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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5/161)

44화 

“안 바쁘십니까? 폐하께서 결계를 거두셨으니 국경의 영지들은 난리가 났을 텐데요. 당장 마물이라도 쳐들어오면 어쩝니까?”

필레르를 위아래로 농락하면서 알뤼르가 말했다. 그의 말에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변경백이 움직였다. 서둘러서 황궁 밖으로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귀족들도 서둘러서 나갔다. 점점 발걸음이 빨라지고 뛰쳐나가는 이들은 모두 국경에 땅을 지닌 자들이었다. 남아있던 귀족들은 사태를 주시했다.

“이렇게 황제 폐하께 불경한 자가 이 황성에 발을 들이고 있을 줄 전혀 몰랐지 뭡니까. 알았다면 폐하께서 아시기 전에 제가 척살했을 것을……. 괜히 폐하의 심기만 어지럽혔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후작 작위를 가진 귀족에 대한 살해를 논하는 알뤼르의 말에 귀족들은 황제에 대한 알뤼르의 충성심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마법사라는 집단이 황제인 이실리스에게 미쳐있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수석 마법사인 그가 집무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귀족들이 많았다. 귀족들이 이실리스에게 국혼을 강요했던 장면을 그가 목도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 * *

“일주일은 휴가로군.”

“폐하. 너무 과하셨습니다.”

“알고 있네.”

너무 편안했다. 그녀의 마력을 잡아먹던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자 몸이 너무 가벼웠다. 황궁 정원에 나와 기다란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이실리스에게 마법사들이 뭐라고 하는 말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녀는 그냥 이대로 쉬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느꼈는지 마법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무렵 멀리서 다가오는 알뤼르가 보였다. 그의 모습에 몸을 바로 하는 그녀였다. 

“어찌 되었는가.”

“후작은 마법사의 탑에 가뒀습니다. 아마 이그나르도의 흑마법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나는 ‘아마’라는 말을 싫어하네.” 

“제가 결계를 삼중으로 쳤지만, 더 치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다중 결계에 대해 말하는 알뤼르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시선을 넘기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아무것도.”

“폐하. 그렇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알고 있네. 그러나 마법사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더 해줘야 한단 말인가.”

이실리스의 말에 마법사들의 마음이 울렸다. 황제가 평범한 그들과 우리라고 묶는 것은 그들의 충성심을 더욱더 두터워지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아니 그러한가.”

웃는 그녀의 얼굴에 알뤼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잔잔한 여운이 그의 가슴에 남았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허리를 숙이는 그에게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에 가서 서는 알뤼르를 향해 웃으면서 그녀가 팔걸이에 허리를 기대 비스듬하게 누웠다. 그동안 황제의 체면을 차리느라 개방된 곳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태도도 변하게 되었다. 비스듬하게 누워 벤치에 다리를 뻗은 그녀의 몸 위에 로브가 내려앉았다.

“날이 찹니다.”

알뤼르였다. 그녀의 흐트러진 자세에 시선도 돌리지 않으면서 말하는 그를 보며 그녀가 웃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변경백은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한 거요!”

“당장 해결책을 제시하시오!”

“제국민이 동요하고 있소이다. 이러다 귀족들의 저택에 쳐들어올 지경이란 말이오!”

이미 이실리스의 마법사들이 자세한 사항을 영상석에 넣어서 온 제국에 배포하였다. 귀족들의 방만함에 황제가 분노하였다는 말과 함께. 그 소식을 들은 제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들을 보호해주던 황제의 마력이 사라지자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보호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막연한 두려움이 생겨버렸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원흉이 되는 귀족들의 저택 앞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실리스가 마력을 회수한 지 단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서 폐하께 갑시다!”

“가서 뭘 어쩌자는 건가.”

“아니 대체 사이르카 후작가는 제정신인 거요? 감히 폐하의 마력을 어쩌고저쩌고해?”

나이 든 귀족 한 명이 분노해서 외쳤다. 그의 영지도 국경에 있기에 이실리스의 보호 마법이 꼭 필요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후작위를 가진 그가 나서자 다른 귀족들도 나서기 시작했다.

“없는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자네도 미쳤군!”

젊은 귀족 중 하나가 입을 열자 다른 귀족들이 그를 만류했다. 그의 말에 다른 백작이 입을 열었다.

“백작가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했군요. 어찌 저런 자가 제국의 귀족이라고……쯧!”

혀를 차는 백작의 말에 다른 자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젊은 귀족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이 그러해? 무슨 사실? 지금 제정신인가요?”

