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라고 했네. 나더러 어쩌라는 겐가.”
“폐하! 황족은 라르헨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나의 권리는 지켜주지 않으면서 의무만 강요하다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자네들에게 왜 내가 힘을 써야 하는가?”
“폐하!”
“사실이지 않나. 왜. 날 가둬두고 마력이라도 뽑아 쓰려 하나?”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사이르카 후작이 한 망발을 전해 들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달려온 모든 귀족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난 늘 그대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한목소리로 외치는 귀족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혀를 찼다. 국경에 나타난 마물을 제대로 처리하기 힘드니 힘을 빌려달라는 소리였다. 스스로의 이익에 눈이 멀어 한목소리로 외치는 귀족들을 보니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폐하.”
“아직 나의 휴가는 끝나지 않았다.”
넘쳐흐르는 마력이 마음에 들었다. 황제의 위를 물려받고 이처럼 컨디션이 좋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무언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그 상실감을 지니고 살았는데 마력 소모가 없는 지금. 그녀의 몸은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폐하. 젊은 귀족의 말실수에…….”
“말실수? 지금 실수라 하였나?”
“소신이 실언하였습니다!”
말을 꺼낸 후작이 제대로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조아렸다. 점점 차가워지는 이실리스의 눈빛에 베루스 공작이 나섰다.
“폐하.”
“말해보게 공작. 황족에 대하여, 황족의 마력에 대하여 함부로 언급한 자를 어찌하면 좋겠나.”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호오. 그래도 된다는 건가.”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입니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듯합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귀족들 하나 하나에게 시선을 던지자 피하는 귀족들이 몇 있었다.
“작위 계승법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공작 각하!”
“조용히 하게!”
베루스 공작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다시금 허리를 숙인 그가 이실리스를 향해 말했다.
“부디 그자들을 벌하시고 제국민을 가엽게 여겨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소서.”
사이르카 후작과 같은 생각을 하는 귀족들의 처분을 이실리스에게 맡기겠다는 베루스 공작의 말에 다른 귀족들도 동의했다. 당장의 마물이 급했다. 사이르카 후작령이 마물의 침공을 버텨내지 못하면 다음 영지는 백작령이었다. 다른 제국에서 그들의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병력을 돌릴 수도 없었다. 이실리스의 마력에만 의존하고 달라진 상황에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패인이었다.
“그렇다면 인장을 찍게.”
“네?”
이실리스는 자신에게 기어오르려는 귀족들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마력을 거두어가면서 자신의 힘을 내보인 이유는 황녀를 위함도 있지만, 황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강력한 황권을 위해 귀족들의 각서를 받아야 했다.
“가져오게.”
“네. 폐하.”
그녀의 부름에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귀족들이 반역을 꾀했을 때 그 처분을 황제에게 맡긴다는 각서였다. 서류를 읽은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반역을 저지를 건가 보군.”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귀족들이 앞다투어 인장을 찍었다. 모인 귀족들이 거의 다 인장을 찍었을 무렵 비스듬히 누워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계가 필요하다고 하였나?”
“그러합니다. 폐하.”
“그대들이 나에게 신의를 보였으니 나 또한 그에 보답해야겠군.”
말을 마친 그녀가 제국 곳곳의 결계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가득 채워졌던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황성의 결계가 다시 촘촘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폐하!”
“조용히 하게!”
“폐하! 안 됩니다!”
결계를 세우려는 이실리스를 알뤼르가 방해하자 주위의 귀족들이 그를 붙들었다. 이실리스도 그를 보았지만 결계를 세우는 도중에 멈춘다면 마력의 반탄력으로 그녀가 다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결계가 완성되자 이실리스가 알뤼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황녀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뭐라고 하였나 자네?”
“귀족들이…… 귀족들이!”
분노를 담아 외치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의 앞에 서 있던 귀족들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서약서를 작성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발생한 일에 귀족들도 당황했다.
“영상석을…… 영상석을!”
분노한 이실리스의 마력이 폭사 되면서 외치자 호위 기사와 마법사가 서둘러 움직였다. 그들이 영상석을 가져오는 동안 알뤼르의 말을 들었다.
“황녀님을 모시고 가던 중, 젊은 귀족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황궁의 결계가 없어진 틈을 타서 궁으로 들어왔고 그들과 맞서 싸우던 중 황녀님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지셨습니다.”
