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161)

50화.

그의 말에 시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손님께 이런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손님이 될지, 이곳의 다른 주인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 그러니 폐라고 생각 말게. 다른 것은 몰라도 내 이실리스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스만의 행동에 시녀들이 서둘러 안내했다. 시녀들의 뒤를 따르면서 그는 계속해서 뇌까렸다. 행복하게 해주겠다. 자신이 빼앗은 행복만큼. 아이를 잃어버린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었으나 그녀의 곁에 있던 베르타스를 치워버린 것은 그의 심술. 그러니 생각도 나지 않게 해주겠다. 베르타스 따위.

* * *

“피곤해 보이는군.”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이실리스는 이른 아침부터 정원에 나와 있었다. 아이를 잃은 후로 그녀의 일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우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독 짙은 피곤함이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

조금은 심술을 부리며 말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눈꼬리를 휘었다.

“내 생각에 잠 못 이룬 것인가?”

“그렇지.”

매일 밤, 정원을 헤매는 그녀를 달래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우스만이었다. 이실리스는 그의 노력 덕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가 문제였다. 몇 달간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니 아무리 강인한 전사인 그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나마 이실리스가 업무를 보는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였다. 그의 부관인 할리만이 이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 * *

“황태자 전하!”

“왜.”

“이러다 죽습니다! 잠을 안 자고 버티다니요!”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사랑하는 여자가 죽게 생겼는데.”

“전하께서 돌…… 아니, 이건 너무 끔찍한 소리니까. 라르헨의 여제 따위 죽든지 말든지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전하가 문제라고요!”

“난 안 죽어. 아직 사랑하는 여자랑 잠도 못 잤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분노한 할리만이 소리높여 외치자 우스만이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를 낮추게. 여긴 라르헨의 황성이야.”

“전하. 돌아갑시다. 벌써 7개월이 넘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굳건하다고 하시지만, 전하의 동생 되시는 분이 계속해서 황위를 노린다고요.”

“아 그 열 살 난 어린애?”

“전하!”

우스만의 입장도 좋지 않았다. 그는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였지만 계모가 문제였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열 살이 되자 계속해서 우스만의 자리를 넘보았다. 

“코흘리개가 뭘 하기에는 우리 제국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그렇지만…….”

“우리 제국에서 여성의 위치를 알면서 그러나.”

새 황후가 우스만을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 불가능했다. 일단 칼리파 제국의 귀족들이 고집불통이었다. 그들은 장자가 아니면 황위를 이을 수 없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하나 더 있었다. 칼리파 제국에서 황후의 수렴청정이란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여자가 그들의 위에 올라서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전하.”

“되었어. 그 말은 그만하게.”

이실리스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전하. 이런다고 그 라르헨의 여제가 알아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실리스는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마음의 병을 얻은 것이기에 본인은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황의의 말에 우스만을 비롯한 시녀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개월 동안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우스만이 그동안 철저하게 숨기기도 했고 시녀들의 갖은 노력이 있었다. 이실리스가 지나다니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했다. 선황의 방이 별궁에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녀의 방이 본궁에 있었다면 절대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사랑을 해보지 못한 자네가 무엇을 알겠나.”

우스만의 낮은 목소리에 할리만은 입을 다물었다. 후회의 기색이 짙게 묻어나는 그의 얼굴에 할리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저 강인한 사내를 저렇게 만들었나.

“전하.”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을 걸세.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실리스의 곁에 내 자리는 없었을 테니까.”

“전하.”

잦아드는 할리만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우스만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실리스에게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내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다니. 내가 그렇게 좋은가?”

“좋다는 말로 이 마음을 설명하기엔 부족하지.”

이실리스의 장난스러운 말에 우스만이 답했다. 그랬다. 좋다는 말로 지금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기엔 그 말이 너무 가벼웠다. 이렇게 처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어떻게 저 세 단어로 설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저의 옆에서 시들어가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전의 밝았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 그래도 놓아 줄 수 없다는 마음 하나. 

상반된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우스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확한 것은 제 옆에서 이렇게 장난을 거는 그녀가 좋았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웃으며 말해주는 그녀를 사랑했다.

‘서서히 나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더 괜찮아지겠지.’

그의 말에 놀란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실리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우스만은 마음을 정했다. 곁에 있고 싶었다. 

