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161)

47화.

“그것이 너와 선황의 약속인 건가?”

“정확히는 라르헨의 선황과 칼리파 황제의 약속이지만, 나는 나의 뜻대로 할 거야. 내 눈에 네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떡해서든 국혼을 피하려고 수를 썼겠지만, 네가 내 시선에 들어온 이상 난 피할 생각이 없어.”

“우스만 칼리파. 난 나의 국혼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없네.”

“기가 차는군. 여제의 국혼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그녀의 얼굴에서 점차 멀어진 우스만이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준 기회를 적절하게 이용하겠다는 소리군.”

“마다할 리가 없지.”

“일 년 후엔? 그 후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것은…….”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전부는 아니야. 여제가 국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지.”

“왜?”

“제국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앉은 이가 국혼을 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나? 두고두고 다른 제국에 얕잡아 보일 것이 분명한데 라르헨에서 그런 취급을 감내할 리 없지. 게다가…….”

“게다가?”

“지금은 황족도 실종된 상태. 황족이 없다면 뒤를 이을 후계도 없는 것. 이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우스만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황녀가 실종된 것이 문제였다. 베르타스의 말에 따라 국혼을 일 년 미루기는 했으나 후계 자리에 앉을 황녀가 사라졌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베르타스가 무언가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쌍인 목걸이 중 다른 하나가 가지고 있는 보호 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황녀를 찾을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믿을 만한 전령을 보내야겠군.’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좌표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지 않은 이상 그녀가 그에게 연락할 방법은 서한이 다였다.

“황녀를 찾고 난 뒤 생각하겠네.”

“그사이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어.”

대답을 피하는 이실리스를 침잠된 눈으로 지켜보던 우스만이 입을 열었다.

“좋아. 기다려주지.”

“뭐라고?”

“그동안 라르헨의 황성에서 머무르면서 기다리겠다고.”

“너 지금…….”

“너라니. 친근하게 들리는군.”

“우스만 칼리파. 장난은…….”

“장난이라고 생각하다니. 날 뭐로 보는 건가. 이실리스.”

닿아올 듯 가까워지는 그의 입술을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우스만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실리스.”

“…… 선황 폐하!”

“오는 길에 들었다. 일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 * *

선황의 등장은 그녀에게 득인가 실인가. 이실리스는 알 수 없었다. 앞에서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스만과 선황을 보니 더욱더 그러했다. 

“대체…….”

“베루스 공작이 연통을 넣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공작과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했으나 베르타스의 도움으로 인해 넘어간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니. 베루스 공작이 이미 연락을 넣은 상태였다니.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숨긴 채 이실리스는 선황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왜 오신 겁니까.”

“너의 국혼 때문에.”

“저에게 버리듯이 황위를 이양하실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낮아지는 온도에 우스만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이상한 기운을 눈치챈 그가 자신은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눈치는 빨라서 좋군.’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우스만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짓는 선황의 태도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선황…….”

“내 손녀가 없어졌다 들었다.”

“소식도 빠르시군요.”

“빠르다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그에 얽힌 사이르카 후작가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관용을 보이진 않을 겁니다.”

“당연한 것 아니더냐. 황제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제위에 피를 묻히더라도 권위를 잃으면 안 되는 것이 황제야.”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선황은 늘 그랬다. 어머니로서의 자애로움을 보이기보다, 황위 후계자를 교육하는 태도를 제게 고수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다투던 아버지와 선황의 모습이. 아버지와 늘 싸웠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어머니라는 호칭보다 폐하라는 혹은 선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그녀를 불렀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납치된 직후였지.’

아버지의 품에 안겨 돌아왔던 그때부터 그녀는 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변한 호칭을 눈치챘을 법도 한데 선황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버지가 그녀를 구해 돌아온 그때도 그녀를 걱정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안위를 살핀 어머니였다. 섭섭했으나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면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교육뿐이었으니. 그래도 아주 어머니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그녀가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릴 때였다. 스르륵 방문이 열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준 따뜻한 기억이 있었다. 그 온기 덕분에 납치당하고 돌아온 그 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라고 하기엔 부드러웠던 그 손은 선황의 것이었다.

“손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구나.”

“조금 일찍 돌아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선황이 있었다면 그녀의 아이가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선황의 마력은 그녀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라르헨의 황족. 

‘그녀가 있었다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털면서 이실리스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마력을 타고나지 못하였다지?”

시종이 준비한 자리에 앉으면서 선황이 입을 열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난리였군.”

“베루스 공작이 말한 겁니까?”

“제국에 소문이 파다하다.”

“제국에…… 말입니까?”

