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161)

42화.

베르타스의 말 덕분에 이실리스는 국혼을 피할 수 있었고 그녀의 아이를 노리는 반란 분자를 색출해 내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헛소리를 한 건가?”

“헛소리라니.”

우스만 칼리파가 아침부터 그녀를 찾아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베르타스 힐렌튼은 황녀를 구한 라르헨의 은인. 그 은인이 나와의 국혼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단지 국혼을 일 년만 미뤄달라고 말했는데 어찌 안 들을 수 있겠나.”

“이실리스!”

“말조심하게. 난 라르헨의 황제야.”

저의 이름을 부르는 우스만의 말에 이실리스가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차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우스만이 곧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사막 제국의 황태자를 우롱한 죄를 묻겠어.”

“난 우롱한 적이 없네. 부군을 맞이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야. 다만 일 년 뒤에 하겠다는 것이지.”

“하! 그래서 그 자식을 맞이하려고 그러는 것 아닌가. 그 베르타스 힐렌튼을.”

“어디서 그런 망발을…….”

“그 자식이 아이의 아버지라 그런 건가?”

우스만의 말에 그녀의 숨이 멈추었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우스만이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두 사람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도 용서하지 않을 시간이 흐른 뒤, 우스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유가 없지.”

“황녀는 내 아이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아이의 아버지라면 조건도 달라지지. 그는 라르헨의 은인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뭐?”

“그가 해야 할 일을 하였는데 라르헨의 보답을 받을 일은 없어.”

“우스만 칼리파.”

“왜 내 말이 틀렸나?”

턱을 치켜드는 우스만의 말에 가라앉은 눈을 하고 이실리스가 다시 말했다.

“세상엔 자식을 구하지 않는 부모도 있네.”

이번엔 우스만의 입이 다물렸다. 이실리스의 침잠된 표정에서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는 우스만이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실리스는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할 말이 끝났다면 나가보게.”

“이게 끝이 아니야.”

“우스만. 너와의 인연은 선대에서 끝난 것으로 하지.”

“무슨 헛소리를!”

“내가 그리 정했으니……. 그렇게 되겠지.”

눈을 들어 그를 직시하는 이실리스의 표정에서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인연을 끊어내고 완연한 황제의 얼굴을 하는 이실리스를 보니 우스만은 분통이 터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 여인이 마침내 자신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낼 작정이구나.

“그러니 본국으로 돌아가게. 마침 신년제 기간도 끝났군.”

“이실리스 라르헨!”

“무례를 용서하는 것도 여기까지일세.”

이실리스의 냉엄한 목소리에 우스만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 *

베르타스 힐렌튼을 힐렌튼으로 돌아가게 하면 저의 차례가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판단을 잘못한 자신을 책하며 우스만은 복도를 걸었다.

‘아니, 베르타스가 보통이 넘는 거겠지.’

그러나 순순히 인정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실리스를 포기하기엔 자신의 마음이 너무 깊고도 깊었다. 고국으로 돌아가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일 년을 벌었다면 그 자신도 일 년을 번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적어도 필레르 사이르카와 국혼을 하진 않겠지.”

그랬다. 라르헨 제국에 있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사이르카 후작과의 국혼도 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우스만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다리는 것은 이골이 났다. 

“전하. 급보입니다.”

“급보?”

우스만이 생각을 갈무리하려는 찰나, 부관 할리만이 다급히 그에게로 달려왔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국경을 쳤답니다!”

“뭐야?”

힐렌튼 제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칼리파 제국의 국경을 건드린다는 소식에 우스만이 화들짝 놀랐다. 그가 놀라든 말든 할리만이 말을 이어갔다.

“국경에서 힐렌튼 제국의 군대와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땅을 또 힐렌튼에 뺏길 시 민심이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 제국민들은 지는 것을 싫어하지.”

“그것은 전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들어가신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베르타스 힐렌튼의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하니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는군.”

“베르타스 힐렌튼이 그사이에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행적이 이상해.”

“네?”

“힐렌튼의 황실에서 그를 부른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칼리파의 국경에서 나타났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우스만의 말에 할리만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해 돌려졌다.

“그렇다면…….”