“아무리 심한 말을 했다 해도 사이르카 후작은 제국의 귀족입니다. 그런 사람을 아무런 재판도 없이 그 ‘탑’에 가두다니요.”

“그렇습니다. 얼마 전 그 황족도 그렇지 않습니까.”

“헛소리를! 이 제국에 황족은 폐하와 황녀님뿐이오! 어디서 감히…….”

“후작의 말이 맞네! 핏줄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어림도 없는 소리를! 귀족인 자네가 감히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소리를 해? 이러다 사생아들이 전부 나서서 귀족이라고 하게 생겼군!”

라르헨의 황족은 황족의 피만 이으면 누구에게서 후사를 보아도 상관이 없다. 그들은 황족으로 타고나는 것이었다. 귀족들도 황실을 따라 후사를 받아들였다. 단, 황실과 마찬가지로 핏줄이 가장 중요했다.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부인이나, 남편의 사생아는 귀족이 될 수 없었다. 핏줄의 조건은 작위를 가진 자의 피를 이을 것. 그것이었다.

노후작의 말에 젊은 귀족들이 움찔했다. 그들도 작위를 잇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 자부심은 그들이 누리는 권력의 원천이었다. 지금 한 귀족이 얼결에 내뱉은 말은 제국의 계승법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가 제국의 귀족이라면 라르헨이 곧 망하겠군.”

“아무나 황제가 된다고 덤비고 아무나 귀족이 된다고 덤비겠어.”

한탄하듯 말하는 노귀족들의 말에 젊은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였기에 그들이 은밀한 시선을 나누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어느새 사이르카 후작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그들이었기에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멀리서 알뤼르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흠……. 그렇군.”

“폐하.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군. 그래.”

“제국의 계승법을 흔드는 말이 나왔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그것도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들이 작위를 계승할 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정원에 나와 한가롭게 꽃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황실의 근위대부터 마법사까지 많은 인원이 나서서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그녀의 곁에 황녀와 황녀의 유모인 메릴도 함께하고 있었다.

“메릴.”

“예. 폐하.”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 제게 의견을 물으신다면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메릴의 말에 이실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폐하께서는 지금 이상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색출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옥석을 가리려 하지.”

“그렇다면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조금 더?”

“그러합니다. 아직 그들의 불만이 팽배하지 않았습니다. 극에 달하면 어디선가 생각지 못한 것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요.”

“흠.”

메릴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실리스는 그녀의 손에서 황녀를 안아 들었다. 지금 이실리스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이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대에서 더욱 강력해진 황권을 그대로 이 아이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마력이 없었기에 강한 황권이 아니라면 이 아이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맑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베르타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런 사심이 없는 눈동자. 순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모든 것은 황녀를 위해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메릴에게 물었다.

“졸려하는 것 같군.”

“이제 낮잠을 주무실 시간입니다.”

“방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혼자 가지 말고 저들과 함께 가거라.”

그녀가 손짓하자 알뤼르와 근위 기사 한 명이 메릴의 뒤에 섰다. 아이를 넘겨준 이실리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명 받듭니다.”

흡족하게 웃으면서 이실리스는 다시 정원에 놓인 의자에 기댔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베르타스가 떠난 지 이제 사 일째. 그의 소식은 국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힐렌튼으로 돌아간 자가 칼리파 제국의 국경엔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아는 베르타스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에 허튼 일은 없었으니.

“가만 보면 철저한 자였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폐하?”

“아니, 아닐세.”

고개를 젓는 이실리스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반짝거리는 햇빛에 기분이 좋았다.

“날이 좋군.”

“그렇습니다. 요 며칠 날이 좋아 다행입니다.”

“마력을 소비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이 없다니. 그동안 괜히 결계를 유지하느라…….”

“폐하!”

멀리서 전령이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폐하! 국경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급보입니다!”

“어느 영지인가?”

“사이르카 후작령입니다!”

전령의 말에 이실리스가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뉘었다.

“그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게.”

“폐하. 제국민들이 다칩니다.”

“나는 충분히 경고했네. 나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의 힘을 나눠줄 생각은 없어.”

“폐하.”

단언하는 그녀의 말에 더는 말을 붙일 수 없는 마법사들이었다. 포기하고 물러서는 그들의 뒤에서 귀족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폐하! 소식 들으셨습니까?”

“폐하!”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가로웠던 오후는 사라지고 시끄럽게 재잘대는 귀족들만이 그녀의 곁에 남았다.

“왜들 몰려왔는가?”

“폐하! 국경에 마물이! 마물이 나타났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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