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한참을 이동하고 눈을 뜬 곳은 굉장히 어두운 방 안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진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문득 손목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려 마력을 움직이는 순간, 몸 안에서 마력이 쑥 빠져나갔다. 그녀의 마력을 삼킨 마법진이 환하게 빛났다. 빠져나가는 마력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멈춰지지 않았다. 강제로 마력이 뽑혀 나가고 있었다.
“안 돼!”
제어하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이실리스!”
“아버지!”
피를 뒤집어쓴 아버지의 모습에 흠칫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의 아버지가 오라를 사용하여 마법진을 갈랐다. 마법진이 갈리면서 그녀를 구속하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고 그녀의 마력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목을 휘저으면서 그녀가 주문을 영창했다.
* * *
“폐하?”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네. 선황께서 나를 납치한 자들과 거래한 것을.”
그랬다. 선황의 거래로 인해 마법사들은 움직일 수 없었고 그녀의 아버지만이 단신으로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갇혀있는 곳을 찾아왔다. 선혈이 낭자했고 하마터면 그녀의 아버지도 죽을 뻔했었다.
“지금도 난 의문이라네. 대체 선황은 그들과 무슨 거래를 하였기에 날 버려둔 것인지.”
“폐하. 그것은…….”
“그래도 선황은 나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런데 왜 날 버려둔 거지?”
대답할 이가 없는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어두워지는 그녀의 표정을 본 베루스 공작의 고개가 더욱 숙어졌다.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의 말에 답하려고 할 때, 이실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그것이겠지.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황족의 자격이 없다.”
“…….”
“그러나 모든 것을 답해줄 사람은 지금 없군.”
“폐하.”
“하지만 난. 지금 황녀에게 뻗쳐지는 저 손길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네. 선황과 나는 다른 사람일세.”
“어찌하시렵니까.”
“유모의 증언에 의하면 기사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비슷한 시간대에 복도를 서성인 자를 모두 잡아 와라. 영상석을 확인하면 될 터.”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일 먼저 사이르카 후작을 잡아들이게.”
“네?”
“그가 복도에서 나와 마주쳤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일세.”
그녀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곧 알뤼르가 들어와 그녀에게 또 다른 보고를 전했다.
“황녀 전하와 유모의 방에 보호 결계를 쳤습니다.”
“이전의 결계도 파훼 되었네.”
“이번엔 다를 겁니다.”
자신하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르는 일. 보호 결계는 얼마든지 파훼 될 수 있었다.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황녀를 노리는 이들을 찾아내서 잡아 죽이지 않는 한 얼마든지 계속될 일이었다.
“계속해서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 어찌했으면 좋겠나.”
“차라리 전하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은 어떨는지요.”
“황녀를?”
“그러합니다.”
“…….”
“바꿔치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바꿔치기?”
“그렇습니다. 전하를 먼 곳으로 보내고 전하와 비슷한 외모의 아이를 데려다 놓는 것은 어떻습니까.”
“황녀를 위해서 다른 제국민을 희생하자는 것인가?”
“폐하. 황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제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
“그러합니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진 마법사다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알뤼르가 다시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정도는 괜찮네.”
“안 됩니다.”
누우라 종용하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이 많은 밤이었다. 눈을 감으려는 순간 베르타스가 떠올랐다. 마법을 사용하여 그의 방으로 이동하자 뜬 눈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오지 않는 줄 알았어.”
“일이 생겨…….”
부지불식간에 끌어 안겨졌다.
“이실리스. 난 너에게로 돌아올 거야.”
“베르타스.”
“그러니 날 생각해줘. 네가 부군을 맞이해도 상관없다.”
“상관없다고?”
“내가 돌아오는 날 그자를 죽일 것이니.”
새파랗게 빛나는 베르타스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적어도 라르헨의 황제에게 마음을 내어 달라고 했으면 그 정도 결심은 하고 있어야지.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 맞추는 베르타스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이실리스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베르타스의 입술이 멈추었다.
“베르타스.”
“이실리스.”
“그대가 돌아오면 그대의 처분을 생각해 보지. 그러니 언제고 내게 돌아와.”
“그러면 나를 받아줄 건가?”
“그것은 그대 하기에 달렸지.”
“그런 것인가?”
“이정도는 많이 양보한 것임을 알 텐데.”
“국혼을 치르지 않을 건가?”
“적어도 지금은.”
“방법이 있나?”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방법은 늘 존재하지.”
“나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럴 수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는 눈을 빛냈다. 베르타스의 마음이 어떠할지 모르지만 이실리스는 결심했다. 그와 나란히 서서 남은 생을 함께하기로.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그녀의 곁에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곧 돌아올게.”