“뭔가 있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

“그럼 더욱 국경으로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가야지. 그래야 베르타스 힐렌튼에게 한 방 먹일 것 아닌가.”

“이미 한 방 먹인 줄 알았는데요.”

“그가 이 황성을 떠났으나 국혼이 미뤄졌으니 결과적으로 나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이 분노를 풀어낼 곳이 필요하지. 국경으로 가겠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풀어내면서 우스만이 할리만에게 말했다.

“내 검을 가져와라. 나는 성 밖에서 기다리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상체를 드러낸 채 위풍당당하게 라르헨의 성안을 걸어서 빠져나가는 우스만의 뒤를 다른 전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복도에서 사이르카 후작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후작님.”

“우스만 칼리파도 물러나는군.”

“후작님만 후보로 남았으니 잘 된 것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

“남아있는 사람이 후작님뿐이니 잘 된 것 같습니다만.”

백작의 말에 필레르가 웃었다. 눈은 웃지만, 입매는 웃지 않는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백작이 몸을 움츠렸다.

“가보게.”

저의 눈치를 보는 백작을 손짓하여 쫓아낸 필레르가 생각에 잠겼다.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정말로 라르헨 황제의 부군 자리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베르타스 힐렌튼처럼 반쪽짜리 황족이 노리기엔 그 자리가 녹록지 않은 자리였다. 라르헨의 귀족들이, 그 혈통을 중요시하는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우스만이 물러선 것도 다른 이유가 있을 터. 필레르는 그것이 궁금했다. 저 저돌적인 남자가 물러서는 것에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실리스의 목줄을 부여잡을 약점이 될 것 같았다.

“후작님.”

마법사들이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인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폐하께서 날?”

황제의 직속 마법사들이 그를 둘러쌌다. 의아함을 느꼈지만 필레르는 이내 표정을 바로 하고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가?”

“절 따라오면 됩니다.”

앞서 나가는 마법사의 뒤를 따르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마법사들이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냥 순순히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변경백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후작인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자네 목숨이 열 개쯤 되는 것 같군.”

“마법사는 황제 폐하의 명 이외에 허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그놈의 충성심은!”

혀를 차는 필레르의 말에 마법사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따라가겠네. 그러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네.”

“가시죠.”

걸음을 옮기지 않는 필레르에게 마법사가 재촉했다. 

‘설마 들킨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가 했던 모든 일은 증거가 남지 않았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었다. 그리고 그 심증이라는 것도 이실리스가 그를 믿는 한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법사들도 그도. 

‘어딘가에서 증거가……. 아니, 아니지.’

그가 불려간 곳은 접견실도 아니고 알현실도 아닌 무수한 방 중 한 곳이었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이실리스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반응한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왔는가.”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폐하.”

“앉게.”

마주한 자리에 앉으면서 필레르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그대를 무슨 일이 있어야만 부르나. 티타임을 하려는데 적적하여 불렀지.”

시녀가 다가와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쪽에서는 차가 우려지고 있었다. 방 안에 장미 향이 흘렀다.

“필레르.”

“네. 폐하.”

“장미를 좋아하나?”

“좋아합니다. 꽃들의 여왕이 아닙니까.”

“그렇군.”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넘기는 이실리스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필레르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 잘 어울리는 꽃입니다.”

“그런가?”

“네.”

방 안의 온도가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필레르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후작. 내 궁금한 것이 있네.”

“무엇입니까.”

차가 우려지고 그의 찻잔이 채워지자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왜 어젯밤에 황녀의 방 주변을 서성였나?”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버님이 도착하셔서 직접 알리러 왔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시간이 너무 공교로워서 말이야.”

“공교롭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흘렀고 황녀의 방에선 사이한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네.”

이실리스의 말에 필레르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젯밤 기운을 갈무리하지 못한 것을 보았을 줄 몰랐다. 일을 치르는 도중 아버지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기운이 흐트러진 것이 문제였다.

“잘못 보셨겠지요. 제가 황녀님께 무슨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설령 무슨 짓을 한다면 이렇게 순순히 들키진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인가.”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폐하.”

눈을 내리까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필레르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후작. 이건 뭔가?”

이실리스가 손짓하자 방 한편에 놓여있던 영상석이 재생되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적나라하게 보이자 필레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데도 할 말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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