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사이르카 후작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실리스는 태연하게 차를 넘겼다. 그가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너무 쉽군.’
간접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이르카 후작의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런 자에게 내가 당하였나. 이 이실리스 라르헨이.’
아이르의 일도 계속 걸렸다. 흑마법, 그리고 이그나르도의 마법이 다시 등장했다. 그녀가 납치되었던 그 날 이후로 불순분자들을 모두 색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후작. 기억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그대와 내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합니다.”
“그날 난 후작을 치료해주고 나서 정신을 잃었지. 내가 마시던 차에 누군가 약을 탔거든.”
“…….”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 나를 납치했고, 그곳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네. 바로 이것 때문에.”
손을 뻗어 사이르카 후작의 상의를 잡아챘다. 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후작의 상의가 찢어지고 어깨가 드러났다. 정복을 갖출 시간을 주지 않고 데려오라고 명령한 이유가 있었다. 드러난 어깨엔 뱀과 검 문양이 까맣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나?”
그녀의 물음에 필레르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이실리스에 대한 사랑은 음습한 집착으로 변했고 감정의 변화와 더불어 그에게 접근한 세력이 있었을 뿐.
필레르가 처음부터 흑마법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점점 검술의 성취가 빨라지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소드마스터라는 명예도 얻었다. 황제를 곁에서 보좌하는 보좌관이 되었으며 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사라는 칭호도 얻었다. 아직 변경백의 위명에 비하면 미미했지만, 전쟁터에서 공훈도 쌓았다. 그것이 필레르 사이르카 후작이었다. 스스로가 세운 이름. 적어도 필레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어?”
“그러합니다. 폐하.”
되려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말하는 사이르카 후작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받침에 안착하자 마법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녀가 찻잔 때문에 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실리스는 동요하고 있었다.
“말해보게. 그럼 자네가 한 짓은 무엇인가.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짓은…….”
“저는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
“뭐야?”
“마력을 타고 나지 않은 황족을 어찌 황족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마력이 없는데.”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숨이 멈추었다. 저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면전에서 말을 뱉는 자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독대를 하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대놓고 ‘황녀는 황족이 아니다’라고 하는 자는 없었다.
“후계가 될 수 없는 황족은 반쪽짜리. 그냥 포기하시고 부군을 맞이하여 새로운 후계를 세우는 것이 나라를 위해, 이 라르헨을 위해서 더 나은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야!”
그녀의 높아진 목소리에 다들 무릎을 꿇었다. 오직 필레르 사이르카만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치켜세우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을 왜 폐하께서 결정하십니까. 라르헨은 폐하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력으로 유지되는 나라인데 내가 결정할 수 없다고?”
“황족의 마력이 존중되어 마땅하나 황족이 없어도 유지되지 않는 나라는 아닙니다. 생각을 잘못하셨습니다. 폐하.”
“…… 자네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겠군.”
“저뿐이겠습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지금 폐하께서 이렇게 하는 동안에도…….”
“좋네.”
이실리스가 대답하자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사이르카 후작이 멈칫했다.
그의 말은 이실리스가 계속 생각해오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회의감이 들었다. 분명 라르헨을 수호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리 허전한 것인가. 그녀의 노력은 누가 알아줄까. 아무도 없었다. 최측근인 저자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그 순간 이실리스는 황궁의 결계를 거두었다. 마력을 계속 잡아먹고 있는 수도에 대한 결계도 마찬가지였다. 거둬들인 제 마력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알아서 국경을 수호하고 제국을 수호해 보시게. 나는 물러날 테니.”
“폐하!”
말을 듣고 있던 마법사들과 시종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멍한 표정의 사이르카 후작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단언했다.
“오늘부로 수도의 결계를 파한다. 또한, 나의 마력에 기생하던 각 영지에 흩뿌렸던 마력도 회수한다. 사이르카 후작은 귀족파의 중진. 그의 생각이 그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여겨지지 않으니 이는 귀족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터. 온 제국에 알려라. 마력이 없어도 황족은 황족. 그러나 황족에게 불경하고 황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수호할 수 없으니 귀족들이 알아서 했으면 좋겠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실리스를 잡으려던 사이르카 후작은 그녀의 마력에 의해서 밀려났다.
“후작. 내가 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 보군. 한번 절절하게 느껴보길 바라네.”