“사랑해.”

“뭐?”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고. 이실리스.”

뒤에서 제 말을 들은 시녀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스만은 제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요즘 이실리스의 시녀들은 그를 부쩍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힘들 때 그가 곁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서 마음을 전하라는 시녀들의 응원에 우스만이 웃었다. 그의 인기가 올라가니 부관 할리만의 인기도 높아졌다는 것이 웃겼다.

‘사막 남자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우스만은 제가 사막 전사 중 별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게 다 어릴 적에 라르헨에서 유학을 한 탓이라고 할리만은 땅을 쳤지만 정작 우스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문화와 다른 문화들을 접했기에 그의 생각은 열려있었다. 칼리파 제국에서 여인을 중용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그가 제위에 오른다면 제국을 바꿔 볼 생각이었다.

‘그것도 이실리스가 날 받아들이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만…….’

저 흔들리는 눈빛을 보니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았다. 밤마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그러니 계속해서 생각해. 날.”

* * *

라르헨 제국의 황도에 도착한 지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다한 경은 라르헨 제국의 황성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라르헨의 황성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신원이 확실한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다. 은밀하게 전하라는 베르타스의 명을 받았기에 대놓고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대체……. 공작 각하는 뭘 믿고 라르헨의 여제와……. 여하튼 그것보다…….”

들어가고 싶었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는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경비대원이 다가오려 하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베르타스의 말에 의하면 제국의 황제가 가끔 밖으로 나와서 수도를 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황제는커녕 마법사 비슷한 사람도 볼 수 없으니 원.”

황녀를 찾기 위해 라르헨 제국의 마법사들 대부분은 라르헨의 곳곳으로 흩어져 있었다. 황궁과 수도 그리고 제국을 수호하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긴 채.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다한 경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이 서신은 어떻게 전해야 하는 거야.”

전할 길이 없었다. 라르헨의 귀족들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고 전령으로 궁안에 들어가기도 힘들어 보였다. 전령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베르타스 힐렌튼의 전령입니다? 들어가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들어가서 여제를 만나기 전에 누군가에게 서신을 빼앗길 확률도 있었다. 특히 저자.

다한 경은 계속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칼리파 제국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들어갈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성에 접근하는 외부인을 칼리파 제국의 사람이 데리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 모습을 본 이후, 다한은 더 주의를 기울였다. 지지부진한 세월이었다. 베르타스의 곁을 떠나 온 지 7개월. 전서구를 날려 말을 전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도 제국인 라르헨의 결계에 막혀 새들이 길을 잃고 다시 되돌아오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소식을 전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도 기회를 노리는 다한 경이었다.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황궁 시녀복을 입은 여성이었는데 갑자기 남자들이 둘러싸더니 순식간에 여자를 데리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다한은 서둘러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놔요!”

“황궁 시녀라고 도도하게 굴지 말고. 우리 주인님이 보자고 하셨다니까.”

“난 바쁜 사람이에요!”

“말로 해야 해? 어디 한군데 부러뜨려서라도 데려오라고 하셨잖아.”

“그야 그렇지만…… 아가씨. 우리도 아가씨한테 험한 짓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런 사람들 아니야.”

“아니긴 뭐가! 그 사람이 보낸 거지? 백작?”

“알면 당연히 따라와야지!”

남자들이 서서히 그녀를 포위하던 그때였다.

“멈춰!”

“하…… 꼭 이렇게 나서는 것들이 있어요.”

다한의 말에 남자가 덧붙이면서 손가락을 휘저었다. 남자의 마력이 다한의 주변으로 쏘아졌다. 재빠르게 남자의 마법을 피한 그가 남자에게 달려가 목의 뒷부분을 내려쳤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법사인 남자가 쓰러지자 당황한 남자의 패거리들이 여자를 인질로 삼았다.

“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죽여.”

“그래……. 뭐?”

“죽이라고. 난 지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거 풀 데를 찾고 있었으니까 여자야 죽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어.”

싸늘한 표정으로 말한 다한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남자들을 하나하나 내려쳤다. 사심이 가득 담긴 강력한 행동이었다. 검집째로 내려치는 그 모습에서 후련함이 묻어났다. 계속해서 두들겨 맞은 남자들이 항복을 외치자 그제야 멈추었다.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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