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9/161)

48화.

“힐렌튼 제국의 공작령으로 가서 전해라.”

“알겠습니다.”

“답신을 꼭 가져오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아무도 모르게 다녀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전령으로 선택된 마법사가 고개를 조아리자 이실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조심스럽게 물러나서 그녀의 뒤에 서는 마법사가 흡족했다. 적어도 지금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변의 이목을 생각한다는 것이니. 세심한 그의 행동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답신이 오면 알 수 있겠지.’

* * *

힐렌튼 수도까지의 여정은 길었다. 서둘러서 가야 할 길도 아니었기에 베르타스는 천천히 군대를 움직였다. 헥터의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쳐들어갈 예정이었다. 그의 품 안에는 아이가 잠들어있었다.

“아주 순하네요.”

“그런가?”

“말도 마십시오. 우리 집 아이는 매일 울어대서…….”

“아이가 있는가?”

“이제 한 열 살 정도 되었겠군요.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휴가를 주겠네.”

“길게 주셔야 합니다.”

“당연한 소리를.”

아이를 보면서 웃는 부관의 얼굴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부관이 다시 말했다.

“황녀께서 영민하신가 봅니다.”

“음?”

“어찌 보면 이곳이 낯설 텐데도 잘 적응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베르타스는 머리를 때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랬다. 아이에겐 처음 보는 장소,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배고프지 않으면 울지 않는 아이였기에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네던 부관이 아이의 밥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막사를 벗어나자 뒤에서 주춤대고 있던 그의 또 다른 부관, 다한이 입을 열었다.

“그…….”

“뭔가.”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연락하셨습니까?”

“잊고 있었군.”

진군을 위한 계획을 짜고 그 시간 이외엔 아이와 함께하느라 잊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이실리스는 얼마나 두려울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해 잠시나마 잊었던 그녀.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던 그녀가 떠오르자 베르타스는 아차 했다. 서둘러 종이에 내용을 휘갈겨 쓴 그가 인장을 찍어 봉인했다.

“다한 경.”

“네. 각하.”

“이 서신을 전해주게.”

“누구에게…….”

“라르헨 제국의 황제. 이실리스 라르헨에게.”

경악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다한의 얼굴을 마주하니 뭔가 우스웠다. 

“가…… 각하,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뭐라고 들었는가.”

“그…… 이실리…… 아니, 라르헨 제국의 황제…….”

“맞네.”

“미치셨군요.”

“미치긴.”

“아이의 어머니께 쓰라니까요.”

“썼다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라르헨의 황족이자 힐렌튼의 황족. 라르헨의 유일한 후계일세.”

입을 떡 벌리고 저를 바라보는 부관에게 베르타스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자네뿐이니 조용히 다녀와 줘야겠네.”

“조용히 말씀이십니까.”

베르타스의 눈에서 위험함을 읽은 다한이 긴장감에 몸을 굳혔다.

“그래. 아주 은밀하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경의 목숨이 위태로울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알아 오게. 이 아이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라르헨의 황실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왠지 죽으란 소리로 들립니다만.”

농담하는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저렇게 약한 소리를 하지만 제 명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은 헥터 외엔 다한 밖에 없었다.

“무운을 빌지.”

“감사합니다.”

베르타스의 서신을 받아든 다한 경이 자리를 뜨자 다시 아이를 들여다봤다. 이동하는 것이 피곤할 법도 한데 보채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귀한 아이였다. 저와 이실리스의 유일한 후계이자 두 나라의 황족. 그런 아이가 제대로 된 방도 없이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잠을 자다니. 길에서 잠을 재우다니.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군.’

이런 생각에 미치자 베르타스는 결심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주겠다고. 힐렌튼의 황위뿐 아니라 라르헨의 황위도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힐렌튼이라는 제국명을 없애야겠어.”

아이가 라르헨의 황족이니 라르헨으로 힐렌튼을 흡수 통일시킬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을 부관들이 안다면 반발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힐렌튼이 자력으로 살아남기에는 이미 불가능했다. 넓혀 놓은 국경에서는 마물이 넘쳐나고 있었고 야만족들이 호시탐탐 힐렌튼을 노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칼리파 제국도 힐렌튼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빌미만 생긴다면 쳐들어온다는 것에 저의 목숨을 걸 수 있었다. 제국으로 들어서면 지금의 황제와 황태자를 죽이고 그 후에 귀족들을 설득하면 된다. 아이를 제위에 올리고 바로 라르헨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라르헨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귀족들은 서서히 라르헨으로 터전을 옮길 것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라르헨에 우호적인 제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보기보다 쉬울 터였다.

귀족들에게 수탈당할 대로 수탈당한 제국민은 이미 힐렌튼에 대한 충성심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에게 지배자가 바뀐다는 것은 세금을 거두어가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라르헨과는 상황이 달랐다. 힐렌튼의 제국민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도 베르타스. 그였다.

* * *

“여기서 뭐 합니까?”