“돌아오면 넌 내 곁을 벗어날 수 없어.”
“오만한 말이로군.”
황녀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길을 떠나야 하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남아달라 말하면 남아줄 것이 분명했기에 더더욱. 사실 두렵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 혼자 아이를 지키는 것이 어렵고 힘든 길이니 나를 도와달라.
‘하지만 안 되겠지.’
이렇게 그를 잡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힐렌튼을 수호해야 했다. 그녀 또한 라르헨을 수호하는 입장이기에 당연히 그를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했다. 관대한 척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음 한 켠이 서늘했다. 그 마음을 애써 감추며 목걸이를 내밀었다.
“가지고 가게.”
“돌아오겠어. 금방.”
이실리스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가 떨리자 그가 속삭였다.
“추운가?”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로군.”
“들켰군.”
처음 잠자리를 함께하던 그 순간의 말을 그대로 읊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을 돌려주며 베르타스도 웃었다. 눈을 휘며 웃는 그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마음이 편안했다. 인정하면 이리 편할 것을 그동안 이것이 뭐라고 계속 부정했단 말인가.
전부를 줄 수 없다면 일부라도 내보이며 그를 잡는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손에 쥐고 놓지 말라고 했던 선황의 말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설령 그녀의 이기심으로 인해 베르타스가 망가지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놓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죽더라도 내 옆에서.”
“내가 있을 곳은 너의 옆이니.”
“내게 돌아와.”
“너의 곁으로 돌아올게.”
“아니, 나와 내 아이의 곁으로.”
아이의 아버지로서 인정하겠다는 의미를 품은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놀란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의 진심이 통하기를 바라면서 이실리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이제 도망치지 않겠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내 옆에 서서 자리를 지켜.”
“금방…… 금방 다녀올게.”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걸세.”
“지고한 황제의 옆자리에 서는 것인데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허리를 붙잡는 베르타스의 손길을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에 닿아오는 그의 입술이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 뜨거움에 몸을 맡기면서 그녀는 곧 생각을 멈추었다. 열락의 밤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알현장에서 이실리스는 베르타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감각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어젯밤의 정염으로 넘실대던 눈동자를 지녔던 자가 맞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사사로이 드는 상념을 애써 지우며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돌아간다고?”
“그러합니다. 폐하.”
“황녀를 구해 준 은인께 아무것도 보답해주지 못하였는데?”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의 수하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빙긋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을 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 그가 말했다.
“라르헨의 황족을 보호한 것은 제게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니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각하!”
“헥터 경.”
옆에서 그의 부관이 외치는 소리에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는 그였다.
“황족을 구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보답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르헨의 황족을 구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니. 혹여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의 눈이 빛났다. 듣는 이들은 분개했지만, 그와 이실리스만이 알고 있었다.
“폐하.”
“말해보게. 무엇을 원하는가.”
“들어주시겠다 하시면 말하겠습니다.”
“듣지도 않고 수용할 수는 없는 일. 듣고 나서 결정하겠네.”
“황족을 구한 이에게 그 정도도 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라르헨 제국에 위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내 기꺼이 들어주지.”
그녀의 말에 잠시 숨을 고른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국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소식이 들어갔을 줄은 몰랐군. 그래서?”
“저 또한 소드마스터이니 폐하의 부군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국혼을 미뤄주십시오.”
“미뤄달라?”
“단 일 년. 일 년 후면 됩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그의 말에 알현장에 있던 라르헨의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느니 저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냐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그대.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황족을 구한 그대가 하는 요구는 그게 다인가? 나의 국혼을 일 년 미루는 것?”
“그것이면 족합니다.”
“안 됩니다, 폐하!”
“그 입 다무시게.”
베르타스와의 대화에 끼어드는 귀족에게 이실리스가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황족을 구했다면 더한 것을 요구해도 되었을 터인데 그런 요구라니. 좋다. 그대를 부군으로 받아달라는 요구도 아니고 단지 일 년을 미뤄달라는 말이라면 들어주겠네.”
“폐하!”
“그 입 다물라고 하지 않았나!”
이실리스의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황족의 목숨을 구했으니 더한 것을 요구한다 해도 들어줘야 하는데 나의 국혼을 일 년 미뤄달라는 요구일 뿐일세. 라르헨 황족의 목숨값이 이정도도 안 된단 말인가!”
역정을 내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귀족들의 허리가 숙어졌다. 라르헨의 귀족들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스만 칼리파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잡음이 더는 들리지 않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약속하지. 국혼을 일 년 미루겠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베르타스가 알현장을 빠져나갔다. 소란스럽게 웅웅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실리스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걸어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흩뿌려지는 빛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