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이실리스에게 차마 바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베르타스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굳어진 표정을 숨길 수가 없는 이실리스였다.
“그러면…….”
“금방 돌아올게.”
“헛소리.”
“이실리스.”
저의 이름을 부르는 베르타스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지 말라고 잡아볼까. 잡는다면 그는 나에게 잡혀줄까.
“베르타스.”
“네가 가지 말라 한다면 가지 않겠어.”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듯 말하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더욱 입을 뗄 수 없었다. 속 안의 말을 날것 그대로 내뱉기엔 너무 염치가 없었다.
“가야만 하는 일이겠지.”
“나에겐 중요한 일이야.”
“나를 두고 아니, 우리의 아이를 두고 갈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너와 아이의 곁에 서기 위한 일이야.”
이실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참했다. 아무렇지 않게 나만의 아이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우리의 아이라니. 저의 비겁함에 몸서리쳐졌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의지를 담고 빛나는 사내의 눈빛을 목도한 그녀로서는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부군이 되어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부군은 바로 너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목걸이는 내 처소에 있어. 너의 방으로 가져다주지.”
“꼭 돌아오겠어.”
“아니어도 괜찮아.”
아스라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에 베르타스는 단언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너의 곁으로 돌아오겠어.”
“베르타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는 것이 아니야.”
“아니.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 날 기다려줘.”
“황제의 시간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야.”
“이실리스, 너의 시간 속에서 날 기다려줘.”
베르타스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는 그녀였다. 그녀를 향해서 쓴웃음을 지은 베르타스가 몸을 돌렸다. 이따가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호위 기사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부를 때까지 그렇게.
* * *
늦은 밤. 서랍에서 목걸이를 꺼내든 이실리스가 달빛에 그 목걸이를 비추어 보았다.
“마도구가 맞군.”
그것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대 마법이 사용된 마도구였다. 수준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제대로 보지 못할 마법진으로 가득한 목걸이였다.
“이걸 왜 몰랐을까.”
유심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관심이 없었던 자신을 책하면서 이실리스는 두 개의 목걸이를 살폈다. 하나는 남성용, 다른 하나는 여성용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남성용의 목걸이엔 변형마법이 여성용의 목걸이엔 수호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실리스처럼 강력한 마법사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황녀에게 줘야겠군.”
두 개의 목걸이를 집어 든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황녀에게 들렸다가 베르타스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이 늦은 시간에 후작이 여긴 웬일인가.”
황녀의 방이 있는 층은 늦은 밤에 유모와 허락된 자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층에서 사이르카 후작을 마주하다니.
“웬일이냐고 물었네.”
“변경백께서 오셔서 폐하께 알리려 가던 참이었습니다.”
“내일 날이 밝은 후에 찾아오지 않고.”
“급하신 듯하여…….”
“내일 와도 괜찮네. 후작.”
웃는 그녀에게 사이르카 후작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 황녀에게 가보려고 하였네.”
“그렇군요.”
어딘지 모르게 위험해 보이는 눈동자에 이실리스가 그를 경계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사이르카 후작은 그녀가 알던 후작이 아닌 듯했다.
“어디 안 좋은가?”
걱정을 담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이르카 후작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닙니다. 폐하.”
“얼른 가서 쉬게. 늦게까지 무리해서 그런 것 같군.”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멀어지는 사이르카 후작의 눈동자에서 얼핏 어둠을 본 것 같았지만, 잘못 본 것으로 넘겼다. 황녀의 방 앞에 다다른 그녀가 문을 열자 그 안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급하게 어둠의 기운을 물리치는 마법을 건 그녀의 눈에 쓰러져있는 메릴이 눈에 들어왔다. 황녀가 있는 아기 침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저주의 마법이 타고 올라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마법이었던 듯했다. 잔인한 마법이었다. 서서히 다가가서 몸속 가득히 어두운 기운을 퍼부어 천천히 죽이는 마법. 한눈에 마법을 파악한 그녀가 황녀를 안아 들었다. 자는 아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 서둘러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황녀의 방 앞에 걸려 있던 보호 마법은 파훼 된 지 오래였다.
“대체 누가!”
분노로 떨려오는 몸을 숨길 수 없었다. 아이를 쥔 팔에 힘이 들어갈까 두려워 애써 분노를 진정시켰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무슨 일이 십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복도를 순찰하던 근위병이 뛰어들었다.