“우스만 칼리파.”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이실리스의 앞에 우스만이 나타났다.

“한가하군.”

시종들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우스만이 태도를 바꿨다. 

‘변하지 않는 자로군.’

황제인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는 것도 기함할 노릇인데 방자한 태도라니. 그래도 저 모습이 그리 밉지 않은 이유는 어릴 적부터 알았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저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를 내칠 수 없기 때문인가. 

“한가하다니. 잠시 쉬는 것을.”

“이실리스.”

“…….”

묵묵히 차를 입에 머금는 그녀를 보더니 우스만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그의 앞에 의자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녀가 다가와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르자 짙은 아카시아 향이 흘렀다.

“차향이 좋군.”

이실리스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눈만 돌려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스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차를 즐기나?”

“사막에서는 차가 귀하지.”

“그렇겠군.”

“여기 있는 동안 많이 마셔보려고.”

“돌아갈 때 챙겨주지.”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싱긋 웃으며 말하는 우스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오드아이를 지닌 그의 금안이 반짝이자 옆의 청안도 일렁였다. 보석을 보는 기분이었다. 

‘베르타스의 눈은 흑요석 같았지.’

우스만의 눈을 보면서 베르타스를 떠올렸다. 베르타스의 눈도 우스만의 그것처럼 늘 그녀를 향해서 빛나고 있었다. 전령을 보낸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 의아했다.

‘지금쯤이면 도착을 해야 하는데…….’

전령이 떠난 지 한 달째.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은 왜일까. 

‘바쁜 것인가.’

베르타스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을 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생각에 빠져 아무런 말이 없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스만이 속삭였다.

“아이는 아직 찾지 못하였나?”

“…… 그렇네.”

“거의 삼 주 지나지 않았나?”

“그렇지.”

우스만의 말에 괜히 심란해진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 나와 있는 이유도 그거였다. 아이의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나왔는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아이를 찾는 것을 도와주지.”

“…… 그대가 왜.”

“너와 내가 국혼을 하면 나의 아이이기도 하니 도와주지.”

“우스만 칼리파.”

“그러니 우울해하지 마.”

“뭐?”

“화사한 정원에 봄꽃 같은 네가 앉아있는데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여서. 어릴 적 너는 뭘 하던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는데 뭐가 이렇게 너를 변하게 만든 거지?”

‘변했다니…… 내가?’

우스만의 말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 아이를 잃은 스트레스로 그녀는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계속해서 후회했다. 나는 왜 황궁의 결계를 거두었는가. 항상 함께하던 아이를 왜 혼자 돌아가게 했는가. 

그날 나는 왜. 

다시금 깊어가는 생각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늦은 후회였다. 아이를 잃고 나서 드는 생각은 모조리 저런 생각뿐이었다. 후회 그리고 또 후회. 계속되는 후회에 그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결국 걱정하던 황의가 그녀에게 잠을 잘 수 있는 약초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약초를 먹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가 없어지고 나서 그녀는 탈력감에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었다. 

“모르겠군.”

“너답지 않아 이실리스.”

저렇게 말하는 것도 귀찮았다. 손을 내저으면서 이실리스가 우스만에게 가보라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내밀었던 손이 잡혔다. 서늘한 기운을 가진 손에 놀란 그녀가 흠칫하자 우스만이 이실리스를 향해 말했다.

“이실리스 그대에게 이렇게 풀죽은 모습은 어울리지 않아.”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면서 우스만이 속삭였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계속 베르타스가 생각났다. 

‘그의 손은 따뜻했었지.’

서늘한 우스만의 손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손이었다. 뜨겁고 강렬한. 그리고 저를 감싸는 온기를 지닌 손이었다. 계속해서 드는 상념을 떨쳐내려는 듯 이실리스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붙잡힌 손을 빼내었다.

“나다운 것은 뭘까.”

너무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강해진 황권을 누르려는 귀족들을 견제하느라 힘들었고 자리를 잡으니 후계를 낳으라는 그들에게 시달렸다. 국경에서 가끔 나타나는 마물들이 그녀의 결계를 건드릴 때마다 죽죽 빠져나가는 마력을 느껴야 했으며, 그것으로 부족할 때엔 직접 전쟁터에 나섰다. 그것이 황족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아이도 잃고 충직하다고 생각했던 신하도 잃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우스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실리스를 붙잡았다. 그녀가 팽개친 손을 다시 잡으면서 속삭였다.

“이실리스.”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는 여기 있지 않았다. 불안해진 그가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날 봐.”

허공을 헤매고 있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담고 있지 않은 그녀의 시선에 우스만이 손에 힘을 주었다. 강한 힘에 흠칫한 이실리스의 시선이 또렷해졌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담는 그녀의 눈동자에 감탄했다. 군청색 눈에 담겨 있는 그의 얼굴. 저를 직시하는 그 시선. 어두운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그 눈동자가 별이 박힌 듯 반짝이며 그를 향해 빛났다.

“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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