“마력이 없는 황녀가 왕위를 이을까 걱정하는 자들이 많더구나.”

“…….”

“아이가 없어졌으니 할 말은 아니다만. 국혼을 미루었다지?”

“그렇습니다.”

“일 년 후라고.”

“네.”

“그럼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황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가십니까?”

“잠시 들린 것이니.”

“그냥 가시는 것입니까?”

어딘지 물기 어린 그녀의 말에 선황의 고개가 돌려졌다. 몸을 떨고 있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차가운 그녀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아직 멀었구나.”

“어머니.”

간절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선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물렀다 가겠다. 여봐라!”

“네. 선황 폐하.”

“내 방을 마련하거라.”

“알겠습니다.”

“네가 잡념이 많은 것 같으니 기다려주마.”

그 말을 끝으로 알현실을 나서는 선황의 뒷모습을 이실리스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나오셨습니까.”

“그럼 그리 부르는데 안 올까.”

“또 폐하께 엄한 말씀을 하신 건 아니시지요?”

“내 무슨 말을 하겠나. 공작.”

“늘 혼을 내시잖습니까.”

“혼날 만하면 혼나야지.”

“어린 나이에 제국을 이끌고 계신 분입니다. 그 중압감은 선황 폐하께서 넘기신 거고. 유독 폐하께 엄하십니다.”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닐세.”

“그래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베루스 공작의 첨언을 듣고도 선황의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저 아이에게 질투하고 있다고.’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아이였다. 싫어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을 닮은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얼굴을 하고 강력한 마력을 지닌 아이를 보고 있으면 계속해서 채찍질하게 되는 것이었다. 

‘강한 마력을 가졌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한다. 강한 마력을 지니지 못한 나도 그 정도는 했으니 너는 더 하여야 한다.’ 그녀의 마음은 그러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이실리스에게 약한 소리를 하려는 제 마음을 붙잡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또 이러다니.

아무 말이 없는 선황의 모습에 베루스 공작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머무실 겁니까.”

“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시종들이 분주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군. 저 아이가 조금 흔들리는 듯하여, 그 흔들림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어야겠네.”

“선황 폐하.”

“왜 부르는가.”

걸음을 옮기면서 선황이 말하자 서둘러 따라붙은 베루스 공작이 말했다.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와 정말로 국혼을 치르게 하실 생각입니까.”

“귀족들을 견제하기에 그만큼 좋은 이가 없지.”

“폐하의 마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황제의 마음은 중요치 않네.”

“선황께서는 원하는 분과 국혼을 하셨잖습니까.”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이와 일을 하는 것도 피곤하군.”

선황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

“힘을 실어 주십시오.”

“나는 그냥 지켜보겠네.”

“그것만으로도 폐하께 큰 힘이 될 겁니다.”

“수호자 역할을 확실하게 하는군.”

“알아채셨습니까?”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까.”

웃어넘기는 선황을 보면서 베루스 공작도 환히 웃었다. 딸 같은 사람이었다. 황제는 그에게. 딸이 없는 그로서는 이실리스가 마치 자신의 딸 같았다. 새로운 황족의 탄생. 그리고 아픔을 가진 그 황족의 선대. 처음 수호자로 정해지고 황제를 보았을 때,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살며시 쥐었다. 그 온기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숨기며 베루스 공작은 맹세했다. 지켜주겠다고. 그때부터 시작된 그의 충심은 여태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 * *

선황이 알현실을 나서고 혼자 남겨진 이실리스는 머리를 짚었다. 한참을 넋 놓고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베르타스에게 전령을 보내야 했다. 필기구를 들어 구구절절 편지를 쓰던 그녀가 다 쓴 편지를 들어 읽더니 마력으로 불태웠다.

“나도 참…….”

거의 반 이상이 보고 싶으니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적어 내려간 글에 남겨진 저의 본심에 이실리스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이런 마음을 베르타스는…….’

알까. 멀어지니 그리워지는 것은 왜인가. 아이를 낳고 나서 몇 번이고 생각났지만, 일부러 찾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이 두려워서였다. 결국, 자신이 두려워했던 대로 되어버린 제 모습에 몸서리쳤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남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러는가. 왜 이렇게 약해졌는가. 황녀를 잃어버렸기 때문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앞에 놓인 하얀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써 내려간 종이를 다시 읽고 다시 태웠다. 그렇게 세 번의 종이가 태워지고 간략하게 황녀의 실종을 알리는 내용을 적은 그녀가 전령을 불렀다.

“이 서신을 베르타스 힐렌튼에게 보내라.”

“베르타스 힐렌튼 말씀입니까?”

“그래.”

“어디로…….”

“어디로 보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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