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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50/161)

49화.

경이로웠다. 적어도 우스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만을 담고 있는 이실리스의 눈동자가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날 보면서 누구를 생각했지?”

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이실리스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를 넋 놓고 본 것은 아닐 터. 누구를 생각한 것인가.

“베르타스 힐렌튼인가?”

“뭐라고 하였나.”

이실리스의 눈이 생기를 머금었다. 천천히 번져나가는 환한 낯빛을 보면서 우스만은 속이 뒤틀렸다. 저 눈, 그리고 저 마음이 나를 향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이의 아버지를 생각했느냐고 물었지.”

“그렇다면 어쩔 텐가.”

“뭐 좋아.”

‘지금이야 대용으로 쓴다 해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 어차피 베르타스 힐렌튼이 이곳으로 돌아오기란 요원해 보이니까. 이 순간 이실리스의 곁에 있는 남자는 나야.’ 

나중에 베르타스 힐렌튼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제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고개를 까딱하면서 우스만이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태자치고는 경박해 보이는 태도였다. 그의 진심을 숨기기엔 가벼운 모습이 딱이었다.

“지금이야 그 남자 생각이 먼저 날 테지만 나중에 가면 아닐 테니.”

“…….”

말이 없는 이실리스의 모습에 우스만이 다시 속삭였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이실리스.”

“……욕심 없는 자도 있던가.”

“그런 욕심 말고. 네가 정 힘들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데리고 떠나주겠다.”

“뭐라고 하였나.”

“이실리스. 힘들다면 나와 함께 칼리파 제국으로 가자.”

“헛소리를.”

이전과는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우스만은 만족스러웠다. 고집을 버리지 않았던 그녀가 서서히 마음을 꺾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했나. 

‘아이를 잃었기 때문인가.’

우스만의 시선이 짙어졌다. 아이, 그 아이는 이실리스에게 어떤 의미였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아이와 함께 있을 때의 모습도 보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인 베르타스를 향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넘어가는 차향은 감미로웠으나 그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 마법사를 중간에서 사로잡길 잘했지.’

베르타스 힐렌튼에게 전령이 전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스만의 부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전령을 잡는 일이었다. 황궁의 밖에서 그리고 수도 밖에서 잡느라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전령의 신병을 확보했고 그의 서신을 빼앗았다. 마법사이기에 라르헨 제국에서 해를 끼칠 수 없었기에 전령을 칼리파 제국으로 보냈다. 당연히 양손엔 구속구를 채워서. 

아이의 행방을 묻는 이실리스의 절박한 마음을 읽었지만 우스만은 그 서한을 태웠다. 이런 글이 베르타스에게 도착하게 할 수 없었다. 도착한다면 분명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라르헨으로 향할 테니. 

찻잔 아래로 차가운 미소를 감추면서 그가 다시금 눈을 휘었다. 눈앞엔 사랑하는 여인이 있고 햇볕은 따뜻했고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정원은 그의 마음을 조금 전과 다르게 만들었다. 기회였다. 다시없을 기회.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우스만이 앞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이실리스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데리고 도망이라니……. 야반도주라도 하자는 건가.’

칼리파 제국으로 그녀가 간다면 그곳의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녀라는 전력을 얻게 되면 그녀를 따르는 마법사들의 절반가량은 칼리파 제국으로 귀화할 것이 분명했으니. 

‘나도 참. 헛생각을 하는군.’

베르타스 때와는 다르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도 그녀가 많이 약해졌다는 증거였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으나 그녀의 정신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침잠되어가고 있었다.

“할 이야기는 끝났는가.”

“아직 더 남았지만 바쁜 듯하니 양보하지.”

가볍게 말하는 우스만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짓했다. 그녀의 손을 우아하게 잡아 인사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이곳은 이제 안 왔으면 하네.”

“노력해 보지.”

우스만이 정원을 빠져나가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서류를 들고 왔다. 오늘 그녀가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이었다.

“폐하.”

“무슨 일인가.”

한참 동안 서류를 읽어내려간 이실리스의 앞에 알뤼르가 섰다. 수석마법사인 그는 황녀를 줄곧 찾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행방을 안다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라졌는데 황녀의 행방을 어찌 아는가. 귀한 복장을 하였으나 그 아이는 황족의 징표도 없는데.”

“그것은…….”

당황하는 알뤼르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급한 마음은 알겠네만 확인이 먼저일세.”

“알겠습니다. 소신이 너무 마음이 급했습니다.”

“내 자네를 믿고 있네. 언제라도 좋으니 찾아오게.”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보게.”

“예. 폐하.”