“황녀의 방에 침입자가 들었다. 영상석을 가져오고 수석 마법사를 불러라.”
“명을 받듭니다!”
서둘러서 방 밖으로 나가는 근위병을 지켜보던 그녀가 메릴에게 회복마법을 걸었다. 정신이 든 메릴이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폐하.”
“어찌 된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습니다.”
메릴의 말에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황녀의 안위가 위협받은 것이.
“아!”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나?”
“발걸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
“네. 기사의 발걸음 소리였습니다.”
“그걸 어찌 알지?”
“언니와 만났던 사람이 기사였습니다. 그래서 압니다. 자주 들었어요. 기사들 특유의 그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 아마 맞을 겁니다.”
‘기사라.’
메릴의 말에 이실리스는 방금 마주쳤던 사이르카 후작을 떠올렸다. 그도 기사였다.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한 유일한 자였다.
“설마 후작이…….”
“의심 가는 자가 있으십니까, 폐하?”
물어오는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확인해야 했다. 사이르카 후작이 반란 분자라면 변경백도 그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진명의 수호자 중 한 명이 베루스 공작이라고 하기에 다른 한 명은 변경백일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다니. 황녀를 끌어안고 내려놓지 않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메릴이 그녀에게 말했다.
“황녀님을 제게 주십시오.”
“아.”
아이를 넘겨주자 목걸이에 시선이 닿았다. 아기가 하기엔 너무 길어 보였다.
“이건 조금 위험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이렇게 하면 될 것 같군.”
목걸이의 줄에 착용자에게 맞추어 변하는 마법을 걸었다. 순식간에 줄어드는 줄을 보면서 메릴이 놀란 듯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은 정말 신기하네요.”
“본적이 없는가.”
“마도구는 본적이 있지만, 마법은 처음입니다.”
정말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메릴에게 웃음이 어렸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웃는 메릴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도 마주 웃었다. 제국민이 가까이에서 마법을 보지 않았다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전쟁의 위험이 닿지 않았다는 소리이니.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가.”
“폐하께서 계시는 수도에 있으니 그런 끔찍한 일은 겪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로군.”
“그러나 때로는 전쟁보다 더한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가.”
“그러합니다.”
이실리스가 물어봐 주길 바랐다는 양 냉큼 대답하는 메릴의 모습에 그녀가 또다시 웃었다.
‘호가호위라더니 이때를 기다린 모양이로군.’
“무슨 일인지…….”
“폐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베루스 공작의 모습에 이실리스의 입이 다물렸다. 메릴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녀에게 저주의 마법을 건 자가 있다.”
“저주요?”
황궁의 결계는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강화되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황녀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말과 같았다.
“내 눈으로 보았으니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터. 배신자가 내 궁에 드나들고 있다. 베루스 공작.”
“이럴 수가.”
충심으로 똘똘 뭉친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마주했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가 도착하자 이실리스는 그에게 메릴과 황녀의 안전을 맡겼다. 수석 마법사를 따라 방을 나서는 황녀와 메릴의 모습을 지켜본 그녀가 베루스 공작에게 다시 말했다.
“지난 일을 기억하는가 공작?”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
“내가 납치당했던 그 순간을 말일세.”
“폐하.”
* * *
눈앞이 어두웠다. 이실리스는 분명 황궁의 정원에서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늘 그렇듯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 꽃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이후엔 기억이 없었다. 입안에 씁쓸한 장미향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진 않았다. 주변에서 웅웅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손목이 무거운 것으로 보아 무언가가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황녀가 맞나?”
“저것 봐. 붉은 머리잖아.”
“눈동자 색은 확인했나?”
“눈을 감고 있어서 아직 알 수 없지만, 머리카락 색을 봐서 확실해.”
들리는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황녀인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돈은?”
“여기.”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아득했다. 다시금 멀어지려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면서 이실리스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차에 약을 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일에 가담한 자는 최소 다섯. 그녀의 차에 접근할 수 있는 자, 황궁에서 그녀를 빼낼 수 있는 자, 황궁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 황족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자,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자.
‘누구…….’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을 하려 애썼다. 이마저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신을 잃어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그녀의 머릿속엔 타오르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라르헨의 황족을 돈을 받고 팔다니. 저런 자들이 나의 제국에 존재한다니. 저런 자들이 나의 그리고 어머니의 보호를 받는 제국민이라니!
“데리고 간다. 귀한 몸이니 조심히 다뤄.”