“몸에서 빛이 나?”
“그러합니다.”
입술을 짓씹으면서 말하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휘청였다.
“폐하!”
베루스 공작이 걱정을 담아 외치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누구냐. 누가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사이르카 후작의 생각에 동조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디 있나.”
“구속 마법으로 잡아두었습니다. 한 명은 놓쳤지만 결계가 발동되었으니 쉽게 나가지 못할 겁니다.”
“찾아와.”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뤼르가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갔다. 타오르는 눈으로 귀족들을 둘러보는 그녀를 마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낮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한 귀족이 덜덜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폐하. 제발 분노를…….”
“내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닐세.”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네. 공작.”
그녀의 말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녀가 노려진 것이 세 번째. 마지막에 결국 성공하였군.”
참담함이 앞을 가렸다. 그녀가 했던 이 모든 행동은 의미 없게 되었다. 단지 그 아이를 위한 것이었는데 아이가 없어지다니.
“저…… 저희가 찾아오겠습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찾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숨을 고르면서 눈을 감았다.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흥분해서 좋은 것은 없으니. 이실리스는 계속 생각했다. 침착하려고 했다.
‘몸에서 빛이 났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 황녀가 마력을 발현했거나 베르타스의 목걸이에 걸려 있던 보호 마법이 발현된 것. 어느 쪽이든 좋았다. 둘 다 황녀가 무사하다는 이야기니까. 알뤼르의 말에 의하면 귀족들이 황녀를 해할 틈이 없이 빛을 발하고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이실리스는 황녀가 살아있다는 쪽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게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앞에서 아우성치는 귀족들을 침잠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황녀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합니다. 폐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제가 하겠다 나서는 귀족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귀족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냉정해지려 애썼다. 황녀는 살아있을 것이다. 보호 마법이 걸린 마법 무구가 그 아이를 보호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되뇄다. 찾기만 하면 된다.
“자네들을 믿어야 하는가?”
“믿어주십시오.”
“불경한 생각을 하는 이들은?”
“그들도 찾아내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베루스 공작을 필두로 다른 귀족들이 앞다투어 말을 꺼냈다. 이대로 이실리스가 결계를 해지할까 두려운 귀족들이었다.
“베루스 공작. 변경백을 잡아 오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밀레르 후작.”
“네. 폐하.”
“그대에게 황녀를 찾는 일을 맡기겠네. 반드시 찾아서 내 앞에 데려오게.”
“명을 받듭니다.”
“나머지 귀족들은 당연히 저 둘에게 협조하겠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목소리로 말하는 귀족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는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물러나는 귀족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널뛰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황녀의 무사함을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시선을 돌리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었다. 황제의 불안은 그들의 눈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참을 왔다 갔다 하던 그녀가 그 자리를 벗어나 집무실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금방 찾을 수 있겠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 * *
베르타스는 갑자기 느껴지는 마력에 당황하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걸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우아아앙!”
힘차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막사를 울렸다. 회의 중이던 수하들이 다들 놀라 바라보았다.
“각하, 무슨 일입니까?”
“이 아이는 뭡니까?”
“누굽니까?”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품 안에 안착한 아이는 우렁차게 울어댔다. 어설프게 아이를 어르면서 베르타스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아이였다. 그와 이실리스의 딸.
‘황궁에서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란 이들이 회의를 중단하고 베르타스에게 다가왔다. 덩치가 커다란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딸은 울음을 멈추고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사내들의 기감에 눌릴 법도 한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딸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대장, 웃지만 마시고 말씀을 하시라고요. 대체 누굽니까.”
“내 딸.”
“아 그렇군요. 네?”
“내 딸이라고 했네.”
“딸……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그러면 이분이 대장님의 그…….”
“그렇게 되는군.”
“그렇다면 정통성을 가진 힐렌튼의 황족이군요.”
“그렇군.”
“그 이야기하셨던 섭정공이…….”
“내가 되겠군.”
베르타스의 말에 다들 할 말을 잊었다. 힐렌튼의 수도를 치기 위한 작전을 세우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베르타스가 힐렌튼의 황제와 황태자를 폐하겠다 선언했지만, 그들은 힐렌튼의 기사였다. 현실이 갑자기 성큼 다가온 느낌에 다들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뀌었다면 말하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