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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47/161)

46화.

그의 말을 부정하는 수하들을 보면서 그가 웃었다. 그의 군대는 둘로 나뉘어서 힐렌튼의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첫째, 첩보 작전을 펼치는 군사들은 칼리파 제국의 국경 쪽으로 가서 혼란을 일으킨다. 칼리파 제국과 힐렌튼 제국의 사이를 벌려 놓으려는 수작이었다. 그가 수도를 장악했을 때, 칼리파 제국에서 힐렌튼을 돕는답시고 군대를 파견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둘째, 다른 군대는 헥터의 지휘하에 산악지대를 가로지른다. 라르헨에서 힐렌튼의 수도까지 가장 빠른 길은 배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산이 워낙 험난하여 군대가 그 산의 절벽길을 걸어서 힐렌튼의 수도로 쳐들어갈 수 없다고 다들 알고 있었다. 베르타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가 그 길을 통해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평생 그렇게 알고 있었을 터였다. 베르타스가 그려준 지도를 들고 헥터가 군사들과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베르타스가 힐렌튼의 수도를 향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수하들은 정공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베르타스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향하는 것이었으니 수도의 정문에서 군대를 막는다면 바로 황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오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장 쉬운 것은 정문을 여는 것. 황제의 부름을 받은 그에게 성문이 열리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 각하. 그렇다면 아이의 어머니는…….”

“자네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닐세.”

화려한 옷을 입은 아이가 떨어지자 수하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들의 궁금증에 가볍게 답하면서 베르타스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아이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과 머리카락 색이 똑같았다. 검은 머리에 군청색 눈. 어두운색을 지닌 아이의 눈동자를 보면서 이실리스를 생각했다. 

그와 만났던 시간의 그녀는 밝은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지만 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만났던 그 아이와 그녀가 똑같은 아이라니. 그 의심이 사실로 변하자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살아있었다니.

“그런데 왜 여기로 온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군.”

“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거냐면서 수하들이 그의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꺄르르 웃는 아이가 귀여웠던지 주변을 지키던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를 돌볼 유모를 구해야겠습니다.”

“여인을 군대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 병사 중 아이를 돌본 경험이 있는 자로 찾아보겠습니다.”

“부탁하네.”

베르타스의 손에서 아이를 받아든 부관이 막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베르타스를 기다리는 수하들이었다.

“어디까지 하였지?”

* * *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면서 이실리스가 입을 열자 귀족들이 무릎 꿇었다. 

“황녀가 사라지고 나서 바로 사람을 보냈건만 찾지 못했다고 하였나?”

“마력이 사용된 흔적은 있으나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없습니다.”

“왜? 라르헨에서 마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던가?”

“그…… 폐하께서 마력 결계를 세우셔서 그 미미한 마력이 묻혔습니다.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내 탓이라는 건가!”

“아닙니다.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내 귀족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어!”

팔걸이를 내려치면서 그녀가 분노하자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였다.

“고정하소서.”

“고정?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는가!”

“폐하.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그대가 감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다. 아이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내리눌렀다. 오만방자한 귀족들도 봐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라의 결계도 새로 세워주었다. 그랬는데 결과가 이것이라니. 보호 마법이 발동된 것이 분명한데 아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아니, 살아있기는 한 것인가. 그녀가 제풀에 못 이겨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신하들이었다.

“찾아! 세상 끝까지 뒤져서라도 찾아와라. 나에게 약속했던 후작은 어디 갔는가!”

“계속 찾고 있습니다. 폐하. 그러니 진정하소서.”

베루스 공작이 나서서 이실리스를 달랬다. 벌써 아이가 사라진 지 이틀이 지났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황녀께 무슨 일이 생기셨다면 시신이라도 찾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데려간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의 옷은 황족이 입는 옷이다. 그것을 보고도 황실에 알리지 않았다고?”

“일개 제국민이 황실에 연통을 넣기란 쉽지 않을 터. 전 제국에 알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안 됩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밀레르 후작이 반대했다. 한발 앞으로 나서 말하는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른 제국에서 알게 되면 외려 황녀님께 변고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은밀하게 찾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폐하.”

“은밀하게든 뭐든 다 좋으니 데려오게. 내 아이를 데려오라고!”

“명심하겠습니다.”

밀레르 후작이 읍소하며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실리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짓을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이 알현장을 빠져나갔다.

“저런 것들을 믿고 있었다니 내가.”

“폐하.”

“왜 부르는가.”