장미향이 맴도는 방에서 나오자 속이 후련했다. 자신의 마력을 잡아먹고 있던 모든 곳에 마력을 끊었다. 나라는 혼란에 빠지겠지만 이실리스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의 아이는 영원히 황제의 위에 오를 수 없을 테니까.
“폐하!”
멀리서 베루스 공작과 귀족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수도의 결계가……! 수도가!”
“아, 내가 그리하였네.”
너무도 태연한 그녀의 말에 다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장 원래대로 돌려놓으십시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귀족들의 아우성에 이실리스가 손을 올렸다.
“내 조금 전 사이르카 후작과 독대를 하였네.”
그녀의 말에 모든 귀족이 숨을 죽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영상석을 보면 알 터. 내 생각을 해 보았는데 자네들은 너무 당연하게 나의 희생을 요구하더군.”
“폐하!”
“그래서 나도 한 일주일만 쉬어보려고 하네.”
“무슨 말씀을…….”
“나의 마력에 기대어 살면서 고마운 줄 모르니 그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껴보아야 하지 않나?”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는 이실리스를 누구도 잡을 수 없었다. 뒤이어 나온 사이르카 후작에게 달려가는 귀족들을 보면서 속으로 비소를 남겼다. 그녀의 뒤를 마법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 정도는 마법사들과 칩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처는 양날의 검이었다. 이실리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를, 황녀를 후계의 위에 오르게 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자리하는 불순분자들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 * *
“후작!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마법사들이 틀어 놓은 영상석을 본 귀족들이 득달같이 사이르카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황녀님께 손을 대? 그분이 마력이 없다 하나 황족이야!”
“마력은 나중에 발현되기도 하는 법인데 그것을 모르나?”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가 천천히 걸어오면서 말했다. 그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네가 폐하께 이리 오만방자한 자인 줄 몰랐네.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분노를 담아 외쳤다.
“기실 이 나라에서 황족이 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좋은 자리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릴 뿐. 혈통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세상에…… 자네 미쳤나?”
“내 지금까지 귀족이랍시고 방자한 자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저렇게 정신 나간 자는 처음 보았군.”
나이 든 귀족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귀족들은 사이르카 후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동조하는 모습이 보이자 베루스 공작이 말했다.
“자네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은 폐하의 마력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것일세.”
“그놈의 마력 마력! 마력이 없어도 라르헨은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습니까? 황족이 왜 필요합니까? 나라에 마력이나 쏟아붓는 자들인데요! 그냥 알아서…….”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사이르카 후작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아버지인 변경백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정신 나간 녀석을 아들이랍시고 감싸기만 했으니 나의 죄가 큽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는 변경백의 행동에 귀족들이 웅성댔다. 나이가 지긋한 그가 나서자 아무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 황족의 마력이 필요한 것이면 마력만 뽑아도……!”
“그 입!”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군요.”
알뤼르가 손을 휘저었다. 사이르카 후작에게 결박 마법을 발동한 그가 변경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작의 생각에 변경백께서도 동의하십니까?”
서릿발 같은 음성이 내리꽂혔다.
“난 아닐세.”
“좋습니다. 지금 후작이 한 말에 동의하시는 분들 혹시 계십니까?”
알뤼르의 서늘한 시선에 다들 시선을 피했다.
“폐하에 대한 불경은 라르헨 제국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 사이르카 후작은 구금되며 그 배후를 캐기 위해 어떤 방법도 불사할 작정입니다.”
“그 아인 귀족일세!”
“어느 귀족도 폐하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전의 일을 잊으신 건 아니시지요, 변경백?”
“…… 잊지 않았네.”
“난 또,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알뤼르가 가볍게 다시 손짓하자 그 자리에서 사이르카 후작이 떠올랐다. 오라를 피우려 노력했지만, 그의 오라는 알뤼르에 의해 제지되었다.
“오라를 사용한 것은 가상하나 상대를 보고 했어야지. 일개 소드마스터 주제에!”
“으아아악!”
주먹을 꽉 쥐자 사이르카 후작이 비명을 질렀다. 그를 옭아매고 있던 마력들이 그의 몸 곳곳을 파고들어 그의 오라를 좀먹기 시작했다.
“안 돼!”
“폐하께 불경한 말을 한 자, 즉결 처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