잠시나마 알뤼르의 말에 흔들렸던 자신을 다잡으면서 이실리스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베르타스에게서도 연락이 없다면 그녀의 아이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그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지만,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전령이 돌아와야 할 시간이 지났다. 아니면 그녀의 명을 받고 힐렌튼으로 향했으나 베르타스를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공작령에 머무르기보다 전쟁터를 전전했으니. 그래도 황제의 부름을 받고 돌아갔으니 언젠가 공작령에 도착은 하겠지. 힐렌튼의 황궁으로 직접 보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서신이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그랬기에 믿을만한 사람을 보낸 것인데 너무 늦었다. 그녀가 직접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제국의 결계를 다시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황궁의 결계야 바로 세워졌지만, 제국의 결계는 지금도 이실리스의 마력을 잡아먹으며 끝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제대로 세워지려면 일 년은 걸린다. 처음 그녀가 황위에 올랐을 때 결계를 구축한 시간보다 짧아졌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은 지금의 그녀에겐 긴 시간이었다. 이실리스는 손을 들어 호위 기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기사단은 어쩌고 있지?”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사이르카 후작이, 아니 이제는 후작도 아니지. 필레르가 이끌었던 기사단은 어찌 되었나?”

“일전에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지금은 감금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기사단 안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가봐야겠군.”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야겠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몸을 휘청였다. 잘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듯 가냘픈 그 행동에 호위 기사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괜찮으니 놓게.”

이실리스의 말에 화들짝 놀란 호위 기사가 태도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됐네. 나를 부축하느라 그런 것이니.”

안색이 파리하니 좋지 않았다. 표정을 애써 바로 하며 이실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힘들어도 일을 해결해야 할 때였다. 필레르의 모든 그림자를 지워야 했다. 

* * *

늦은 밤.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의 연락을 기다린 지 여러 날이 지난 밤이었다. 아이가 없어진 지 석 달째. 이실리스는 정신없이 정원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시녀들은 발을 동동 구를 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일전에 헤매는 그녀를 막아섰다가 마력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에 다들 물러섰다. 수석마법사인 알뤼르도 부재 상태인지라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시녀들이 전전긍긍하면서 그녀를 살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안타까워 몇몇 시녀들은 뒤로 돌아 눈물을 훔쳤다. 그때였다.

“지금 이게 대체…….”

은은한 달빛을 따라 정원을 산책하던 우스만이 이실리스를 발견했다. 가까이에 다가가자 저를 향해 마력을 모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스. 나야.”

자그마하게 속삭여진 그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흐린 눈을 들어 그에게 속삭였다. 눈물 젖은 처연한 얼굴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베르타스?”

여기서도 그놈 이름이라니. 우스만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 감정을 내리눌렀다. 지금 그녀에게 윽박지를 수는 없으니까.

“그래. 나야.”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제가 사랑했던 이실리스는 어디 갔는가. 그 밝고 당당하고 아름답던 그녀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가냘프고 쓰러질 것 같은 여인만 이곳에 있는가. 저를 끌어안는 몸을 느끼면서 우스만은 생각했다. 그래도 놓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제 여인이었다.

“베르타스.”

그녀가 저를 끌어안으면서 흐느끼자 주변에서 시녀들이 다가오려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워지려는 시녀들을 우스만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래. 이실리스. 왜 울었지?”

그의 말에 그녀가 얼굴을 들어 속삭였다.

“우리 아이를 잃어버렸어.”

“괜찮아.”

“소중한 아이였는데, 내 아이였는데, 나의 후계가 될 아이였는데!”

마지막은 거의 소리치듯 커지는 목소리에 시녀들이 모두 몸을 흠칫하며 뒤로 돌아섰다. 비통하게 외치는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입을 열 수 없었다. 우스만 칼리파를 빼고.

“아이는 다시 낳으면 돼.”

조금은 차갑게 떨어지는 그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흠칫했다. 싸늘해지는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이실리스를 끌어안고 있어 그의 눈빛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베르타스인 척 속일 수 없었을 테니.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실리스는 우스만에게 다시 물었다.

“다시?”

“그래. 다시?”

“그 아이는 다른 아이인데?”

“그래도 괜찮아. 너의 아이잖나.”

“베르타스.”

“괜찮아 이실리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남자의 이름이 듣고 싶지 않아 우스만은 이실리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너무 몸이 가늘어서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그의 품에서 흐느끼던 그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 하자 우스만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제야 주위를 지키던 시녀들이 서둘러 다가왔다.

“언제부터 이랬던 건가.”

“꽤 되었습니다.”

시녀 한 명이 나서서 그에게 말했다.

“꽤 되었다니. 그런데 왜 아무도…….”

“폐하께도 고하지 못하였나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는 시녀의 말에 우스만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아픈 것이었나? 내가 저지른 찰나의 심술이 그녀에겐 이렇게 아픈 것이었어?’

우스만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시녀들에게 말했다.

“내가 있으면 잠시 진정이 되는 것 같으니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나를 부르러 오게. 아니, 내가 이 시간에 이곳으로 나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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