“사이르카 후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배후를 캐라. 아직 젊은 후작이 이 모든 일을 혼자서 계획했을 리가 없다. 잡아들인 불순분자들은 어떻게 되었지?”

“아직 나이가 어린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상하군. 그자들에게 이상한 사상을 심어준 자는 누구인가?”

“알 수 없어 계속 심문 중입니다.”

“백치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알뤼르가 나가자 알현장 밖에서 시종의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칼리파 제국의 우스만 칼리파가 접견을 청하옵니다.”

“돌아간 것이 아니었나?”

“돌아갔다 다시 오신 듯합니다.”

“내 여력이 없으니…….”

“이실리스!”

“무례하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찌 된 것입니까?”

다른 제국의 황태자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다니 라르헨의 위상이 많이 낮아졌다. 아무런 답이 없는 그녀에게 우스만이 다시 입을 열려 했다. 그의 입을 손짓으로 막으면서 이실리스가 사람을 물렸다. 시종들과 다른 마법사들이 자리를 비우자 그녀가 우스만에게 물었다.

“제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나?”

“별일 아니었지. 그래서 되돌아왔네.”

“라르헨의 황궁은 자네가 집처럼 오가는 곳이 아닐세.”

“그래서 내가 선황과 같이 왔지.”

“뭐?”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만났다네.”

“어디 계신가.”

“밖에.”

“밖에?”

“수도를 돌아보겠다고 하더군.”

아이를 잃어버린 것만으로 머리가 아픈데 선황까지 등장하다니. 이실리스는 우연처럼 맞아떨어지는 묘한 사건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보니 아이가 없어졌다고 하던데.”

“어디서 들은 거지?”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

“…….”

“찾지 못했군.”

“…….”

아무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빤히 바라보던 우스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와줄게.”

“뭐?”

“우리 쪽 사람들을 풀어서 찾아주겠다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를 찾는데 손을 빌려주겠다니. 

“왜지?”

“널 사랑하니까.”

“뭐?”

“난 널 사랑해 이실리스. 그러니 네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겠다.”

“라르헨의 황제인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없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만 인정하지 그래? 그냥 내 도움을 받아. 칼리파 제국의 전사들은 생각보다 첩보전에 능해.”

“외모만으로 튀는 그들이?”

“칼리파 제국은 인재를 사랑하지. 라르헨의 모든 이들이 너에게 충성을 다하리라 생각해서는 안 돼.”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면서 우스만이 말하자 이실리스가 헛웃음을 쳤다. 

“내 집에 첩자를 두었다는 소리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긴. 그렇군.”

우스만은 이상한 힘을 지닌 사내였다. 어릴 적부터 얼굴을 보아온 탓인가 그와 대화를 하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남녀 사이의 긴장감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후 날카로웠던 신경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잠은 좀 잤나?”

그가 말할 때까지 그녀가 요 며칠 침대에 누운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소에 들어갔다가도 탁자에 앉아 서류를 보다 대충 눈을 붙인 것이 전부였다.

“이 나라의 황의들은 황제의 건강을 챙기기는 하는 건가!”

“우스만 칼리파. 그대가 신경 쓸 것이…….”

“아니기는! 사랑하는 여인이 잠을 못 이룬다는데!”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에게 다가오는 우스만의 행동에 손을 내저었다.

“시끄러우니 그만하게. 내 기분도 나아졌으니.”

“다행이로군.”

“칼리파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가.”

“이미 라르헨의 선황이 연락을 넣어줬지.”

“선황께서?”

“다시 말하지만 이실리스. 선황은 너와 내가 국혼을 치르길 원하는 사람이야. 나도 그걸 원하고. 그렇기에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선언하듯 말하는 우스만의 말에 이실리스가 그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 보았던 그 고집스러운 아이가 어느새 남자가 되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의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그였다.

“나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네.”

“나와 국혼을 치르면 그 아이도 감싸겠네. 그 아이를 후계 삼아도 아무 말 하지 않겠어.”

성큼성큼 옥좌에 다가와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는 우스만의 얼굴에 이실리스가 뒤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등받이가 그녀를 막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그녀였지만 긴장되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을 확인한 우스만이 싱긋 웃었다. 팔걸이에 손을 짚은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의 두 번째 아이는, 아니 그 이후의 아이들은 내 아이였으면 해. 이실리스. 그 아이들은 칼리파 제국의 전사가 될 거다. 라르헨의 황제가 아닌 칼리파의 황제이자 전사. 라르헨의 황위엔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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