 미소가 담긴 한 마디였지만 거기서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에 굶주린 이실리스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스만은 더 노력했다. 밤에 그녀를 달래고 쪽잠을 자며 틈틈이 낮에 이실리스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다. 

그의 노력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이실리스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욕심이 생겼다. 함께하고 싶었다. 영원히. 라르헨에서 함께해도 좋고, 아니라면 그의 제국인 칼리파로 돌아가서 함께해도 좋았다. 그저 곁에만 있어 줬으면, 내 여자가 되어줬으면, 아니 내 아이를 낳아줬으면. 간절히 원했다.

‘이런 내 마음을…….’

너는 모르겠지. 이렇게도 간절하고 절실한 나의 마음을.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온 사랑이 이제야 결실을 보려 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뭐라 하였는가.”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실리스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우스만이 미소를 띤 채 속삭였다.

“오늘따라 예쁘다고.”

“헛소리를 하는군.”

“아니지. 예쁘지 않은 적은 없었군.”

“또…….”

“넌 늘 나에게 아름다운 사람이니.”

그의 말에 입을 다무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우스만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의 시선에 걸리는 이가 있었다. 라르헨 제국민이 아니었다. 힐렌튼의 사람이었다.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기사가 분명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보낸 자인가.’

마법사의 로브를 쓰고 있는 두 사람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으로 보아, 베르타스가 보낸 자가 분명해 보였다. 우스만의 감각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고 그가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도 저의 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느낌을 주는 자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잡아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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